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1: 서론, 로마 제국의 재편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1: 서론, 로마 제국의 재편
새샘 2023. 3. 7. 10:34
로마 제국은 180년 이후 쇠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284년 용맹스러운 군인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재위 284~305)는 제국을 재정비해 로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4세기의 전 기간을 통해 로마 제국은 계속 지중해를 장악했다.
5세기에 이르러 제국의 서부가 게르만어 사용 침입자의 정치적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로마의 제도는 이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에서도 계속 작동했다.
6세기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재위 527~565) 황제가 서부 지중해 해안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재정복했다.
7세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로마 제국의 동반부와 서반부의 분열이 영속적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후 두 지역이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런 전환과 더불어 고전 고대 세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로마의 제도가 오랜 기간 존속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고 중세사의 출발점을 3세기, 4세기 또는 5세기로 잡곤 한다.
물론 역사학에서의 시대구분이란 언제나 개략적이며, 역사학자들이 역사 발전의 어떤 국면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이런 접근방식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분명 고대 세계로부터 중세 세계로의 여행은 점진적이었고 많은 '중세적' 요소가 서유럽에서 이미 3세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대사가 284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사는 로마 제국이 7세기에 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84~610년의 기간은 비록 전환기이기는 하지만(물론 모든 시대가 전환기이다) 그 나름의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로마 시대는 중세도 아닌 고대 말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세 가지의 중요한 문화적 경향이 고대 말기를 특징지었다.
첫째로 로마 세계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확산되고 승리를 거두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제정 말기(전제정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던 다양한 내세 종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4세기에 접어들어 그리스도교는 로마 국교로 채택되었고, 그 후 서양문명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도시에서 도시로, 그 다음에는 도시에서 시골로 전파된 그리스도교의 점진적 확산은 고대 말기 세계의 전반적 특징인 거대한 문화적 동화 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새로운 문화 발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로마 문화가 한층 획일화되고 널리 확산되면서 그것은 투박해지고 평범해졌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이 고전기 고급문화의 하향 평준화였다.
우리는 그것을 통속화라고 부른다.
지중해 세계 외부에서 온 문화적 영향력은 특히 로마 제국 서반부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로마인은 이 과정을 야만화 barbarization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이방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바르바로스 barbaros에서 유래했다.
야만인 문화는 반드시 미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비도시적이고 비그리스적이었다.
지중해 세계 엘리트의 눈에는 이 사실만으로도 오명을 덮어씌우고 낙인찍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만인의 영향력은 처음에는 군대에서 다음에는 전 사회에 걸쳐 꾸준히 증대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 그 어느 것도 파국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6세기 말 그리스도교화, 통속화, 야만화의 세 가지 요인이 한데 결합해 고대 지중해 세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4세기 로마 황제들의 재위 기간 | |
디오클레티아누스 | 284~305년 |
갈레리우스 | 305~311년 |
콘스탄티누스 | 312~337년 |
배교자 율리아누스 | 360~363년 |
테오도시우스 대제 | 379~395년 |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3세기 중반의 혼돈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이 이 시기에 파멸을 모면한 것은 284~305년에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244~311)라는 걸출한 군인 황제의 노력 덕분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정치·경제에 근본적 개혁을 단행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권위와 위신을 회복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후대의 로마·비잔티움 황제 모두들 위한 권력 기반을 닦았다.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황제 직분이 존엄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 상징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실체를 공화정의 외양 속에 감추려 했던 아우구스투스와는 달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민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고 전제군주로 자처했다.
그가 취한 칭호는 프린켑스 princeps(첫 번째 시민이란 뜻의 원수元帥)가 아니라 도미누스 dominus(군주 또는 주인)였다.
그는 왕관을 쓰고 금으로 수놓은 자색 비단 가운을 걸쳤으며, 궁정에 페르시앗힉 배례 의식을 도입했다.'
관료는 계급을 나타내는 정교한 직함을 가졌다.
탄원자는 자신을 만나도 좋다고 허락받은 관료의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출입구·방·커튼 등으로 겹겹이 싸인 미로 뒤에 모습을 감춘 채 궁정의 일상 업무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를 알현하는 행운을 얻은 사람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고, 특전을 받은 극소수 사람에게는 그의 옷자락에 입을 맞추는 것이 허용되었다.
3세기 초 군인 황제들은 병사 및 신하들과 너무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경멸을 샀다.
그 자신 군인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고 한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전통과의 단절을 위한 또 하나의 시도로서 제위 계승의 공식 원칙을 제정했다.
제국이 너무 커져서 한 사람의 막강한 지배자가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반으로 나눈 다음 서반부를 자신이 신임한 후배인 막시미아누스 Maximianus(재위 286~305)에게 맡기고 더 부유한 동반부를 자신이 맡았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자신들을 이렇게 불렀다—는 각기 '카이사르 Caesar'라는 이름의 부제副帝(황제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군주)를 한 명씩 선정해 영토를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이 제도—사분 통치 tetraarchy로 알려져 있다—는 분권화를 통해 제국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목적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정치체계의 치명적 약점으로 드러난 그리고 3세기 제국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던 제위 계승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정력적인 행정 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군대에 대한 긴밀한 사적 통제권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군대를 민간 지휘계통에서 분리시키고자 했다.
3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로마 군대가 황제를 옹립하거나 폐위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제국의 경제를 잠식했던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화를 안정시켰으며, (그다지 성공적이기지 못했지만) 법적 강제력으로 물가와 임금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는 과세액을 조정하고 새로운 (그리고 지극히 인기 없는) 소규모 징세기구를 설치하는 등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그는 제국의 행정수도를 이탈리아에서 오늘날 터키에 있는 니코메디아 Nicomedia로 옮겼다.
로마는 제국의 정신적·상징적 수도로 남았다.
원로원이 그곳에서 계속해서 회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의 조언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고, 동반부와 서반부 간의 경제 격차로 인해 수도로서는 니코메디아가 로마보다 한층 적합했다.
제국은 이제 관료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치세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 Split(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에 궁전을 짓고 제위에서 물러나 양배추를 재배했다.
동시에 그는 동료 막시미아누스에게도 은퇴를 종용했다.
그 결과 두 명의 부제가 평화롭게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계승자들 사이에서 곧 내란이 일어났고, 이 내란은 최초의 부제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재위 312~337)가 승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324년 아우구스투스로서 서로마에서 통치했고, 또 한 명의 아우구스투스는 동로마를 지배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권력 공유를 중단했고, 죽던 해인 337년까지 재통합된 로마 제국 전부를 단독으로 지배했다.
그리스도교를 선호했다는 사실(다음 절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실로 획기적인 결정이었다)을 제외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모든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노선을 따라 통치했다.
두 사람 모두 칙령에 따라 그리고 광범한 첩보·정보 네트워크에 의존해 제국을 통치했다.
적절한 수의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습 군복무를 선포한 바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 정책을 확대해 농민과 기술공이 부친의 직업을 세습하도록 했다.
이런 규제 조치는 광범하게 시행될 수 없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에 시행하려 했던 사회적·정치적 통제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예술과 건축 역시 이러한 새로운 획일주의를 반영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스플리트에 건축한 궁전은 마치 군인의 병영처럼 설계되었다.
그가 로마에 건축한 목욕장은 면적이 약 30에이커(약 12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지만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4세기 황제들의 모습을 조각한 흉상은 모두 무표정하고 무감각적인 닮은꼴이어서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이것은 3세기의 자연주의적이고 개성적인 흉상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4세기의 흉상은 점점 과장되고 선동적인 모습을 취했다.
로마의 포룸(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 근처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은 앉아 있는 황제의 모습을 실물의 7배 크기로 만들었는데, 커다란 눈은 황제의 정신적 통찰력을 강조하고 있다(위 흉상 사진 참조).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숭고함을 기리고자 324년부터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콘스탄티노폴리스 Constantinopolis)이라고 지었다.
고대 도시 비잔티움 Byzantium에 건설된 이 새로운 수도는 로마 문명의 무게 중심이 게속 동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흑해 입구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통신·무역·방어의 요충지로서 커다란 이점을 갖고 있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육지 쪽은 성벽으로 보호된 이 도시는 1435년 오스만 튀르크 Ottoman Turks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부분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수립한 선례를 포기했다.
제위를 자기 가족 내부에서 승계시킴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800년 전에 팽개쳤던 왕정을 로마에 다시 들여온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콘스탄티누스는 사후에 제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해서 나누어주었다.
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 싸움은 세 아들이 지지했던 그리스도교 유형의 차이 때문에 더욱 격렬해졌다.
콘스탄티누스의 후손 사이에서 벌어진 투쟁은 4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이어졌다.
이 다툼은 제위를 노린 찬탈자들의 도전으로 인해 간헐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충돌은 3세기의 내전처럼 심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수시로 유능한 지배자가 등장해 제국을 재통합할 수 있었다.
제국을 통합시킨 마지막 인물은 테오도시우스 1세 Theodosius I(재위 379~395)였다.
그는 자신의 휘하 관리 한 명을 죽였다는 이유로 몇 천 명의 무고한 테살로니키 Thessaloniki(아테네 다음으로 큰 그리스 제2의 도시) 시민을 보복 학살한 잔인한 인물이었으나, 외적의 침입을 막아냄으로써 제국을 지키려 애썼기 때문에 '대제大帝 the Great'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도 죽기 전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곧이어 다루게 되겠지만,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4세기에 제위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제국 동반부와 서반부의 분열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반부는 인구가 늘어나고 번영을 누리면서 제국 정책의 중심으로 떠오른 반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반부는 가난해졌고 제국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서반부의 많은 도시들은 이제 동반부에서 넘어오는 자금으로 지탱했다.
이런 자금이 고갈되거나 군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도시는 쇠퇴했다.
심지어 로마 시마저도 제국 내에서 변두리가 되고 말았다.
황제들이 서반부에 머물 경우에도 밀라노 Milano나 라벤나 Ravenna 또는 라인 Rhine 변경의 트리어 Trier를 더 편리하게 여겼다.
4세기 초 이후 로마에 거주한 황제는 한 명도 없었고, 황제가 로마 시를 방문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동반부와 서반부의 분열만이 제국의 유일한 위기는 아니었다.
분리주의 운동이 브리튼 Britain, 갈리아 Gallia, 에스파냐 Spain, 독일 Germany 등지에서 반복해서 나타났는데, 그 지역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별개의 독립적인 갈리아 제국 시민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인 Egyptians은 농토에 매겨진 고율의 세금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고, 북아프리카인 North Africans들은 황제들—그들은 일차적으로 페르시아인 Persian, 고트족 Goths, 훈족 Huns에 맞서 동부 전선을 방어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황제의 전제적 지배라는 겉모습 뒤에서 4세기의 로마 제국은 다양한 이질적 부분들로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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