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2: 도시와 상업의 성장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2: 도시와 상업의 성장
새샘 2023. 8. 17. 22:39
농업혁명은 중세 전성기 상업혁명의 기반이었다.
새로운 상업 발전의 토대는 9세기와 10세기에 마련되었다.
1000년 무렵 작센 Sachsen(영어 Saxony)의 하르츠 Harz 산맥에서 캐낸 은은 잉글랜드 England, 플랑드르 Flanders, 라인란트 Rhineland 세 지역 사이의 삼각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즉, 잉글랜드의 양모 원사는 플랑드르로, 플랑드르의 모직물은 라인란트로 운반되었고, 라인란트의 상인은 그것을 멀리 이탈리아 Italia와 비잔티움 Byzantium에 내다 팔았다.
북해 North Sea 일대에서는 몇 백만 개의 은화가 유통되었고, 북해 인근에는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 라인 Rhine 강 유역 등지에서 유통되는 화폐를 교환해주는 통합 환전 체계가 발달했다.
잉글랜드 상인은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과 북부 에스파냐 España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북부의 은을 비잔티움의 비단, 이슬람 Islam의 향신료, 아프리카 Africa의 금 등과 교환했다.
스칸디나비아 상인과 전사의 활동범위는 그보다 훨씬 넓었다.
그들은 아일랜드 Ireland에 도시들을 세우고 노르망디 Normandie와 남부 이탈리아에 공국을 건설했으며, 발트 해 Baltic Sea에서 흑해 Black Sea(거기서 다시 콘스탄티노플까지)와 카스피 해 Caspian Sea(거기에서 다시 아바스 제국 Abbasid Empire까지)에 이르는 러시아 Russia 교역로를 따라 노브고로드 Novgorod와 키이우 Kiewu(키예프 Kyiv) 같은 무역 전진기지를 건설했다.
○상업
11·12세기에 북부 이탈리아의 신흥 도시들에서는 원거리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 피사 Pisa, 제노바 Genova(영어 Genoa)의 해군이 거둔 일련의 승리 덕분에 이들 도시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서유럽을 오가는 해운업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서유럽 귀족과 교회의 번영으로 동방 사치품을 위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고, 중세 전성기 유럽의 대내적 안전성이 확보된 덕분에 상인들은 종전에 비해 안정적으로 사치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
12세기에 프랑스 중부의 샹파뉴 Champagne에서는 조직화된 시장이 등장했다.
그곳에서 플랑드르 상인들은 이탈리아인에게 옷감을 팔았고, 이탈리아 상인은 무슬림 muslim 향신료와 비잔티움 비단을 플랑드르인, 프랑스인, 독일인에게 팔았다.
그러나 1300년에 이르러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대서양 항구들 사이에 직통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면서 이들 시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양모 원사를 잉글랜드에서 이탈리아로 직접 수입하는 편이 실속이 있었고, 이탈리아의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 같은 도시는 자체적으로 모직물의 생산 및 끝손질을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섬유산업이 성장하면서 플랑드르의 섬유산업이 쇠퇴했지만, 그것은 유럽이 단일 통합 경제권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징표였다.
원거리무역은 재산을 날리기 십상인 위험한 사업이었다.
해적 출몰은 흔한 일이었고 지중해는 선원들에게 위험한 바다로 악명이 높았다.
상인들은 유서 깊은 혈통을 주장할 수 없었고 노골적으로 돈벌이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토지 귀족계급의 경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밀라노 Milano와 피렌체의 시민군은 전투 현장에서도 적군의 귀족 전사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중세 전성기에 이탈리아인이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은 상인과 귀족들이 선박, 화물, 짐 싣는 동물 등에 막대한 자금을 기꺼이 투자했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이탈리아 상인은 새로운 동업 계약 형식, 새로운 회계 방식(복식 부기 포함), 새로운 신용 기법(비잔티움과 무슬림의 사례를 일부 본받았다)을 발전시켰다.
새로운 신용 제도는 서유럽 그리스도교회와 일부 충돌하기도 했다.
교회는 거의 모든 형태의 금전 대출을 고리대금으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상업경제의 연료인 자본에 대한 수요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서서히 태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13세기부터는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상인에 대해 호의적으로 언급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13세기의 교회 지도자였던 성 보나벤투라 San Bonaventura(영어 Saint Bonaventure)는, 신이 구약 시대에는 다윗 David 같은 목자에게, 신약 시대에는 베드로 Pietro(영어 Peter) 같은 어부에게 각별한 은혜를 보였지만, 당대에 이르러서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n Francesco d'Assisi(영어 Saint Francis of Assisi)(1182~1226) 같은 상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세 전성기의 상업혁명과 도시혁명의 주요 원인을 원거리 무역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일부 도시는 그런 교역에서 큰 자극을 받았고, 실제로 베네치아(1300년 인구 약 10만 명), 제노바(8만 명) 같은 주요 도시의 성장은 원거리 무역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 Paris(1300년 인구 20만 명), 피렌체(10만 명), 밀라노(8~10만 명), 런던 London(6~8만 명) 등의 대도시를 포함한 대다수 도시의 번영은 일차적으로 주변 후배지後背地의 풍요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 도시는 후배지로부터 식량, 원료, 인구를 공급받았다.
경제생활 전반의 활력이야말로 중세 전성기 도시 성장의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원거리 교역은 유럽인의 삶에 나타난 이 거대한 경제적·상업적 변화의 한 국면에 불과했다.
○도시
크건 작건 간에 도시는 도시 주변 지역과 공생 관계 속에서 존립했다.
도시는 시장과 상품을 제공하고 지방은 도시민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식이었다.
도시는 더 나은 삶을 찾는 자유농민과 도망농노의 지속적 이주를 통해 팽창했다.
일단 도시가 번창하기 시작하자 많은 도시는 특정 부문을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파리와 볼로냐 Bologna는 일류 대학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베네치아, 제노바, 쾰른 Köln(영어 Cologne), 런던 등은 원거리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밀라노, 피렌체, 헨트 Ghent(영어 Ghent), 브뤼헤 Brugge(영어 Bruges)등은 제조업을 특화했다.
가장 중요한 도시 산업은 모직물(베네치아에서는 면직물)의 생산 및 끝손질이었다.
도시 제조업은 대부분 소규모 개인 소유 작업장에서 개별 기술공이 맡았는데, 그들의 생산활동은 길드 guild로 알려진 전문가협회에 의해 규제되었다.
통상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점포를 운영하는 장인 수공업자만이 수공업자 길드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길드는 독점 유지와 경쟁 제한을 통해 대체로 부유하고 성공적인 조합원의 이익을 도모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용 조건은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만일 도제徒弟 apprentice(장인 밑에서 기술 훈련을 받고 있는 견습공)나 직인職人 journeyman(견습공의 과정을 마친 도제)—프랑스어의 journée(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하루'를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하루의 일'을 뜻한다)에서 유래한 말로, 도제 기간은 끝났지만 아직 장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가리킨다—이 장인匠人 master이 되고 싶다면 자신의 '작품 masterpiece'을 한 점 생산해 길드의 장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만일 시장이 현재 인원 이상의 장인 수공업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고 판단되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수공업자는 자신의 점포를 열 수 없었다.
일부 도시에서는 그런 지위와 자격을 갖지 못한 직인의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수공업자 길드는 가격과 임금을 규제했고, 시간 외 작업을 금했으며, 생산방법과 조합원이 사용할 재로의 품질에 관한 세부 사항을 규정했다.
길드는 또한 종교단체, 자선단체, 음주클럽 같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형편이 어려운 조합원을 보살피는가 하면 사망한 장인 수공업자의 유가족을 지원하기도 했다.
상인도 길드를 설립했는데, 일부 도시에서는 상인 길드의 세력이 막강해져 상인 길드 조합원이 된다는 것은 곧 도시 정부에 복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수공업자 길드—상인 길드보다 수는 많지만 세력은 약했다—와 마찬가지로 상인 길드는 경쟁 제한 및 획일적 가격 정책에 의해 지방 시장을 통제했다.
그들은 시민 자격 취득의 승인 여부를 통제하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길드는 배타적 조직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도임을 표방했으므로 거의 예외 없이 유대인과 무슬림에게 문호를 닫았다.
그들은 또한 일반 임금노동자, 특히 여성 임금노동자의 경제적 기회를 크게 제한했다.
여성은 길드에서 자동적으로 배제되지는 않았고 일부 수공업자 길드는 여성만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임금노동자로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주도적인 길드 문화로 인해 여성은 여성 노동 및 임금 조건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대부분의 중세 도시는 1300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절반 정도는 시골처럼 보일 것이다.
거리는 포장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주택마다 채마菜麻밭(먹을거리나 입을 거리로 심어서 가꾸는 식물을 심어 키우는 밭)이 딸려 있었으며 곳곳에 가축이 보였다.
12세기 초의 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는 파리의 거리를 말 타고 가던 중 멋대로 돌아다니는 돼지에 말의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위생 조건은 열악했고 동물과 사람 배설물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하곤 했다.
14세기에 한 런던 시민은 자기 집 오물을 여러 달 동안 이웃집 지하층으로 흘려보냈는데, 지하층이 오물로 가득 차 도로에 넘치기 시작한 뒤에야 그의 위법행위가 적발되었다.
이런 세계에서는 질병이 만연했다.
특히 최하층 도시 빈민이 거주하는 인구과밀지역이 심했다.
도시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출산율은 낮았고 유아사망률은 높았다.
대부분의 도시는 지방에서의 지속적인 인구 유입 덕분에 인구가 유지되었다.
화재는 언제나 위험 요인이었고 경제적 갈등과 가문간의 대립은 유혈 폭동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도시민은 그들의 새로운 도시와 생활방식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12세기의 도시 거주자가 쓴 한 유명한 런던 찬가는, 도시의 번영과 경건함과 완벽한 기후(!)를 자랑하면서 빈발하는 화재만 제외하면 런던의 유일한 골칫거리는 '바보 같은 술주정뱅이들'뿐이라고 설파했다.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수많은 다른 유럽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민은 그들만의 뚜렷한 정체성과 공동체적 특권—상인, 기술공의 특권과 자치 도시의 특권—을 주장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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