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악마의 자손'이라 불리던 훈족 본문
서양사에는 중세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란 용어가 있다.
이는 4~6세기에 강력한 기마문화를 가진 훈족族 Huns이 유럽을 침략하면서 연쇄적으로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 민족 Germanic peoples의 활동에서 유래했다.
유라시아 Eurasia(유럽Europe과 아시아 Asia를 하나의 대륙으로 보는 이름) 고고학에서는 이 시기를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부른다.
게르만족 Germanic이 아니라 유라시아 동쪽 흉노匈奴 Huns에서 시작한, 유라시아 전체를 뒤흔든 변혁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한반도의 동남쪽 신라에서는 북방계의 화려한 황금과 고분이 등장했으며,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는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다양한 나라가 생겨났다.
최근 고고학과 유전자 분석으로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는 800여년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이들은 발달한 철제 무기와 기마술로 동쪽으로는 만주, 서쪽으로는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역사를 바꾸었다.
세계사의 진정한 주역이었던 그들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훈족은 흉노의 후예일까
"우리 부랴트 Buryat(또는 Buryaad) 몽고인은 흉노에서 기원했소이다. 흉노와 훈족이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동유럽과도 관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2014년 7월 러시아 부랴트자치공화국의 부랴트 집성촌이자 유명 휴양지인 툰카 Tunka에서 열린 '문화의 나무(트리 오브 컬쳐 Tree of Cultures)'라는 학회에서 나이가 지긋한 부랴트 어르신의 질문이다.
바이칼 Baikal 지역의 토착 몽골인인 부랴트인들에게 자신들의 친척(?)이 동유럽에 분포하며 유럽의 한 지파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마치 한국 사람이 고구려인의 후손이 태국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무척 흥미로웠을 것이다.,
4세기 유럽을 뒤흔든 공포의 대마왕 아틸라 Attila와 훈족은 과연 유라시아에서 건너온 흉노의 일파일까?
흉노와 훈족의 관계는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수수께끼다.
흉노와 훈족은 비단 몽골,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저 멀리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등 유라시아 전역에서 다들 관심이 많다.
이런 지대한 관심에도 이 문제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원인은 과거 동서 문명의 교류사를 현대인의 편견으로 해석하려는 데 있다.
중국 한漢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이웃인 흉노의 수세에 일방적으로 밀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해마다 엄청난 양의 조공품과 포로를 바쳐야 했다.
이후 중국은 태세를 전환하여 흉노를 압박했고, 흉노는 멸망의 기로에 섰다.
마지막까지 중국에 귀의하기를 거부한 질지선우郅支單于의 북흉노는 서기 98년에 알타이 산맥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중앙아시아로 도망쳤다.
이후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근처에서 번성하던 실크로드 국가 강거국康居國(또는 강국康國)을 차지해서 잠시 거주했지만, 그 소문을 듣고 추격하던 중국 세력에 쫓겨 다시 머나먼 서쪽으로 도망갔다.
그렇게 흉노는 158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후 200년이 지난 350년 무렵 동유럽에 몽골 계통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훈족이 등장했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거주지 동쪽 도나우강 Danube River에 살고 있던 알란족 Alan을 침략했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훈족의 강력한 화살과 날렵한 기마부대에 대항할 유럽 나라는 없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눌려 훈족을 '악마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하느님이 저주를 내리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453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탈리아 베니스 Venice를 정벌하던 중에 급사하면서 그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지만, 대신 훈족의 날랜 기마술과 강력한 무기에 자극을 받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로마를 압도하는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결국 서양의 고대 세계를 종언시킨 큰 사건인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것이다.
아틸라가 이끌던 '훈'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흉노다.
비록 흉노제국은 멸망했지만 그들이 이끌던 군사와 무기는 세계 최강이었기에 유라시아의 각국은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래서 훈이라는 이름이 역사 곳곳에 등장한다.
실크로드를 대표하며 발해와 신라를 넘나들었던 소그드국 Sogd(또는 Sogdiana)은 스스로를 '훈의 나라'(중국의 기록에는 온나사溫那沙라고 되어 있다)라고 칭했으며, 심지어 유럽 계통의 에프탈 Ephtalite(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스스로를 '백인 흉노 White Huns'라고 불렀다.
그러니 아틸라의 훈족이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유라시아 문화교류의 아이콘
실제로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들은 유럽에서 한반도까지 널리 퍼져 있었으나 사실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다.
당시 유목민들은 우리가 생각하듯 혈연 중심의 집단이 아니다.
토지를 기반으로 성립했던 농경사회와 달리 유목민들은 유목이 가능한 초원지대를 찾아서 이동했기 때문에 다양한 집단이 섞여 있었고,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계약사회였다.
흉노와 훈족이 발흥했던 800여년 동안 몇 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유목문화가 주도했다.
훈족이 유럽 사회를 뒤흔든 것은 그들의 피부색 때문이 아니라 흉노에서 시작되어 발달한 유목사회 시스템과 철제 무기라는 신기술 때문이었다.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들은 공통적으로 화려한 보석을 박아 넣은 황금과 강력한 마구, 철제 무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동서 교류의 흔적은 화려한 황금 유물로 남았다.
신라의 황금보검이나 누금세공 같은 이국적인 황금 제작 기술은 동유럽, 나아가 서유럽까지 널리 퍼졌다.
이들 유물은 섞어놓으면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흉노와 훈족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유라시아 문화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이 정복한 초원 지역은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났고, 그 일파인 아틸라의 서진西進을 따라 낙후했던 유럽에 새로운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흉노와 훈족의 관계를 같은 민족인가 아닌가로만 판단하려는 이유는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잠재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몽골인=악마'라는 도식으로 황화론黃禍論(청일전쟁 말기인 1895년 무렵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장한 황색 인종 억압론. 황색 인종의 융성은 유럽의 백인 문명에 위협이 될 것이므로 유럽 열강들이 단결하여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만들어 서양인들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최근까지 아틸라에게 악마 이미지를 덧씌웠다.
소설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바그너 Richard Wagner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북유럽의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 Das Nibelungenlied>에도 아틸라는 '에첼 Etzel'이란 이름의 악인으로 등장한다.
또한 <스타워즈 Star Wars>의 다스 베이더 Darth Vader가 나오기 전인 1970년대까지 아틸라는 대중매체에서 폭군 또는 독재자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아틸라에 청나라 이후의 중국 이미지가 덧대어진다.
시기별로 바뀌는 아틸라 그림을 보아도 처음에는 서양 사람으로 묘사되던 아틸라가 나중에는 중국인으로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이후 서양이 강조하던 '황화론'이라는 동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아틸라에 투영된 것이다.
한편 소련의 경우 '훈족=흉노'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적극 활용했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련은 흉노와 훈족의 활동무대였던 유라시아 초원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통합했다.
이에 대한 역사적 합리화를 위해 1930년대에 소련 연구자 콘스탄틴 이노스트란체프 Konstantin Inostrantsev가 '훈족=흉노'라는 설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등장한 소련을 과거 거대했던 흉노와 훈족의 세력에 대입한 셈이다.
당시 소련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각 나라들이 사회주의권으로 재편되던 시점이었다.
유라시아 동서를 관통한 '훈족=흉노' 이야기는 이러한 사회주의권의 등장과 잘 부합하는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였을 것이다.
○유럽의 동양인
훈족이 몽골인 계통이란 생각은 아틸라를 직접 만났던 로마 교황청의 사신이자 역사가 프리스쿠스 Priscus의 기록에 근거한다.
그는 아틸라가 무척 왜소한 체격을 지닌 전형적인 몽골인의 모습이었다고 썼다.
당시 유목사회에는 다양한 집단이 섞여 있었으니 훈족 안에도 중국 북방에서 살던 몽골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틸라 한 명에 대한 기록만으로 훈족 전체를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당시 인골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뿐이다.
아직 훈족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아틸라가 죽고 100년 뒤에 다시 동양에서 이주해온 아바르족 Avar에 관한 연구가 힌트를 준다.
아바르족은 5세기에 몽골을 중심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을 이루어 고구려와 연합했던 국가인 유연柔然의 일파다.
유연은 돌궐突厥(튀르크 Türk)에 쫓겨 서쪽으로 갔고, 등자鐙子(말을 탈 때 디디는 안장에 달린 발걸이)와 같은 고구려의 무기와 마구를 서양에 전파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바르족은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에 정착해 빠르게 서양인에 동화했다.
동아시아에 관심이 없었던 서양 학자들은 동쪽과의 관련성에 냉소적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시베리아 Siberia 알타이 Altai 일대에서 고구려인, 선비족과 유사한 마구를 사용하던 유목민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들이 아바르족의 기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막연하기만 했던 아바르족의 기원은 2020년 1월 ≪사이언티픽 리포트 Scientific Reports≫에 발표된 헝가리 학자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로 실마리가 잡혔다.
헝가리 과학자들은 아바르족이 카르파티아 분지 Carpathian Basin(오늘날의 헝가리 일대)에 정착한 후 약 100년 뒤인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나온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국 북서부 및 신장 지역, 러시아 알타이 일대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가장 비슷했다.
이는 고고학자들이 유물로 분석한 결과와 일치한다.
이때는 아바르족이 유럽에 완전히 정착한 지 한참이 지난 후였기 때문에 아바르족 문화에서 동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유전자가 나온 이유는 유목민들의 특성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각 유목국가는 그들이 지나간 지역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뒤엉킨 용광로와 같은 유목사회에서도 소수의 최상위 계급은 철저한 부계사회를 지향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아마 훈족도 비슷했을 것이다.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전체 유목민의 구성은 현지인들로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가장 첨단의 군사와 문화를 선도하던 선우單于(훈족이 자신들의 군주나 추장을 높여 이르던 이름)와 그들을 보좌하던 세력은 부계를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앞으로 DNA 분석이 되어야 최종 결론이 나오겠지만, 이런 상황은 대표적인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미국에 비유해 이해할 수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도 여전히 미국 사회의 최상층부는 소위 와스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불리는 슈퍼 엘리트 super elite인 앵글로색슨 계통이 차지하고 있다.
다양한 집단들이 유라시아 전역을 휩쓸던 흉노와 훈족에게도 상층부는 일정한 유전자 특징을 가진 하플로 그룹 Haplogroup[공통 선조를 공유하는 유사한 하플로타입 Haplotype(하플로이드 haploid 즉 홑배수체와 제노타입 genotype 즉 유전자형의 합성어로서 한 부모에게서 함께 유전되는 유전자형)의 집단]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양 속의 동양인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소련의 일부였던 칼미크족 Kalmyk이다.
몽골제국 시기에 볼가강 Volga River유역에 토르구트족 Torgut과 칼미크족이 정착했다.
1755년 청나라는 신장 지역의 중가르 칸국 Dzungar Khanate을 멸망시키고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지만 때마침 유행한 천연두 때문에 인구가 급감했다.
같은 시기 토르구트족은 볼가강의 초원으로 밀고 들어오는 러시아와 독일 때문에 점차 터전을 잃고 있었다.
1771년 1월, 다가오는 주변 국가들의 압박을 타개하고자 토르구트족의 족장 우바시 칸 Ubashi Khan은 죽음의 대장정을 결정한다.
우바시 칸은 17만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몇 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 살던 호전적인 사람들의 습격을 받았고, 기근에 병까지 겹쳤다.
10만여 명이 중간에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그해 8월 천신만고 끝에 일리 강 Ili River유역에 도착했다.
토르구트족의 극적인 이야기는 팽창주의로 나아가는 중국으로서는 자신들의 모습을 설명하기 좋은 소재였다.
'살기 좋은' 유럽을 뿌리치고 중국(엄밀히 말하면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 그것도 독립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는 신장으로 왔다.
역시나 이 이야기는 2008년 <동귀영웅전東歸英雄傳>이란 드라마로 제작되어 CCTV에서 방영했고 큰 인기를 얻었다.
서양에 남아 있던 몽골인들이 중국의 품에 안긴다는 내용이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편 볼가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서 살았던 칼미크족은 유럽에 남았다.
그들이 정착한 지역은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해 살기가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칼미크족은 여전히 칼미크자치공화국에 살고 있으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가 주요 종교인 공화국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데서도 알 수 있듯 최근 다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유럽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의외로 그 역사가 꽤 깊다.
현대의 관념이 투영된 '훈족=흉노' 설과 동양을 악으로 규정하는 황화론은 지금도 동양에 대한 편견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잠잠하던 서양 우월주의는 최근 동아시아의 발흥과 유럽의 경기침체, 그로 인한 포퓰리즘에 기반을 둔 극우 세력으로 부활하고 있다.
때마침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동양에 대한 해묵은 편견과 차별이 다시 심화되고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들이 나온다.
지금은 인종 간의 갈등을 촉발하기보다 서로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버리고 공존을 모색해야 할 때다.
우리에게 동양에 대한 편견을 빚어낸 흉노와 훈족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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