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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3: 마케도니아의 흥기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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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3: 마케도니아의 흥기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새샘 2022. 8. 24. 15:45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은 동쪽으로 인더스강까지 뻗은 페르시아 제국의 광대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확산시켰다(사진 출처-출처자료 1)

 

서기전 4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리스는 극도의 정치적·사회경제적 혼란에 빠진 나머지, 그리스 북쪽 변경지역에서 마케도니아 왕국 Macedonian(Macedon) Empire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초기에는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사실 그리스인은 그럴 이유도 없었다.

서기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마케도니아는 허약한 왕국으로서, 왕실은 귀족을 장악할 힘도 없었고 내부적으로는 계략과 살해 음모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전 360년까지만 해도 마케도니아는 주변 야만인들에게 포위된 채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몇몇 왕들이 그리스 문화를 궁정에 도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리스인은 마케도니아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서기전 5세기 말의 한 왕은 에우리피데스 Euripides와 소포클레스 Sophocles를 마케도니아에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Socrates는 최대를 받고도 거절했다.)

그러므로 젊고 정력적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 Philippos II(영어 Philip II)가 발칸 Balkan 남부지역을 통합했을 때, 많은 그리스 애국자들은 이 사태를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 Persia 야만인의 접근과 다를 바 없는 하찮은 일로 여겼다.

 

 

<마케도니아의 왕국의 성장 과정>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 서기전 356년
아테네의 패배와 코린토스 동맹 결성 서기전 338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군 격퇴 서기전 331년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서기전 323년

 

 

○필리포스 2세의 치세(서기전 359~336)

 

필리포스 2세 흉상(사진 출처-Wikipedia)

 

필리포스 2세 Philippos II(서기전 382~336)는 그의 형이 야만인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전사한 뒤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필리포스 2세는 처음에는 소년의 섭정이었지만 곧 가식을 접고 왕위를 찬탈했다.

서기전 356년에 이르러 그는 분명 자신을 왕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같은 해 그는 아들을 낳았다.

필리포스 2세는 아들의 이름을 알렉산드로스라고 짓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필리포스 2세가 당면한 첫 번째 문제는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전쟁과 외교 수완을 결합시켜 그는 발칸 남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마케도니아에 합병했다.

필리포스 2세의 성공은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마케도니아 군대 개편에 힘입은 바 컸다.

소년 시절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 Thebes의 에파미논다스 Epaminondas 궁정에 볼모로 가 있었다.

관찰력이 예민한 이 청년은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를 관찰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느슨한 농민군에서 고도로 훈련되고 무장이 잘된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필리포스 2세는 치세 초기에 획득한 광물자원 덕분에 전문적인 직업 군대를 운용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부를 손에 넣었다.

그가 소유한 금광 한 곳에서 생산하는 금이 델로스 동맹 Delian League이 매년 거두는 공물의 최대치에 해당할 정도였다.

필리포스 2세는 정예 기병대—컴패니언 Companions—를 조직했는데, 그들은 왕의 곁에 붙어서 왕과 함께 싸웠다.

필리포스 2세는 그들에게 일치단결과 왕실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필리포스 2세는 전도유명한 귀족계급의 자녀들을 수도인 펠라 Pella로 불러들여 컴패니언의 신병으로 충원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왕자인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

일련의 왕실 혼인을 통해 필리포스 2세는 많은 인접 왕국과 친선을 도모하고 동맹을 맺었다.

 

마케도니아의 성장은 그리스 세계 일각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테네 Athinai(영어 Athens)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였다.

같은 그리스인이면서도 이소크라테스 Isocrates같은 사람은 필리포스 2세를 그리스의 우환에 대한 잠재적 해결방안으로 간주한 데 반해, 데모스테네스 등은 필리포스 2세가 믿을 수 없는 야만인이며 그의 궁극 목표는 폴리스들의 독립을 끝장내고 그리스를 그의 지배권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를 비롯한 아테네인은 그의 진정한 목적을 오해하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가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아테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국경의 안전을 확립하고 페르시아 침공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기전 348년부터 그는 그리스의 주요 폴리스들, 특히 아테네와의 화해를 열망했다.

한때 그는 아테네에 동맹 체결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페르시아 제국 침공 작전에 아테네가 전투 함대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대가로 그리스에 대한 아테네의 헤게모니 Hegemonie(우두머리의 자리에서 전체를 이끌거나 주동할 수 있는 권력)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의 조언에 따라 필리포스 2세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이 잘못된 계산은 아테네의 파멸로 귀착되었다.

 

간절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자 마케도니아는 아테네, 테베 및 수많은 군소 폴리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스파르타는 초연한 입장이었다).

서기전 338년의 카이로네아 전투 Battle of Chaeronea에서 마케도니아는 아테네와 그 동맹국들에게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본토의 대표들을 코린토스 Korinthos(영어 Corinth)로 소집해 그곳에서 새로운 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주요 그리스 폴리스들의 독립성을 대체로 유지시켰다.

코린토스 동맹 Corinthian League의 주요 목적은 필리포스 2세를 군사령관으로 선출하고 페르시아 침공에 필요한 병력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이 코린토스 동맹은 서로 싸움을 일삼던 그리스의 폴리스들 사이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영토 침공이라는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서기전 336년에 열린 한 축제에서 원한을 품은 젊은 귀족이 경기장으로 뛰어들어 그를 암살했다.

왕권은 이제 스무 살 청년에게 돌아갔다.

그는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부왕의 기병대를 지휘한 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ros III다.

그리스인에게 그는 알렉산드로스 폴리오르케테스 Alexandros Poliorcetes—도시 약탈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정복자에게서 그리스인보다 한층 강렬한 인상을 받은 로마인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과 그의 치세(재위: 서기전 336~323)

 

애마 뷰세팔루스 Bucephalus를 타고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사진 출처-Wikipedia)

 

알렉산드로스 대왕(서기전 356~323)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생전에 이미 그의 인물과 업적에 관한 낭만적 전설이 형성되었던 것도 다양한 평가가 나오게 된 요인이었다.

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서 몽상가, 천재, 학살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세계를 변화시켰고 고립된 소규모 문화에 머물던 본토의 그리스 문화를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이르기까지 멀리 확산시켜 세계적 문화로 탈바꿈시켰다.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승리는 잘 알려져 있다.

부왕인 필리포스 2세의 사망 직후 그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서기전 334년 그는 다리우스 3세 Darius III가 지배하는 페르시아를 침공할 준비를 마쳤다.

당시 페르시아는 10여 년에 걸쳐 내정 면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젊은 귀족이었던 자신을 왕좌에 앉혀 꼭두각시처럼 다루려 했던 한 교활한 대신의 힘으로 왕이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꼭두각시 다리우스는 자신만의 복안을 갖고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대신을 죽인 뒤 찾아온 몇 년간의 평화기—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에 등장할 때까지—에 페르시아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3세는 소아시아 서북 지역에 원정을 시작해 잇달아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한때 다리우스 3세는 서쪽 영토를 알렉산드로스에게 제공하는 대가로 그의 가족(알렉산드로스가 전투에서 포로로 잡았다)을 돌려받고 평화조약을 맺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야전사령관 파르메니오 Parmenio는 충고했다.

"제가 알렉산드로스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계속)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파르메니오라면 나 또한 그랬겠지."

침공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알렉산드로스는 아나톨리아 Anatolia(현 터키 반도)와 시리아 Syria-팔레스타인 Palestine 해안을 정복했고, 이집트 Egypt를 페르시아 제국에서 떼어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이룬 업적을 돌아보면서 스스로의 초인적 자질을 확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 알렉산드로스는 올림포스 산정에서 시시한 싸움이나 일삼는 신들보다 한층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 비쳐졌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알렉산드로스와 휘하 유능한 장군들의 업적에 견주어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서기전 331년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마케도니아 군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오늘날의 이라크 북부지역에 제국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가우가멜라 전투 Battle of Gaugamela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괴멸시켰다.

다리우스 3세는 구릉지도 도주했다가 알렉산드로스의 환심을 사고 싶어 했던 지방 총독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선왕을 살해한 죄를 물어 그 총독을 처형했다.

이듬해 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를 파괴해 더 이상 페르시아인의 저항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Bactria(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산악지대에서 군사 원정을 했는데, 이것은 원정 기간에 치렀던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마침내 그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곳에 대한 장악력은 미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인 Bactrian 중에서 록사네 Roxane를 왕비로 취했다.

그는 그 곳에서 인더스강 Indus River 계곡으로 이동했다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인더스강 하구에서 그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공격을 거부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이끌고 바빌론 Babylon으로 향했고 서기전 324년 말에야 그곳에 도착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새로운 제국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약탈자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호메로스 Homeros(영어 Homer)의 영웅들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호메로스 저서 ≪일리아드 Iliad≫에 나오는 아킬레우스 Achilleus(영어 Achilles)의 후손으로 태양의 아들인 살아있는 신이라고 주장했다—을 방불케 하는 영광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면서 정복과 약탈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원정로를 따라 그리스적인 도시들을 체계적으로 건설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런 견해에 반박한다.

이 새로운 도시들은 지방 주민을 통치하기 위한 주둔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장교들에게 강요한 기상천외한 집단 결혼도 주목된다.

그는 장교들에게 아내를 제쳐놓고 페르시아 귀족 여성을 신부로 맞이하도록 강요했다.

제국 내의 인종차별을 철폐하고자 했던 알렉산드로스의 몽상적 야망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마케도니아나 페르시아가 아닌 그와 그의 후계자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귀족계급을 만들어내려던 시도로 여겨진다.

알렉산드로스는 임무를 재배정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수많은 장교와 퇴역 병사들을 새 영토에 이주시켰지만, 그곳에 행정조직을 창출해내려는 실질적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현존 사료에 따르면 아라비아 Arabia 또는 이탈리아 Italy·시칠리아 Sicily 방면에 대한 추가 정복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그가 기왕에 성취한 정복만으로 만족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앞으로도 확실한 사실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서기전 323년 5월 말 알렉산드로스는 말라리아 증세로 쓰러졌다.

그는 의사 조언을 무시한 채 호메로스 서사시의 왕 노릇을 계속했고 과음과 과로에 빠졌다.

알렉산드로스는 평생 수많은 전투을 치르면서 빈번히 부상을 입었고 당연히 그의 몸은 만신창이 상태였다.

몸 상태는 급속히 나빠졌고 급기야 아직 33세가 채 되기 전인 서기전 323년 6월 10일 사망했다.

동료와 신하들은 그의 임종 침상을 둘러싸고 제국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지를 물었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무의식상태에 빠진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감돌면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가장 강한 자에게."

이 말은 지위와 무용에서 오직 알렉산드로스에게만 뒤질 뿐이라고 믿었던 수많은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장군들의 귀에 자못 의미심장하게 들렸을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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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8. 2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