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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0: 청계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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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0: 청계천

새샘 2022. 8. 30. 18:40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청계천>

 

 

개천開川이라 불린 청계천淸溪川조선시대 이래 서울 도성의 큰 인공적인 물길이다.

때문에 청계천의 변화는 도성의 변화와 일정하게 궤를 같이 한다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복개된 청계천이 2005년 복원된 사실은 2000년 이후 서울 도심의 경관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켠 대표적인 서울시의 사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진행된 하천 복개구조물 및 근대화의 상징으로 대표되었던 청계고가도로 등을 철거하고, 자연과 문화가 숨쉬는 생태 하천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청계천 발굴 현장(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를 위해 청계천에 대한 발굴조사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실시되었다.

2003년 시굴조사 때에는 모전교毛廛橋(모전은 각종 과일을 파는 조선시대 가게) 주변에서 호안석축護岸石築(강이나 바다의 기슭이나 둑 따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돌을 쌓는 일)이 확인되고 수표교水標橋 터와 하랑교河浪 터, 효경교孝經橋 터, 오간수문五間水門(5칸의 수문) 터의 기초석이 확인됨에 따라 확인된 유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2004년까지 실시되었다.

 

먼저, 조사를 통해 확인된 다리 유구는 광통교廣通橋와 수표교 터, 하랑교 터, 효경교 터 등이다.

이들 유구는 광통교의 조사결과와 사진자료 등을 통해 볼 때, 1760년 영조의 청계천 준천濬川(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서 쳐냄) 이후에 증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계천 오간수문 터 노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5년 새샘이 촬영한 사적 제461호 청계천 오간수문

 

오간수문은 한양도성을 축조할 때 도성 내 물길을 고려하교 축조되었으며, 당시 토목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아랫부분의 말목지정(地釘: 바닥을 단단히 하려고 박는 통나무 말뚝)과 잡석다짐, 그리고 그 위에 홍예虹霓(무지개 모양 구조물) 기초부의 배치와 수문 부분의 처리 등은 기술사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호안에서 확인된 석축은 영조 때 정비된 개천(청계천)의 너비를 의미하며, 도성 내 주민의 삶을 향상시킨 역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발굴단은 보았다.

즉 석축은 상류에서부터 기초석을 낮추어 완만한 경사로 축조하였고, 석축 뒤쪽에서 개천으로 유입되는 물길을 고려하여 입수구를 곳곳에 설치하여 천변川邊(냇물의 주변)이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발굴단은 보고서 끝 부분에서 지금 실시되고 있는 청계천 복원이 개천 변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선조들의 삶의 역사와 함께 복원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이번 유적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 복원되는 청계천에 분명히 살아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복원된 지금의 청계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런 발굴 결과를 토대로 청계천은 2005년 10월 1일에 복원되었고, 지금은 많은 시민들이 찾는 도심 속의 휴식처가 되었다.

과연 청계천은 발굴단의 바람대로 유적의 가치와 역사성이 살아있는 개천이 되었을까?

그러나 발굴이 끝난 지 1년여 만에 복원사업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은 발굴조사가 '사업을 위한 발굴' '복원을 위한 발굴'의 성격이 상당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8. 3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