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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9: 3세기 서로마의 쇠망, 5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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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9: 3세기 서로마의 쇠망, 5장 결론

새샘 2023. 2. 24. 21:03

271년 분할된 로마 제국(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risis_of_the_Third_Century)

 

로마 제국 Roman Empire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망한 것도 아니다.

다음 장에서도 살펴보겠지만 284년 로마는 다시 강력한 지배권을 회복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 Western Roman Empire에서 약 200년 동안, 그리고 동로마 제국 Eastern Roman Empire에서 1,000년을 더 존속했다.

그러나 재건된 로마는 종래 로마와는 판이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단 로마 문명의 특징에 관한 설명을 중단하고, 로마가 현저히 다른 사회로 변질된 이유를 다루어보자.

 

 

○서로마의 쇠망에 대한 설명

 

로마의 쇠망 원인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문명의 멸망에 대한 연구 이상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쇠퇴의 원인에 대한 이론은 지극히 다양했다.

최근에 등장한 가장 기괴한 설명은 아마도 로마가 주방 조리기구를 통해 섭취한 납의 영향으로 멸망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로마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한다.

도덕론자들은 유베날리스 Iuvenalis, 페트로니우스 Petronius 등의 저술에서 나타난 음란과 폭식에 관한 묘사에서 로마 쇠퇴의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이들 증거 대부분이 명백히 과장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증거들이 대부분 원수정 시대 초기에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제국이 명백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원수정 元帥政 시대 Principatus(로마 제정 초기 Early Roman Empire) 후기에 로마의 도덕성은 금욕적 종교의 영향으로 오히려 한층 더 엄격해져 있었다.

가장 단순한 해석 중 하나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게르만족 Germanic의 격렬한 공격에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로마 역사의 전 시기를 통해 항상 로마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르만족의 공격은 로마가 이미 내부적으로 취약해 있을 때만 성공했다.

실제로 4세기 이후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를 파괴하는 것보다 로마의 일부가 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을 유린한 게르만 부족들의 상당수는 사실상 로마의 동맹자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편협, 실정, 권력남용에 자극받아 제국을 침입했던 것이다.

 

 

○정치적 실패

 

그러므로 로마의 가장 심각한 내부 문제가 무었이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내부 문제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원수정 시대 로마 정체의 가장 뚜렷한 결함은 명확한 제위 계승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지배자가 갑자기 사망했을 경우 그 뒤를 누가 이을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현대 미국에서 대통령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안겨주겠지만 국민은 적어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서는 누구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고, 대개의 경우 내전으로 번지기 마련이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Augustus는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제위 계승 문제는 그가 구축한 체계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사실상의 독재 지배이면서도 형식상 공화정을 표방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황제일지라도 황제—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위의 질서 있는 계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공화정 로마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는 한 권력 이양은 얼마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235년에서 284년까지 전쟁과 불안정은 상승효과를 일으키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내전이 촉발된 또 다른 원인은 개혁을 위한 헌정 수단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80년 이후에 전개된 사태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체제가 민심의 지지를 잃을 경우 체제 변화의 유일한 수단은 체제 전복 이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군인 집단이 황제 체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면서 폭력에의 의존은 더 큰 폭력을 초래할 뿐이었다.

 

 

○경제 위기

 

로마 제국은 경제적인 문제도 안고 있었다(비록 여기서 이끌어낼 역사적 교훈은 명확하지 않지만 말이다).

로마의 가장 심각한 경제 문제는 노예제 및 노동력 부족에 기인한 것이었다.
로마 문명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로마의 도시들은 대체로 노예가 생산하는 잉여농산물로 살아갔다.

노예는 지나치게 혹사되었던 까닭에 노예 인구의 현상 유지가 불가능했다.

트라야누스 Traianus 시대에 이르기까지 로마는 영토 정복으로 충원된 노예 인력으로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후 로마 경제는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지주는 더 이상 사람 목숨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고, 병영 노예제는 종식되었으며, 도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농촌의 잉여농산물도 줄어들었다.

불황 타개를 위한 기술 향상이 등한시된 것도 노예제 때문이었다.

후대의 서양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잉여농산물은 기술혁명의 결과였다.

그러나 로마의 지주들은 기술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간주해 이에 무관심했다.

일할 수 있는 노예 노동력이 존재하는 한 노동력 절감에 무관심했고 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는 것을 천박함의 표시로 여겼다.

지주들은 '고상한 일'에 관심을 쏟음으로써 자신의 고귀함을 입증하려 했지만 고매한 명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들의 잉여농산물은 사라지고 있었다.

 

노동력 부족은 로마의 경제 문제를 크게 악화시켰다.

대외 정복이 끝나고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농경지에 머물 인구가 많이 필요해졌다.

그러나 야만인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군복무에 필요한 인력 또한 계속 필요했다.

이렇듯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2세기와 3세기의 전염병 창궐은 인구를 격감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치세로부터 284년 강력한 지배권이 재등장하기까지 질병, 전쟁, 출생률 감소로 로마 인구는 약 3분의 1 가량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농업노동력도 충분치 못했고 외적과 싸울 병력도 부족해졌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로마가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재화는 여전히 동쪽에서 로마 사회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특히 서반부 속주들에서 극소수 가문에 부가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 가문은 대단히 광범위한 특권을 확보했지만 그들이 로마 국가의 재정에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도시를 유지하는 부담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지방 엘리트들이 떠안게 되었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아예 도시에서 도망치면서 고전기 로마 문명의 도시 기반 및 그에 수반된 시민적 이상이 훼손되었다.

지역적 차이 또한 점차 두드러졌고, 그 결과 서반부 속주들 사이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시민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로마는 멸망을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궁극적으로 로마의 쇠퇴는 시민들이 로마를 지키는 일에 관심이 결여된 결과였다.

그러므로 로마 세계는 일격에 무너졌다기보다는 흐느낌 속에서 종말을 맞이했던 셈이다.

 

 

○로마의 업적

 

서로마의 쇠퇴에 주목한다고 해서 로마 사회가 이룩한 놀라운 성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구상의 어떤 국가도 그토록 큰 영토를 포괄하지 못했고, 세계 인구의 그토록 많은 부분을 그토록 오랜 기간 지배한 국가도 없었다.

로마의 지배권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서반부에서 활력을 유지했다.

동반부에서 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살아남았다.

이런 성공은 통신, 교역, 여행 체계 등을 창안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로마 정부의 능력 때문이었다.

로마 이전의 어떤 국가도 그런 능력을 갖지 못했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국가도 또다시 그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성공은 로마 경제의 기초 체력이 버텨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 경제가 상당 부분 몰락하고 천정부지의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렸지만, 로마인은 그 시점까지 400년 동안—근대적인 시장경제 구조와 안전장치 없이— 비교적 안정된 통화와 번창한 국제 교역을 유지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로마 제국의 생존은 정치적 업적의 산물이었다.

로마의 정치 체계는 근대의 어떤 제국도 필적할 수 없으리만큼 포용적이었다.

로마는 비非로마인에게 시민권을 확대하고 속주민에게 원로원 의원직은 물론 궁극적으로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도록 기꺼이 허용함으로써 권력의 일부를 제국 구성원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근동이나 그리스의 어떤 제국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페르시아인은 외래 종교 관습에 관용적이었고 아테네인 Athenian은 시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관대하게 허용했지만,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국외자에게 확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기 이탈리아의 라틴권 Latino에서부터 카라칼라 치세 Caracalla reign의 제국 주민 전원에 대한 시민권 허용에 이르기까지, 참정권의 확대는 로마인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다.

한 탁월한 로마사가가 언급했듯이, 만일 영 제국이 로마인처럼 기꺼이 참정권을 확대했었더라면 미국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5장 결론

우리는 현대인과 로마인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고 믿기 쉽다.

이런 믿음의 근거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로마가 다른 어떤 고대 문명보다 시간적으로 우리와 가깝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는 현대인과 비슷한 기질을 닮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로마 역사가 19~20세기의 영국 및 미국 역사와 닮았다는 점이 종종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경제는 단순한 농업사회에서 복잡한 도시 체계로 발전하면서 실업, 심각한 소득 불균형, 재정 위기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로마 제국은 영국처럼 정복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영국 및 미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은 로마의 정복을 통해 세계가 누리게 된 —또는 누리게 되었다고 주장한—  평화를 찬양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비교는 피상적인 것이다.

로마는 근대 사회가 아닌 고대 사회였으며, 근대 서양의 어떤 사회와도 현저하게 다른 사회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마인은 산업 활동을 경멸했다.

또한 그들은 근대 국민국가의 개념도 갖지 않았다.

그들의 제국은 통합된 영토를 지닌 국가라기보다 도시들의 집합체에 가까웠다.

로마인은 대의 정부를 발전시키지도 않았으며 제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

로마인의 사회적 관계 역시 오늘날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 경제는 근대의 어떤 사회와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노예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기술은 원시적이었고 사회적 계급 격차는 극단적이었으며, 양성 관계도 지극히 불평등했다.

로마의 종교는 종교 관행과 정치생활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고 로마 황제는 (특히 동반부에서) 살아 있는 신처럼 숭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문명은 후대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건축 양식은 오늘날 미국 정부의 많은 건물의 디자인에서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로마의 복식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교 성직자의 의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6세기 황제 유스티아누스 Iustinianus의 법전(다음에 나올 6장 참조)을 통해 로마법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미국의 판사들은 지금도 가이우스 Gaius, 울피아누스 Ulpianus 등이 만든 법률 금언을 인용하고 있으며, 3세기의 법적 선례는 대부분의 유럽 대륙 국가 및 미국 루이지애나  State of Louisiana 법체계에서 여전히 타당하다.

로마의 조각은 사실상 모든 현대 조각의 근간이 되었으며, 로마 작가들의 글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산문 작문의 표준이었다.

심지어 가톨릭교회의 조직도 로마 국가의 구조를 적용한 것이다.

오늘날 교황은 대제사장 pontifex maximus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황제가 로마 국교의 수장으로서 지녔던 호칭이기도 하다.

 

로마가 후세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그리스 문명을 제국 전역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일 것이다.

마침내 통일된 로마 제국이 붕괴되었을 때 3개의 상이한 후계 서양 문명—비잔티움 Byzantium, 이슬람 Islam, 서유럽 Western Europe—이 등장해 로마가 점유했던 영역을 차지했다.

이들 문명은 제각기 독자적인 종교 전통을 지니고 있었고, 그들이 받은 로마 유산의 상이한 국면을 각기 채택·적용했다.

그러나 이들 3개의 서양 문명은 모두 로마를 경유해 그리스로부터 이어받은 문화적 유산—도시생활, 세계주의, 학문 등—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문화 유산들은 서양을 인류 역사의 독특한 실험장으로 영구히 자리매김했다.

 

이 문화 유산은 로마의 묘비명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3세기 중반에는 이 묘비명이 로마 제국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 데 필요한 유일한 물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붕괴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그 후로도 몇 백 년 동안 생명을 이어갔다.

로마는 3세기, 4세기, 아니 5세기에도 멸망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변형되었고, 이 변형된 국가에서 로마의 유산은 중세의 서양 문명으로 흘러들어갔다.

우리는 이제 이런 변화에 대해 알아보게 될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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