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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 증명하는 식인 풍습

새샘 2023. 7. 27. 17:36

우스티-타르타스 유적의 인골. 어른 뼈 위에 아이 뼈를 올려놓은 무덤으로 인골을 가공해 다시 묻은 흔적이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식인食人 cannibalism(또는 anthropophagy)이라는 것 자체가 상상조차 금기시되다보니 과연 인간의 역사에서 식인이 정말로 존재했는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이어왔다.

특히 19세기까지 제국주의 및 인종주의의 발로로 식인 풍습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의 미개한 행위로 규정지었고, 또 그것을 이유로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그들의 합리화는 '이들은 서로 잡아먹는 악한들이니 절멸시켜 마땅하다'라는 헛된 논리를 심어주는 데 일조했다.

 

20세기 중반까지 고인류가 식인을 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북경원인北京原人 Beijing Man(또는 베이징원인)이 좋은 예다.

1930년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인골의 뼈들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는데 일부 고고학자들이 이를 서로 잡아먹은 흔적이라 주장했고, 이 내용이 ≪뉴욕타임스≫(1936.11.25, 25면)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1924년에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최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ustralopithecus 인골인 일명 '타웅의 아이 Taung Child'를 발견한 레이먼드 다트 Raymond Dart 역시 '타웅의 아이'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들의 연구는 후에 다 잘못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초기 인류는 주로 동굴에서 발견되는데, 동굴 천장에서 돌이 떨어지면서 뼈가 부서진 것을 식인 흔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고인류의 식인 풍습 주장은 20세기 중반까지 백인우월주의 풍조가 널리 퍼져 있던 상황에서 나온 성급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발굴 자료의 분석 기법이 좋아지면서 식인의 구체적인 증거가 사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아마 식인 풍습은 드물긴 해도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삶과 함께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영국의 고프 Gough 동굴에서 나온 후기구석기시대 유골에서 식인 흔적이 발견되었다.

2018년 서부 시베리아 바라바 Baraba 평원의 우스티-타르타스 Ust-Tartas라는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식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 강인욱이 유학 시절 주로 발굴했던 시베리아의 대평원 지역은 너른 평지에 소택지沼澤地(늪과 연못으로 둘러싸인 습한 땅)과 숲이 많았다.

모기가 많다는 단점도 있지만 대신 민물농어 같은 물고기와 사냥감, 땔감이 풍부한 자작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어 고대부터 살기에 아주 유리했다.

그런데 당시 집 자리 근처 쓰레기 구덩이에서 여러 동물뼈, 생선뼈와 함께 불을 먹은 흔적이 뚜렷한 어른과 아이의 뼛조각이 나왔다.

발굴팀은 여러 검토 끝에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이 사람뼈들은 조각내어 불에 태워서 제사에 쓴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식인의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이 유적이 만들어지던 당시 서부 시베리아는 기후가 온화하여 식량이 넘치도록 풍부했다.

굳이 사람을 잡아먹을 이유가 없었다.

답은 무덤에 있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하나의 무덤에 여러명이 묻히기도 하는데, 인골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묻힌 경우도 허다하다.

어른의 넓적다리뼈를 마치 평상처럼 깔고 그 위에 어린아이의 인골을 올린 것도 있었다.

시베리아는 1년의 3분의 1이 추운 겨울이다.

그러니 겨울에 죽은 사람은 바로 묻지 못하고 따로 안치해두었다가 날이 풀리면 뼈만 추려서 묻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긴 겨울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그 살점을 떼어내어 제사를 지내고 불에 태워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 역사에서 보이는 식인 풍습의 대부분은 적에 대한 증오심 표출이 아니라 산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의 육신 일부를 자기에게 체화體化(물체로 변화하게 함)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중에는 식인을 하는 대표적인 종족이 있는데, 오리노코 강 Orinoco River에 사는 구이아카족이다.

이들은 가까운 가족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뼛가루를 국에 타서 친척들이 조금씩 나누어 마신다.

이를 통해서 비록 죽은 사람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영혼은 남아 있는 가족들과 영원히 함께한다고 믿었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현대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다.

흔히 유골반지라고 하여 돌아가신 분이나 반려견을 화장하고 유골가루를 반지로 만들어 손가락에 끼는 것이다.

유골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하지만 그 의미는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식인 풍습과 일맥상통한다.

 

얼마 전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2017)는 제목만 봐서는 식인을 연상시키지만 정작 내용은 췌장암에 걸린 소녀와 그녀를 사랑한 소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아픈 부위를 먹으면 낫는다는, 예전부터 전해오던 속설을 모티브로 했다.

한편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 전설이나 명검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오나라의 간장干將과 막야莫耶의 이야기처럼 인신공양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희생을 의미한다.

식인 풍습도 그런 희생의 일부로 발현되기도 했다.

중국 춘추시대 위나라의 왕인 의공懿公은 사람 대신 학을 애호하던 무능한 왕이었다.

결국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에 의해 살해되었고 의공은 온 몸이 찢겨 온전한 것이라고는 간뿐이었다.

이를 본 의공의 충신 홍연弘演은 자신의 배를 갈라 주군의 간을 넣고 자결했다.

주군을 위해 스스로 관이 되어서 제사를 잇겠다는 충성이었다.

종묘사직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고대 중국에서 가능했던 생각이다.

 

 

○제갈량의 만두

 

인신공양을 위해 제물을 매단 장면이 담긴 청동기 유물. 뎬국의 스자이산(석채산石寨山)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물론 적개심을 갖고 다른 사람을 죽여서 그들의 살점을 먹고자 하는 잔인함도 존재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만두饅頭도 식인 풍습을 암시하는 '오랑캐의 머리'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적의 머리를 베어 제사나 의식상에 올려놓는 풍습과 관련이 있는 음식이다.

흔히 만두의 기원을 중국 서남부 지역의 오랑캐를 정복했던 제갈량에서 찾는다.

제갈량의 촉군이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들에게 목을 베인 오랑캐의 영혼이 노하여 강물이 험해졌다.

그러자 제갈량이 자기들이 죽인 오랑캐 군사들을 달래기 위해 겉은 밀가루 반죽으로 싸고 속은 고기로 채운 머리 형상을 만들어 빼앗은 머리를 돌려보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참 뒤인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 지어낸 것이지만 오랑캐의 머리를 잔인하게 자르고 제사를 지내던 풍습은 실제 고고학 자료로 증명되었다.

제갈량이 활동했던 촉나라는 지금의 쓰촨(사천四川) 지역이고 그들이 토벌한 지역은 남쪽인 윈난성(운남성云南省)과 태국 북부의 산악 지역이다.

약 2000년 전 윈난성 서부 일대에는 뎬국(전국滇國)이 있었다.

뎬국 사람들은 엄청나게 호전적이어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고 다녔다.

적의 머리를 사냥하는 장면은 그들이 즐겨하던 옷 장식이나 귀중품에 새겨져 있다.

적을 죽여 매달아놓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청동기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만두라는 명칭은 전쟁이 격화되면서 생겨난 잔인한 카니발리즘 cannibalism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랑에서 대량학살로

 

다양한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서 등장하는 식인을 한마디로 단언하거나 매도할 수는 없다.

문제는 식인 풍습을 단순하게 오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데에 있다.

카니발리즘은 실제 식인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비하하며 붙여진 이름이었다.

서기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 Herodotus는 그의 책 ≪역사 Herodotus Histories Apodexis≫에서 드네프르 강 Dnieper River을 건너 열흘을 더 가면 식인종이 있으며 그 너머에는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의 끝에 사는 이방인들을 식인종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편 근대에 들어서면서 식인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되지 못한 자신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대표되기도 했다.

루쉰(노신魯迅)은 ≪광인일기≫에서 ≪자치통감≫을 읽다가 중국 역사 곳곳에 식인 풍습이 있음을 개탄하며 '인육의 잔치는 지금도 베풀어지고 있다'라고 썼다.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이기에 이 구절은 중국에서 식인이 일반적으로 유행했다고 오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루쉰은 인류학자가 아니라 사상가였기 때문에 특별히 논증을 했다기보다는 다양한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식인 기록이 그만큼 극한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매일 살인 사건 기사를 접하지만 살인을 일상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중국뿐 아니라 남미를 답사한 수많은 유럽 탐험가들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식인만을 하는 원주민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국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 Marvin Harris와 같은 극단적인 문화유물론자의 주장을 제외하면 근대 이후의 어떠한 자료를 보아도 사람 고기가 주요 식량원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근대 이후에 식인 풍습은 복수, 증오, 광기와 같은 인간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도구로, 더 나아가 다른 국가나 민족 집단을 혐오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으로, 최근까지도 일본은 중국인을 혐오하는 '제노포비아 xenophobia(이방인 혐오)'의 명분으로 식인문화를 거론했다.

 

한국에서 한동안 회자되었던 황원슝(황문웅黃文雄)이 지은 ≪중국의 식인문화≫(장진한 옮김, 교문사 1992)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지난 5000년 동안 중국인에게 식인은 보편화된 문화였다는 등 선정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일각에서는 지은이가 정식 사학자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중국계 일본인 고분유(황문웅黃文雄)로 사학자가 아니라 주로 혐중嫌中과 혐한嫌韓을 주제로 글을 쓰는 극우 작가다.

그는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은 실제로 없었다거나 한국의 문명은 일본이 모두 만들어준 것이라는 등 허무맹랑한 주장을 늘어놓았다.

극우 작가가 중국의 식인문화를 쓰는 배경은 자명하다.

결국 일본의 침략을 은폐하고 식민지배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신대륙에서는 마야 Maya의 인신공양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잔혹한 풍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것은 물론 <아포칼립토 Apocalypto>(2006)와 같은 유명한 영화롤 만들어지기도 했다.

'식인'을 검색하면 나오는 게 대부분 마야인에 대한 것일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식인종으로 폄하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서양인이 저지른 대량학살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학자들은 여러 통계에 근거해 1492년에 콜럼버스 Columbus가 신대륙에 상륙할 당시에 신대륙 전체의 인구가 약 6000만 명 정도였다고 추산한다.

이후 1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인구의 90퍼센트가 감소했고 현재는 500만 명 남짓한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10명 중 9명이 죽어버린 이 일은 구대륙에서 옮겨온 각종 전염병과 잔혹한 학살의 결과였다.

이러한 행태가 진정한 식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인 풍습은 미개함과 관련이 없다.

식민지를 만들고 대량학살을 했던 근대를 거쳐 현대사회로 오면서 더욱 잔혹하고 교묘하게 식인 풍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살을 베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베어내는 지금이 더욱 잔인한 식인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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