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동주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결론 본문
그림의 역사인 회화사繪畵史란 기본적으로 작품을 그 대상으로 한다.
개개의 작품을 빼놓고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개개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은 작가한테서 나오는 것이므로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세상일은 참 묘하다.
그러면 작가 마음대로 그림이 그려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화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잘 그리려고 하면 잘 안 그려지고, 어떡하다가 그리면 잘 그려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창작의 신비라고들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 마음대로 안 되면서 작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창작물밖에 될 수 없는 그런 점이 문제가 된다.
더군다나 작품 가운데는 그 기술, 기량을 견주는 그런 그림을 반대하는 문인화같은 화풍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만 좋다면 좋은 작품인가'라고 했을 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동양화에서는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복잡하다.
그리고 또 작가는 어느 시대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어느 사회, 어느 시대의 풍조와 흐름에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위대한 작가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 살면서 그 시대의 풍을 따르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넘는 면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걸작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걸작은 많지 않다.
마치 겸재의 그림이 참으로 많지만 겸재의 걸작은 많지 않듯이, 추사의 글씨는 참 많이 돌아다니지만 걸작은 많지 않다.
따라서 소품小品(규모가 작은 예술 작품)이거나, 큰 작품이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런데 그림을 즐기고 그림의 아름다움을 논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걸작을, 좋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전통적 그림은 중국문화권의 중심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물론 크게 말해서 조선왕조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중국 그림의 풍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고, 조청전쟁(병자호란) 이후에는 우리나라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색이 많이 발휘되는 그런 그림이 발달했고, 또 추사 시대에 와서는 중국 문인화 풍조를 받아서 이를 나타내려고 하는 등 어떤 면에서든지 문화권 전체의 중심과 아주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서양화가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그려지면서 동시에 국제적인 문화권의 중심에 있는 서양화의 유행이나 유파의 흐름에 아주 민감한 것과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옛 그림의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우리나라 시대의 흐름, 작가의 환경과 동시에 문화권의 흐름이라고 하는 몇 가지를 겸해서 알지 않으면 감상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2. 8. 1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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