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4: 헬레니즘 왕국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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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4: 헬레니즘 왕국들

새샘 2022. 9. 2. 14:56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세계: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계승한 세 왕국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안티고노스 왕조였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서기전 356~323)이 죽은 뒤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제국의 영역을 고스란히 유지하기 원하는 자들이 있었고, 자신의 왕국에 경계선을 긋기 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후자 중에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몫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위대한 정복자가 죽은 뒤 2세대에 걸쳐 일어난 전쟁과 음모는 너무나 복잡다단해서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서기전 275년에 이르러 군사적·정치적 권력의 축이 세 개 등장했다.
이 셋은 공통의 배경을 가졌고 다 같이 그리스-마케도니아 Greece-Macedonia 지배계급의 통치를 받고 있었지만 제각기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이 시기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고대의 정치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특히 근동과 이집트가 심했는데, 그곳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들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도시들이 뻗어나갔으며 신격화된 군주 개념이 부활했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 Babylon에서 사망한 뒤 측근들은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회합을 가졌다.
우선 당장 제국은 통합을 유지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ios(영어 Ptolemy)(서기전 367~283)는 이집트 총독 자리를 요구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장군들은 찌는 듯한 더운 날씨의 이집트 땅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기꺼이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가 갖고 있는 엄청난 잠재력, 그리고 이집트가 사실상 외부 공격으로부터 난공불락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가자마자 그곳을 자신이 지배하는 독립 왕국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가 수립한 왕조는 앞으로 300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가문의 남자 후계자들이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취했기 때문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Ptolemaic dynasty of Egypt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거대한 해안 도시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에서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번창하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 앞에서는 마케도니아 왕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바깥에서는 이집트 파라오 Pharaoh의 전통인 각종 장식물과 상징물로 에워싸인 채 파라오 행세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결코 정치적 실패작이 아니었다.
특히 서기전 3세기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번영과 국내 평화의 시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까마득한 고대일지라도 사람들은 마케도니아 왕실과 그들이 지배한 고대의 땅 사이의 간극을 잘 알고 있었다.
지리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집트 '옆의' 알렉산드리아로 표현했다.
과거의 이집트 지배자들을 모방하려 애쓰긴 했지만, 마케도니아인 지배계급은 대체로 이집트 신민臣民 people(군주국에서 관원과 백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경멸했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인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흔히 말하는 클레오파트라 Cleopatra)(서기전 69~30, 재위 서기전 51~30)에 이르기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어떤 지배자도 이집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고대의 파라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도 이집트의 모든 영토는 근본적으로 왕실의 이익을 위해 착취당하는 왕토였다.
이집트의 이런 전통을 뒷받침해준 것은, 정복된 땅—창으로 빼앗은 땅—은 약탈물이며 개인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활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간주한 마케도니아의 이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모든 지방에서 최대한 부를 쥐어짜내려 했다.
이렇게 획득한 부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에 쌓였다.
왕실은 이집트 농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절망적인 가난이야말로 가난한 신민을 사근사근하고 충성스럽게 유지시켜준다고 하는 관념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그 결과 서기전 3세기 말부터는 토착 농민들이 정례적으로 위협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헬레니즘 왕국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왕조는 국가의 부를 과학 및 예술의 후원에 사용했다.
왕조 초기 알렉산드리아에는 박물관과 도서관이 설치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지식인들을 끌어모으는 학문 중심지가 되었고, 심지어 아테네를 대신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당시의 아테네는 오늘날의 대학도시와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천문학, 응용과학, 물리학 분야에서 획기적 발전이 있었다.
의학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세에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 본토의 각종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이집트 거주 그리스인 의학자들은 죽은 범죄자의 시신에 대한 부검을 허락받았고, 이로써 해부학이 독립적이 과학 분과로 성립될 수 있었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기심 없는 후원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후원한 연구 활동으로 얻어질 실질적인 이득보다는, 후원을 통해 얻게 될 영광과 위신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하지만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은 지중해 세계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 셀레우코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광대한 아시아 영토는 서기전 281년 결국 마케도니아인 Macedonian 셀레우코스 1세 Seleucus I(서기전 358~281, 재위 서기전 305~281)에 떨어졌다.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생전에는 고급 장교 축에 들지 못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걸출한 후계자들 사이에 조성된 두려움과 의심을 교묘히 이용해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성공적으로 헤쳐나갔다.

그토록 광대한 영역을 통치한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셀레우코스가 창시한 페르시아 왕조인 셀레우코스 왕조 Seleucid dynasty 전 역사 시기를 통해 왕위 계승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동부 지역에 대한 왕조의 장악력이 각별히 취약하다는 것—알렉산드로스 생전에도 사정은 마찬자기였다—을 셀레우코스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더스강 Indus River 계곡의 상당 부분을 인도 India의 위대한 전사왕戰士王 Warrior King 찬드라굽타 Chandragupta(서기전 350~295)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평화와 전투 코끼리 부대를 얻었다.
서기전 3세기 중반에 이르러 셀레우코스 왕조는 박트리아 Bactria에 대한 지배권도 잃었다.
박트리아에서는 바야흐로 인도-그리스 국가들 Indo-Greek(또는 Graeco-Indian) countries (그리스 문화를 수용한 비非그리스 국가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문하와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박트라아의 그리스 왕인 메난드로스 Menandros는 불교 전승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그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260년대에는 소아시아 서부에 대한 지배권도 잃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는 이제 시리아-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서부가 되었다.
여전히 부강한 왕국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남겨준 부강함에는 훨씬 못 미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랬듯이 셀레우코스 왕조 또한 신민에게 두 가지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 하나는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신민을 위해 고대 근동의 전통에 뿌리를 두었고, 다른 하나는 헬레니즘 Hellenism에 크게 경도傾倒(온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거나 열중하는) 해안지역 주민을 위해 그리스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세 Antíochos I(서기전 324?~261, 재위 서기전 281~261)는 사르곤 Sargon이나 함무라미 Hammurabi를 연상케 하는 선언을 했다.
"나는 안티오코스, 위대한 왕, 정당한 왕·······바빌론의 왕, 만국의 왕이니라."
셀레우코스 왕조는 제국 전역의 신민이 왕조의 신적 지위와 신적 영광을 인지하도록 장려했다.
아시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도시에는 살아 있는 지배자를 숭배하기 위한 성소와 사원이 설립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지배자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국 전역에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들은 이 도시들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그리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도시들은 안티오크 Antioch(바빌론에 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두 번째 수도)처럼 번화한 상공업 도시로 발전했다.
이 새로운 도시들은 상당수의 유능한 전문가와 상인을 동쪽으로 끌어들여 상공업을 촉진했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그들에게 다양한 세금·관세·부과금을 부과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관료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료제보다 조직화가 덜 되긴 했지만, 인구가 무려 3천만 명이나 되는 이 제국에서는 대강대강 세금을 거둬들여도 상당한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페르시아인이 그랬듯이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수입을 자본 개선에 재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거대한 국고에 부를 저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확보한 현금을 활용해 정부를 원활하게 작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이 잇달아 벌어진 서기전 3세기 내내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안티오코스 3세 Antíochos III(서기전 241?~187, 재위 서기전 222~187)는 로마와의 전쟁에 패배한 후,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신전과 사유재산을 수탈해야만 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안티고노스 왕조


신흥 왕국들은 알렉산드로스 정복을 통해 거대한 부를 쌓아올렸지만, 마케도니아 Macedonia 본국은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 본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때부터 안티고노스 Antigonos 장군이 왕위에 올라 안티고노스 2세 Antigonos II (서기전 320~239, 재위 서기전 276~239)가 되면서 지배권을 수립한 서기전 276년까지는 내정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마케도니아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에게해 Aegean Sea 무역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그리스 본토에 대한 종주권을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더욱이 마케도니아인은 여전히 계승 국가들의 최정예 군대에 선발될 수 있었고,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 Antigonid dynasty of Macedonia의 왕들은 헬레니즘 세계의 군주들이 간절히 원하던 권력, 즉 한때 필리포스 2세 Philippos II와 알렉산드로스가 다스렸던 영토의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스토아 철학 stoicism(앞으로 나올 헬레니즘 문화에서 설명)의 영향을 받았기에 왕권을 고귀한 노역, 즉 향유하기보다는 견뎌내야만 하는 직분으로 간주했다.
이런 성향에다 국내 재원의 빈약함까지 겹쳐서 그는 셀레우코스 및 프톨레마이오스와의 패권 경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정책은 이들 두 세력이 서로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마케도니아 세력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안티고노스와 그 후계자들은 알렉산드로스보다는 필리포스 2세와 유사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들은 북부 변경 지역을 확고히 하고 강력한 상비군을 유지했으며 다루기 힘든 그리스인을 남쪽에 얌전히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는 그리스인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두 신흥 세력—아이톨리아 동맹 Aetolian League과 아카이아 동맹 Achaean League—이 자유의 갈망과 야만인에 대한 투쟁의 거점 역할을 했다.
두 동맹은 그리스 정치조직에서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고전기의 방어적 성격의 동맹들과는 달리 이 두 동맹은 진정한 정치 통합을 구현했으며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정부 기능를 갖추고 있었다.
두 동맹에 속한 폴리스 polis의 시민은 국가평의회—외교정책과 군사문제, 반역 재판, 동맹의 총사령관(동시에 최고행정관) 및 부사령관에 대한 매년 선출 등을 담당—에 참여했다.
새로운 회원국은 기존 회원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가입했고 동맹 폴리스의 모든 시민은 동맹 전역에서 공동시민권을 가졌다.
또한 이 연방체제의 전역에서는 동일한 법률, 도량형, 화폐, 사법절차 등이 적용되었다.
협력과 통합의 수준이 상당해서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존 제이 John Jay,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 등은 아카이아 동맹을 미국 연방주의를 옹호하는 모델 중 하나로 채택할 정도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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