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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완당 시대

새샘 2022. 9. 1. 21:35

김정희 초상(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0%95%ED%9D%AC)

 

조선 후기의 완당시대는 중국에서 새로운 미술 풍조가 들어온 시기를 말한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 등 수백 개에 이르는데, 완당과 추사라는 호가 가장 유명하다.

 

이 완당시대라는 말을 하게 된 데에는 독특한 연유가 있다.

다시 ㅁ라하자면 이 시기에 오면 중국 강남의 문화라고 할까, 중국의 문인 풍조 文人風라고 하는 것이 조선과 중국 청나라 즉 조중朝中 교류에 의해서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런 문인 분위기의 풍조를 들여 오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완당이다.

 

그런데 완당이 문인 풍조 도입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좀 편협된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1658~1722)의 ≪연행일기燕行日記('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이라고도 함)≫가 나온 이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이 중국에 갔다 와서 글을 썼고, 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과 함께 중국을 다녀왔는데, 이 두 사람 모두 사검서四檢書[조선 정조 때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규장각 서책의 교정과 책을 베껴 쓰는 서사書寫 일을 맡아보던 벼슬)으로 뽑힌 네 사람의 실학자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박제가朴齊家를 이르는 말]로 유명할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해서도 지식이 해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2, 3년 후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연경燕京(베이징의 옛 이름)을 다녀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펴내 중국 풍조를 가르쳐주었는데 그 당시 중국에서 이 사람들이 접촉한 독특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에서도 유명했던 중국 청나라 시인 어양산인漁洋山人 왕사정王士禎의 시집 ≪감구집感舊集≫에 보면 조선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시가 들어 있다.

이것은 청나라에 저항했던 사람의 시라고 해서 넣었던 모양인데, 따라서 강남에서는 이 ≪감구집≫을 통해서 조선 김상헌의 시가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유득공, 이덕무 같은 학자들, 그 다음에 좀 있다가 박제가는 세 번이나 청나라로 왕래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 이 사람들이 시도 잘하고 글도 잘 쓰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나라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투어 조선과 서로 교류를 청했던 것이다.

그중에는 위로는 장관급 사람들도 있고, 아래로는 재야 문인, 홧, 그림 그리는 사람도 있고 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대하였으되, 다만 그 청조의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맥락을 같이한 점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실지 중국에 알려졌다.

가령 이때 사검서의 시집을 중국의 엄성嚴誠 반정균潘庭均이라는 사람이 시를 써서 중국에 알려졌고, 유혜풍柳惠風의 유명한 <이십일도 회고시 二十一都 懷古詩>라고 하는 것을 청나라에서 출판도 되었다.

그런 식으로 조선과 청나라와의 교류가 대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청朝淸간의 활발한 교류는 정조대왕의 일종의 문화정책과도 관련되어 있다.

알다시피 정조는 명나라의 유풍을 따르는 중화적 요소를 강조했던 임금이긴 하지만 동시에 중국에서 나오는 문헌을 수집하는 데도 열정을 기울였다.

가령, 중국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만든다는 말을 듣고 사겠다고 했다가 이 책을 팔지 않자 그 대신 강희康熙 연도年度(1662년부터 1722년까지 61년간 사용)에 완성되었던 유명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정식 명칭은 '흠정欽定고금도서집성')≫이라고 하는 1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청대의 백과사전을 사오기도 했다.

 

아무튼 이 시대에 와서 중국 문화가 조선에 적극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재미있는 얘로 명나라 유신으로 유명했던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같은 유명한 책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이때 와서이다.

이덕무가 이 책을 사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사검서와 홍대용 같은 사람들이 교분을 맺은 이들을 그 다음 사람한데 소개해 주어서 그 다음 사람들이 계속 만나게 된다.

 

본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에게서 배운 완당은 2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박제가는 청나라에 3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얻은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완당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

청나라에 간 완당 또한 당연히 우선 박제가에게서 전해 들은 그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했다.

그래서 만나본 사람이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 완원阮元(1764~1849) 같은 사람들이었다.

옹방강과 만나서 필담을 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옹방강은 사실 당시 청조에 유행하던 고증학에는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송나라 때의 성리학에 가까운 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완당과 호응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간 사람들은 다들 성리학 계통이기 때문에 성리학 계통인 옹방강과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가령 고증학에 정통했던 염약거閻若璩(1636~1704)에게서 배운 사람들과는 잘 접촉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완당은 옹방강의 석묵서실石墨書室(옹방강의 수장물품을 넣어두었던 방)에 들어가 옛날 고각본古刻本(고판각본古板刻本: 목판으로 인쇄한 오래된 책), 송나라 탁본拓本(비석, 기와, 기물 따위에 새겨진 글씨나 무늬를 그대로 떠낸 종이), 고서화들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로소 중국의 진적珍籍(진서珍書: 진귀한 책), 고각본, 송나라 탁본, 고서화들을 다 보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처음 보았던 것 중에는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이라는 동파 소식의 글씨가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옹방강의 아들인 성원星原 옹수곤翁樹昆과 나이가 같다고 해서 완당에게 소개해 주어 완당은 옹수곤과 아주 친구가 되었다.

또 박제가를 통해서 양봉兩峰 나빙羅聘도 알았는데 나빙은 그때 이미 죽었고, 옹방강의 제자뻘이 되는 야운野雲 주학년朱鶴年이란 화가를 알아서 추사가 돌아올 때는 주학년이 기념으로 완당이나 옹방강이 좋아하는 동파 소식의 그림을 그려주고 그림 위에 옹방강이 제발題跋[제사題辭(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와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개요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써주었다.

그러니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완당과 직접 연관되었던 사람 중에는 완원이 있다.

완원은 중국학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중국학의 대가 중의 대가이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편찬한 사람이고, 또 ≪연경실집硏經室集≫이라는 문집을 냈고, ≪황청경해皇淸經解≫라는 청나라 경학經學(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에 대한 주해서를 편찬한 사람인데 이 사람을 만났다.

완당이 장년 때의 완원을 만나 접해보고 감탄해서 그 사람 이름자인 하나를 따서 자신의 호를 완당이라 했던 것이다.

또 완원도 감격을 해서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박식하고 잘 아는가 해서 자기가 지은 귀한 ≪연경실집≫ 초간본 한 벌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완당을 통해서 그리고 홍대용 이하 사검서를 통해서 전해오던 청나라 문인들과 접하게 되거나, 직접 접하지 않더라고 글로써 접하게 되고, 그 사람들의 취미를 흡수하게 되고, 따라서 일종의 문인 분위기를 조선에 조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완당은 독특한 일종의 격이 있는 분위기를 청나라에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시대에 대한 연구로는 일본 후지쓰카 지카시(등총린藤塚鄰)라는 사람의 유명한 연구가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완당은 중간에 그 집안이 모략을 받아서 귀향을 가게 된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또 갔다와서는 친구 권돈인權敦仁(1783~1859)과의 관계 때문에 또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완당은 예술가로는 기본적으로 글씨를 잘 쓰는 서가書家(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그럴 것이 완당 글씨는 제주도로 유배 갈 때부터 개성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하물며 8, 9년 동안의 유배생활 동안 매일 글을 쓰고 앉아 있었으니 그 독창적인 글씨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2. 9.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