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1: 서론과 중세의 농업혁명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1: 서론과 중세의 농업혁명
새샘 2023. 8. 9. 22:178장 서론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서유럽 Western Europe, 비잔티움 Byzantium, 이슬람 Isalm 세계의 세력균형은 엄청나게 변했다.
1000년 무렵의 유럽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바이킹 Vikings, 마자르족 Magyars(또는 헝가리인 Hungarians), 무슬림 Muslims에게 군사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서유럽의 도시들은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 어떤 서유럽 도시도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계의 고대 지중해 도시들과 규몾나 세련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서유럽은 면직물, 비단, 향신료, 금을 여전히 비잔티움과 이슬람 상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문학과 학문에서의 불균형은 더욱 컸다.
유럽인은 비잔티움과 이슬람이 고전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풍부한 문화적·지적 유산의 일부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시칠리아 Sicilia, 베네치아 Venezia, 에스파냐 España(무슬림 장악 지역) 이외의 서유럽인은 아랍어도 그리스어도 할 줄 몰랐다.
심지어 1,000년 이상 서유럽의 학문 언어였던 라틴어마저 점점 외국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알프레드 대왕 Alfred the Great(재위: 871~899)은 잉글랜드 England 그리스도교회의 예배를 제대로 인도할 만한 라틴어 실력을 갖춘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1세기 뒤 잉글랜드와 독일의 라틴어 수준은 다소 향상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사정이 더 안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1300년 무렵 유럽은 그리스·로마의 뒤를 이은 세 후계 문명 가운데서 군사적·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헝가리 Hungary, 폴란드 Poland,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 보헤미아 Bohemia는 이제 온전히 가톨릭 유럽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정복과 개종 사업을 병행하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는 동쪽으로 프로이센 Preussen(영어 Prussia), 리투아니아 Lithuania, 리보니아 Livonia,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를 향해 힘차게 경계를 확장시켰다.
그들은 무슬림 에스파냐와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을 정복했다.
그들은 또한 중동 Middle East에 라틴 왕국 Latin Kingdom을 수립했고 수도를 예루살렘 Jerusalem에 두었다(하지만 1300년에 다시 잃었다).
유럽 해군은 지중해 Mediterranean Sea를 제패하고 흑해 Black Sea와 카스피 해 Caspian Sea에 전지기지를 확보했으며, 그 덕분에 유럽 상인은 동방의 사치품을 서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원거리 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유럽 선교사와 상인은 이 교역로를 따라 중앙아시아 Central Asia로 거슬러 올라가 몽골 Mongolia 및 중국 China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 상인들은 서쪽으로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을 통과해 해상 교역로를 열었고 급기야 지중해와 북대서양 North Atlantic 세계를 연결했다.
유럽의 교역 팽창—지역 상업과 원거리무역 모두 팽창했다—은 도시화를 가져왔다.
1300년에 이르러 유럽에는 인구 5만~10만의 도시가 10여 개, 그보다 작은 규모의 도시가 수백 개 있었다.
도시의 성장은 전반적인 인구 증가를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유럽 인구는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약 3배 늘어났다.
그러나 경제는 더욱 빨리 성장해서, 1인당 부가 늘어났고 생활수준이 올라갔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소득이 모든 인구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지는 않았다.
정부는 더욱 강력해지고 사회계층화는 심해졌다.
새로운 부 때문에 사회 엘리트 계층 사이에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농업, 상업, 건설 등에 막대한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또한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종교적·문화적·지적 발전을 촉발시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모든 부문의 성장이 영속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1300년에 이르러 서유럽의 자연자원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하면서 유럽인의 생활수준은 낮아지기 시작했다.
강력한 정부를 가진 국가들은 좀 더 안정적으로 국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신민에게 더 큰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복과 지배를 위한 대규모 군대와 군사 원정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14세기에는 기근, 전쟁,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적어도 3분의 1이 감소했고, 그 결과 중세 전성기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질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이런 후퇴에도 불구하고 중세 전성기에 서유럽이 견지한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 바탕 위에 근대 초기 유럽의 세계 제국들이 건설되었다.
중세의 농업혁명
전근대 사회의 경제가 무두 그렇듯이 중세 서유럽의 경제도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농업의 진보는 느릿느릿 이루어졌고, 그런 만큼 600년 동안에 걸쳐 일어났던 농업의 변화를 '농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7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있었던 농업 변화는 대단히 폭이 넓었고 또 그 결과가 엄청난 것이어서, 이보다 더 유명한 18세기 초의 농업혁명에 견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뜻해진 기후에 걸맞은 기술적인 혁신, 새로운 윤작 체계, 농기구·가축·방아에 대한 투자 증대는 유럽 농업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잉여농산물의 시장 출하도 늘어났고, 그것은 생산 전문화와 규모의 효율성으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서유럽은 3배나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을 것이고 중세 전성기 세계를 만들어낸 건축, 선박, 서적, 군대, 예술 등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술의 진보
중세 전성기의 농업생산성 향상을 가능케 한 기초적인 기술의 진보는 중세 초기에 이미 이루어졌다.
지중해의 천경淺耕 쟁기 scratch plow(땅을 얕게 가는 쟁기)와는 달리, 끝에 쇠로 만든 보습(농기구의 술바닥에 끼우는, 넓적한 삽 모양의 쇳조각)이 달려있고 한 쌍의 소나 말에 의해 움직이는 무거운 바퀴 쟁기 heavy-wheeled plow는 북부 유럽의 비옥하고 습한 토지를 깊숙이 갈아엎을 수 있었다.
헝겊을 덧대 어깨띠 padded collar를 비롯한 마구가 개량되면서 쟁기 끄는 소의 효율이 높아졌고, 처음으로 말이 숨 막히지 않으면서 무거운 짐을 끌 수 있었다.
소는 14세기까지 유럽에서 쟁기 끄는 가축으로 가장 널리 이용되었다.
소는 말에 비해 값이 쌌고 힘이 좋았으며 질병에 강했고 죽으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말의 경우 쇠로 만든 편자가 발달하고(900년 무렵) 직렬식 멍에 tandem harnessing가 개발되어(1050년 무렵) 말들이 앞뒤로 서서 수레를 끌 수 있게 된 후 한층 빠르고 효율적인 수레 끄는 동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12·13세기에 농산물의 시장 거래가 늘어나면서 유럽 농촌 지역에 말의 보급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 밖의 노동력 절감 장치도 중세 전성기의 농업생산성을 높였다.
무거운 바퀴 쟁기가 등장했지만, 곡물 경작 노동의 대부분은 여전히 개별 농민의 손에 들린 농기구로 행해졌다.
중세 전성기에 철이 흔해지면서 손으로 쥐는 농기구의 성능은 꾸준히 개량되었다.
끝에 쇠가 붙은 호미·갈퀴·삽은 8세기 농민이 사용했던 나무 농기구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쇠로 만든 낫의 수가 늘어나자, 특히 여성 노동에 의한 건초 모으기와 곡물 수확이 수월해졌다(여성은 농업 노동은 특히 수확기에 대단히 중요했다).
외바퀴손수레도 간단해 보이지만 중요한 기술 혁신이었다.
써레는 쟁기질을 한 다음 밭을 평평하게 고르고 파종된 씨앗을 흙과 뒤섞는 데 사용되었다.
기술은 요리법과 영양 공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쇠 냄비는 음식을 데우기보다는 삶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식품의 오염 가능성을 막아주었다.
공동 화덕은 삶을 때보다 음식의 영양소를 더 많이 보존해주었다.
방아는 식량 생산 과정의 또 다른 중대한 기술 혁신이었다.
로마인은 물방아의 존재를 알았지만, 대개 사람이나 가축의 힘으로 움직이는 연자맷돌로 곡물을 빻았다.
그너나 1050년 무렵부터 북유럽에서는 물방아의 제작이 크게 성행했고 효율성도 꾸준히 개선되었다.
프랑스의 한 지역에서는 11세기에 14개였던 물방아가 12세기에 들어 60개로 늘어났다.
프랑스의 또 다른 지역에서는 850년에서 1080년 사이에 약 40개의 물방아가 재작되었고, 1080년에서 1125년 사이에는 40개가 추가로 제작되었는가 하면, 1125년에서 1175년 사이에 다시 245개가 제작되었다.
물방아 제작의 복잡한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한 유럽인은 이제 풍력 이용에 관심을 돌렸다.
그 결과 1170년 무렵부터 물살이 빠른 하천을 갖지 못한 네델란드 등의 평원 지대에서 풍차가 급속히 늘어났다.
풍차의 본래 기능은 곡식을 빻은 일이었지만 곧 제재소의 톱 구동, 직조, 기름 짜기 등에 응용되었으며, 대장간에서 쇠를 단조하는 용도와 종이 제조를 위한 펄프를 으깨는 데 활용되었다.
풍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방아와 풍차는 18세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될 때까지 전 세게 제조업의 유일한 기계 동력원이었다.
풍차와 직렬식 멍에를 제외하면, 중세 농업혁명의 배후에 가로놓인 기술 혁신의 대부분은 이미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 시대(751~843)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혁신들은 11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유럽의 농업 생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이렇게 기술 혁신의 전파가 늦어진 원인에 대해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는데, 기후 변화가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8·9세기부터 유럽의 평균 기온은 대략 1도 내지 2도 올랐는데, 이로 인해 그린란드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남부 잉글랜드에서는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따뜻해진 기후는 토지를 건조시키고 생육기간을 늘려줌으로써 북부 유럽에서는 이롭게 작용했지만, 높아진 온도와 강우량 감소는 지중해 농업에서는 그와 똑같은 정도로 해로운 것이었다.
물리적 안전이 확보된 것도 일정 정도 역할을 했다.
바이킹, 헝가리인(마자르족), 무슬림의 공격이 줄어들었고, 좀 더 강력한 정부가 1세기 전보다 더 나은 국내 평화르 ㄹ유지해 준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경영 마인드를 지닌 농민과 영주 자신감—농업 개선에 노동력과 자금을 투입하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하는—이 커진 데 있었다.
농산물의 수요 확대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농민과 영주의 농지에 대한 투자를 자극하고 고무했다.
식량 수요가 증가한 것은 중세 전성기의 경제를 전진하도록 만든 두 가지 근본적인 경제적 요인—즉, 유럽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효율성이 높아진 상품 시장—때문이었다.
○장원제, 농노제, 농업생산성
800년에서 1050년 사이 잉글랜드, 북부 프랑스, 서부 독일 등지에서는 무거운 바퀴 쟁기 사용이 늘어난 동시에 농민의 주거 형태에도 근본적 변화가 나타났다.
중세 초기에 대부분의 자유농민은 개별 소농지에 거주하면서 독립적으로 농사를 지었고, 지주에게 관습적인 지대地代(토지 사용료)를 납부했다.
그러나 9세기부터 이들 개별 농민 보유지의 상당수가 촌락 거주 농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대규모 공동 경작지에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지대, 집세, 부과금, 벌금, 농지 등의 복합체를 장원莊園 manor(유럽의 중세기에 귀족이나 사원에 딸린 넓은 토지)이라고 부른다.
어떤 지역에서는 거주 형태 변화의 동력이 농민에게서 나왔다.
대규모 농지는 소규모 농지보다 더 효율적으로 경작될 수 있었다.
투자비용이 적게 들었고 쟁기 하나와 10여 마리의 황소만 있으면 촌락 하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모든 농민이 각자의 쟁기와 황소를 보유할 필요가 없었다.
공동 경작지는 생산성도 높아서 농민은 새로운 작물과 새로운 윤작제를 실험할 수 있었고, 공동 방목지에서는 더 많은 가축을 기를 수 있었다.
촌락에 거주하는 농민은 교구 교회, 빵공장, 대장간, 방앗간, 선술집 등을 공동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웃과 더불어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가 하면 함께 축하하고 슬퍼했다.
힘들고 고달픈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던 농민들에게 이런 것들은 무시해도 좋을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장원제가 농민엑 제공하는 이점은 많았다.
하지만 장원제 등장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또 그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것은 영주였다.
영주의 입장에서는 개별 농지에 흩어진 농민보다 촌락에 모여 사는 농민을 통제하고 이용하기가 한층 쉬웠다.
장원제에서 영주는 농민이 생산한 농작물에 대해 더 많은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장원의 공동 경작지는 대개 '좁은 띠 모양의 땅(strip, 지조地條)'으로 구분되었고, 하나 걸러마다 개별 농민에게 할당되었다.
개개의 토지 보유 농민은 영주에게 지대를 납부했지만, 그 토지에서 자신의 수익도 얻어갔다.
그러나 영주는 지대 이외에 공동 경작지 전체 면적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에 달하는 토지를 영주 직영지라고 주장하면서, 직영지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을 자기 몫으로 차지했다.
영주 직영지를 경작하기 위해 장원 영주는 수많은 자유농민을 데려다 농노農奴(영주에게 예속된 농민)로 삼았다.
농노는 유럽에 몇 백 년 전부터 있어 왔고, 장원제가 한 번도 뿌리내린 적이 없는 지역에도 있었다.
그러나 장원제의 발달이 (에스파냐, 북부 이탈리아, 남프랑스, 중부 독일 등지에서보다) 각별히 북유럽에서 농노제 serfdom의 발생 가능성을 크게 높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자유농민과는 달리 농노는 영주의 허락 없이는 토지나 영주를 떠날 수 없었다(하지만 실제로는 도시 거주를 위해 많은 농노가 허락을 받고 떠났다).
농노는 보수를 받지 않고 영주를 위해 정기적으로 노동했다.
그들은 간통을 하거나 결혼하거나 또는 사망했을 때 굴욕적인 벌금을 물었다.
그들은 영주가 주재하는 장원 법정의 재판에 예속되었다.
노예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예속적인 지위는 대대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노예와는 달리 농노의 영주에 대한 의무는 관습에 의해 정해졌고, 영주는 농노를 토지와 분리해서 매각할 수 없었다.
○새로운 윤작제
농업생산성의 관점에서 볼 때 장원제의 가장 큰 이점은 새롭고 더 효율적인 윤작제의 채택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몇 백 년의 경험을 통해 농민은 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연속해서 경작할 경우 지력이 고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에 대한 전통적 해결책은 토지를 둘로 나누어 절반의 땅에는 가을에 곡물을 심어 봄에 수확하고 나머지 절반은 휴경지로 묵혀두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지중해의 건조하고 빈약한 토양에서 중세 전 시기를 통해 가장 일반적인 경작법이었다.
그러나 북유럽의 습하고 비옥한 토양에 살던 농민은 삼포윤작제三圃輪作制 three-field ratation system가 지속 가능한 농업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삼포윤작제에서 토지의 3분의 1은 목초지를 활용하면서 묵혀두곤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 배설물이 토지를 비옥하게 해주었다.
다른 3분의 1 토지에는 겨울밀이나 호밀을 가을에 심어 이른 여름에 수확했고, 또 다른 3분의 1 토지에는 다른 작물—보통은 귀리나 보리, 때로 콩이나 자주개자리(알팔파 alfalfa), 토끼풀(클로버 clover), 살갈퀴 같은 가축사료용 작물—을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었다.
토지는 3년 주기로 순환되었다.
삼포윤작제는 해마다 경작지 면적을 50~67퍼센트 늘려주었다.
경작지의 확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콩이나 사료 작물(그것은 밀과 호밀 경작으로 인헤 땅에서 빠져나간 질소를 되돌려주었다)이 윤작제의 한 부분으로 정착하면서 밀과 호밀의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작물의 생육 계절이 둘로 나뉘면서 삼포윤작제는 자연 재해로 인한 손실에 대한 보험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었다.
삼포윤작제는 새로운 형태의 식량을 생산하기도 했다.
귀리는 사람과 말이 모두 먹을 수 있었고, 콩은 단백질을 제공함으로써 빵과 맥주—북부 및 중부 유럽 농민의 식단에서 대표적인 두 가지 식품—로부터 곡류 탄수화물만을 주로 섭취하는 식단의 문제점을 보완해주었다.
추가로 얻어지는 사료는 동물을 건강하게 하고 쟁기 끄는 가축의 효율성을 높여주었으며, 장원 경제를 다양하게 만들었고, 육류와 우유를 통해 식단에 단백질을 보태주었다.
새로운 삼포윤작제는 노동력을 연중 골고루 분산시켜주었고, 농민은 잡초 제거, 토양 산성화 방지, 공동 경작지의 시비施肥(거름주기) 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장원제의 한계와 농노제
예속적 농민이 영주 직영지에서 노동하는 중세 전성기의 고전적 장원제는 결코 유럽 농업의 대표적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장원제는 대체로 잉글랜드, 북부 프랑스, 서부 독일에 국한되었다.
게다가 12세기 말에 이르면 이들 지역에서조차 장원제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영주는 부역을 현금 지불로 전환했고, (현금 지불을 조건으로) 농노를 해방시켰으며, 영지에서 거두는 농산품보다는 현금지대에 의존에 살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농노제가 쇠퇴한 이유는 복잡한데, 그것은 유럽 모든 지역에서 농노제가 쇠토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 경제가 점차 화폐경제화됨에 따라 많은 영주는 농산품 판매에 직접 관여하는 위험을 떠안기보다는 농민에게서 현금을 받아내는 것이 더욱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 역시 위험했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13세기의 상황에서 농민에게 부과되는 지대를 인상할 수 없었던 영주들은 실질 수입이 크게 줄었고, 그 결과 많은 기사와 군소 영주들이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세 유럽에서 농업경제가 가장 상업화되어 있었던 잉글랜드와 카탈루냐 Catalunya(스페인 북동쪽 지방)에서는 농노제가 서유럽의 다른 곳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화폐경제의 발달이 훨씬 늦었던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에서도 (북부 에스파냐에서 그랬듯이) 농노제는 13세기를 거치는 동안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상업화와 농노제 쇠퇴 사이에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도 있었다.
즉, 13세기 들어 영주가 현금을 받고 농노를 해방시키면서 농노와 자유농민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조차 일부 봉건적인 의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에서는 농노제가 중세 말기에 부활해 18·19세기까지 존속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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