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1: 아차산 일대 보루들 본문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아차산 일대 보루들>
아차산峨嵯山 일대 보루들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7년부터 아차산 제4보루 조사를 시작으로 2000년 이후에도 이 일대 보루들에 대해 지속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차산 제4보루와 시루봉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 이후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다.
2004년 '아차산 일대 보루군 峨嵯山 一帶 堡壘群' 16개소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2004년 홍련봉紅蓮峰 제1보루에 대한 발굴조사를 두 차례 걸쳐 실시하였다.
홍련봉 제1·2보루는 아차산 능선 가장 남쪽의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고 있어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 지역이, 북쪽으로는 중랑천변 일대가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도로가 가로질러 있어 아차산과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는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홍련봉 1보루는 기존에 조사된 아차산 제4보루나 시루봉 보루와 비슷한 구조로서 외곽에 성벽을 쌓고 내부에는 건물 등을 갖춘 군사시설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는 성벽 안쪽에서 목책木柵(울짱: 나무 울타리) 시설이 새롭게 확인되었고, 기와지붕의 반지하식 기단 건물도 확인되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양의 고구려 기와와 함께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연꽃무늬가 새겨진 기와의 마구리)이 출토된 것은 가장 큰 성과로 발굴단은 보았다.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발굴단은 홍련봉 제1보루는 6세기 초에 축조되어 551년경까지 존속한 고구려 보루로서, 1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연화문와당과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보루가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중심역할을 했으며, 병참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련봉 제2보루와 함께 연결되어 운영되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어서 홍련봉 제2보루도 2005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홍련봉 제2보루는 홍련봉의 북쪽 봉우리로 제1보루와는 직선거리로 150m 가량 떨어져 있다.
제1보루와 인접한 제2보루는 구조적 차이뿐만 아니라 규모도 커서 서로 다른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 보루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홍련봉 제2보루 또한 외곽에 석축 성벽을 쌓고 내부에 건물 등을 갖춘 군사시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관옹官瓮'(관공서에서 만든 항아리)이 새겨진 토기 조각과 단조鍛造 용구用具(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필요한 형체로 만드는 데 사용되는 도구)인 철제 집게를 비롯하여 다른 보루에서는 확인되어 않은 집수정集水井(물을 모아 하류로 보내는 큰 우물)과 토기 가마로 추정되는 소성燒成 유구遺構(벽돌 따위를 구워 만드는 가마 시설로 판단하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확인되었다.
또한 유적의 연대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경자庚子'가 새겨진 토기 조각이 출토된 것은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이다.
발굴단은 이번 조사를 통해 홍련봉 제2보루도 제1보루처럼 6세기 초에 축조되어 551년까지 존속한 고구려 보루이며, 1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했다.
또한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1보루와 인접하고 있어 이 두 개의 보루가 함께 연계되어 운용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홍련동 제1·2보루는 2012년과 2013년에 2차에 걸쳐 다시 발굴이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1·2보루의 성벽 구간과 2보루의 함몰지에 대하여, 2차 조사는 2005년 조사된 제2보루의 평탄지에 대한 추가조사와 1, 2보루 사이 시굴 구간에 대한 조사였다.
이는 복원·정비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1차 조사에서 1보루에서는 성벽의 축조 방법이나 규모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주동柱棟(기둥과 들보), 치, 외황外隍(물이 없는 해자) 같은 시설 등이, 그리고 2보루 안에서는 건물 터, 계단시설, 저수시설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1보루와 2보루 사이 시굴조사 구간의 일부 트렌치 trench(바닥을 파서 만든 도랑 모양의 구조물)에서는 석렬石列(엇비슷한 간격으로 길게 줄지어 늘어선 돌의 무리) 유구가 확인되었다.
2차 조사에서는 2005년 실시했던 북쪽 평탄지에 대한 전면 제토除土(흙을 깎아내림)를 실시하여 당시 미진했던 조사를 보완했고, 시굴조사 구간에서 확인된 석렬 유구를 확장하여 조사한 결과 1, 2보루 사이를 잇는 추정 도로시설을 확인하였다.
특히 홍련봉 2보루에서는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새로운 구조인 성벽 외항이 확인되었고, 2005년 조사에서 철제 집게 등 여러 단야鍛冶(금속을 불에 달구어 벼림) 도구가 출토되었던 보루 상단에서 공방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보루 안에서 저장시설이, 보루 안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다양한 배수실도 확인하였다.
발굴단은 이번 조사를 통해 홍련봉 제1보루는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 중 가장 위계가 높으며, 제2보루는 무기와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하던 시설로 추정하였다.
또한 1·2보루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단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홍련봉 보루에 이어 아차산 제3보루와 용마산 제2보루에 대한 발굴도 2005년 실시되었다.
아차산 제3보루는 구리시 아천동에 있어 아차산 제4보루와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은 아니지만 아차산 일대 보루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 발굴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차산 제3보루는 아차산 남쪽 능선의 작은 봉우리에 있으며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긴 타원형이다.
북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아차산 제4보루가, 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아차산 제1보루가 있다.
보루의 전체 둘레가 약 420m, 내부 면적이 약 4,200m²로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발굴 당시 보루의 훼손이 심하여 조속한 조사와 보존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발굴 결과, 아차산 제3보루는 다른 아차산 일대 보루들과 마찬가지로 6세기 전후에 축조되어 551년경까지 존속한 고구려 보루로, 폐기 이후 전면적 재사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단은 조사 지역에서 방앗간을 비롯하여 단야 시설,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는 등 군사 숙소로서의 기능보다는 군수 물자의 보관 및 수리, 군량 처리 등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측했다.
이번 조사는 보루의 남쪽 지역에 대한 발굴만 이루어졌다.
이에 2006년 아차산 제3보루에 대한 2차 조사를 실시하려 했지만 보존대책의 미비를 이유를 문화재청에서 허가하지 않아 더 이상의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용마산龍馬山 제2보루는 제3보루가 있는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해발 230m 지점의 작은 봉우리에 있다.
발굴 당시 민묘民墓(왕실의 능묘를 제외한 사대부와 평민 묘) 및 산불감시초소, 체육시설과 벤치 등으로 훼손이 이미 심각하여 성벽의 윤곽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른 보루들과 마찬가지로 석축 성벽을 쌓은 다음 내부에 건물 등의 시설물을 축조했으며, 성벽 둘레는 보축된 성벽을 포함하여 약 110m 정도로 추정했다.
발굴 결과 저수시설 1기, 최소 4기 이상의 건물, 그리고 간이 대장간 시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땅 구덩이(수혈竪穴: 땅 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북동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출입시설 내지는 치雉[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 성벽을 앞이나 옆에서 보호하는 구조물로서, 그 위에 성가퀴(치성雉城, 여장女牆)를 쌓았다]만 확인되었을 뿐이다.
발굴단은 용마산 제2보루는 약 500년 전후에 축조되어 551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한강을 경계로 중랑천변의 평지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미 발굴이 이루어진 아차산 제4보루는 2007년에 다시 한 번 발굴이 실시된다.
1997~1998년 조사 때에 보루 내부를 조사하여 건물 터를 비롯한 여러 유구를 확인하고 흙으로 메워 보존하였다.
그러나 토사 유실 등으로 유적 훼손이 급격히 진행되자 종합적 복원·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됨으로써 성벽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기존에 2개로 추정되었던 치성雉城(성城가퀴, 여장: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이 총 5개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이중구조 치의 존재 및 성벽과 치성의 축조방법 등 새로운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보루의 축조 연대는 다른 보루처럼 6세기 전·중반으로 추정했으며, 한 번에 계획되어 단기간에 축조되었다가보다는 용마산 보루처럼 3~4단계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1999년과 2000년에 아차산 시루봉(봉우리가 시루처럼 넓어서 붙은 이름)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는 실시되었지만 10년이 지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다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는 시루봉 보루에 대한 문화재 보수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으로 성벽 전체에 대한 조사에 중점을 두었다.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기존 조사에서는 성벽 길이를 205m로 추정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전체 성벽 둘레가 260m 이상 되는 것으로 발굴단은 추측했다.
또한 기존 조사에서 확인된 1개의 치는 이번 조사에서 3개소의 치가 추가 확인되었으며, 북서쪽 성벽 바깥쪽 트렌치에서 2중 성벽이 추가로 확인됨에 따라 치와 같은 방어시설 1개소가 더 추가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북동쪽 성벽 안쪽에서 방어용 건물 터를 비롯한 건물 터 3기가 추가로 파악되었으며, 석축 성벽 안쪽에 열을 이루고 있는 구덩이 약 40여 개는 울짱(목책, 나무 울타리)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로 판 것으로 발굴단은 판단했다.
출토 유물은 대부분 6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유물인 토기와 철기 종류로 확인됨으로써 기존 조사에서 확인된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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