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역사 속의 서양인 본문
"회회回灰아비가 내 손을 쥐더이다"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은 만두가게를 하는 위구르 Uighur인(몽골고원에서 일어나 뒤에 투르키스탄 지방으로 이주한 튀르키예계의 유목 민족)과 고려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던 신라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국제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고려는 적극적으로 서역인西域人(서역은 중국 서쪽에 있던 여러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들의 귀화를 장려했고, 그들은 고려에 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우리의 삶에 함께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대외적으로는 소중화小中華(작은 중국)를, 내부적으로는 단일민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서양 계통의 사람들을 타자화他者化(어떤 사람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킴으로써 분리된 객체로 격하시키는 모든 행위)하기 시작했다.
약간이라도 코가 높거나 이국적 용모의 예술품이 나오면 낯설고 신기한 '서역인'으로 통칭할 뿐, 우리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서양인 계통은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이제부터 숨어 있던 그들을 하나씩 찾아보자.
○실크로드에 등장한 최초의 서양인
동아시아로 유입된 최초의 서양인(또는 유럽인)은 약 5000년 전 목초지를 찾아 동유럽에서 유라시아로 건너온 유목민들이다.
토하르인 Tohar이라 불리는 그들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했으며, 몽골을 거쳐 중국 북방과 실크로드(비단길) Silk Road(근대 이전의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육지 또는 해상 교역로) 일대로 진출했다.
특히 타클라마칸 Taklamakan 사막의 로프노르 Lop Nur/Lop Nor 지역에 정착했던 일파의 무덤인 샤오허(소하小河) 유적에서는 생생한 유럽 인종들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건조한 사막 기후 덕분이다.
서양인들이 가지고 온 선물이 있었으니, 바로 맥주와 국수다.
5000년 전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이들이 가져온 보리 덕분에 새로운 술인 맥주가 탄생했다.
황허강(황하黃河) 상류의 산시(산서山西)성 미자야(미가애米家崖)라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보리와 구근류를 섞어 술을 빚었던 토기가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맥주를 만든 흔적이다.
또한 보리와 함께 밀이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에서도 본격적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샤오허 유적의 무덤에서 손으로 빚어 만든 국수가 발견되기도 했다.
서양인 일파는 유제품과 가죽을 제공하는 목축 외에도 새로운 곡물들을 동아시아로 전래한 주역이었다.
최초의 서양인 흔적인 샤오허의 유물은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도 있다.
100년 전 일본의 실크로드 탐험대가 현지에서 수집해 온 것이다.
물론 일본 탐험가들은 그 유적을 직접 가보지도 못했고, 그 유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일제강점기에 풀로 만든 바구니를 거꾸로 세워 머리에 쓰는 모자라며 전시한 수준이었다.
다행히 샤오허의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의 노력으로 2017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에 온 서양인들이 실제 한반도 땅을 밟았을까?
사실 한반도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을 하는 사람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확정하기 어렵다.
대신에 다른 단서가 있으니, 유라시아 초원을 거쳐 동아시아에 들어온 유목민이 가져온 청동제련술이다.
약 4000년 전 아시아 전역에 확산된 세이마-투르비노 Seima-Trubino 계통의 청동기가 2016년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서양인이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약 3000년 전의 유적인 정선 아우라지의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과 2500년 전 유적인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위치한 황석리黃石里 고인돌에서 발굴된 사람뼈(인골人骨)에 서양인 계통의 흔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은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유럽인 계통의 일파가 한반도에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진시황은 서양인이었을까
중앙아시아의 강성한 유목민족들이 다시 동아시아로 밀려온 시기는 진시황秦始皇(서기전 259~서기전 210)이 만리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들을 막았던 약 2400년 전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시황의 일파 역시 서양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12년 진시황릉 서북부 쪽에서 발견된 99개의 무덤이 그 발단이다.
여기에서 발굴한 사람뼈가 대부분 젊은 여성이어서 후궁들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분이 높은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뼈를 복원한 결과, 그 외모가 중앙아시아나 페르시아 사람들의 인상과 비슷했다.
발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시황릉 동쪽에서 발견된 또다른 20대 남성 귀족 또는 왕자들의 무덤에서도 서양인의 흔적이 나왔다.
오늘날 중국의 깐수(감숙甘肅)성과 산시성 일대는 예로부터 융적戎狄(중국에서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를 아울러 이르던 말)이라 불리던 유목민이 살았는데, 그들은 외모 면에서 뚜렷한 서양인의 특징이 보인다.
그러니 진나라 사람 중에서 서양인 계통이 나오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발견된 곳이 진시황릉 근처의 커다란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진나라의 왕족 또는 귀족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람뼈가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胡亥(서기전 229~서기전 207)와 그의 공주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호해도 이 사람뼈의 나이와 비슷한 스무 살 무렵에 죽었고, 발견된 사람뼈에 호해처럼 살해당해서 사지가 찢긴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의 일족이 서양인이라는 주장은 아직 호사가들의 추정에 불과하다.
다만 진나라 그리고 그 이전의 주周나라가 건립된 지역의 사람들은 서양 계통의 유목민인 융적이 주류를 이루었음은 고고학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서기전 4세기에 확산된 서양인 계통의 유목민들은 동쪽으로는 베이징 근처의 연燕나라까지 이어졌다.
연나라의 왕족들이 남긴 신좡터우(신장두辛莊頭) 무덤에서 고깔모자를 쓴 사람 모형의 황금장식이 나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한반도 세형동검 문화에서 쓰인 꺽창도 같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유물들이 함께 나온 무덤을 동호와 고조선을 침략했던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징 근처의 연나라를 매개로 서양인계 유목민과 고조선 사람들이 조우한 셈이다.
중국 북방에 등장한 새로운 유목민들의 확산 배경에는 흉노가 있다.
흉노의 왕 선우單于들의 무덤 유적인 몽골의 노용-올 Noyon-Uul(노인울라 Noin Ula)에서 인물상이 발견되었는데 전형적인 몽골인과 함께 마치 영국의 록그룹 퀸 Queen의 리드 싱어 Lead Singer(음악 그룹의 메인 보컬리스트 main vocalist)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의 외모를 지닌 인물도 있었다.
그런데 각 인물들이 표현하는 상황이 다르다.
몽골인 계통의 사람은 사슴을 사냥하는 무사의 모습인 반면 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의 사람은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배화교拜火敎: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페르시아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오직 하나의 신만을 믿는 유일신교唯一神敎)의 의식을 행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발굴한 사람뼈는 대부분 몽골 계통에 가까웠다.
이를 종합해보면, 아마도 흉노 집단에서 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의 실제 비율을 그리 높지 않았으며, 그들은 주로 종교를 담당하던 사제나 사절단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더불어 흉노가 당시 만리장성 일대의 다양한 유목민들을 차별 없이 통합하여 거대한 유목제국을 이루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이어지는 서양인에 대한 오해
우리 안의 서양인에 대한 오해는 팽배하다.
고대 인물상 중에 코가 크거나 조금만 이국적이면 '서역인' '아라비아인' '소그드인' '위구르인' 등의 이름을 무리하게 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와 이웃했던 서양 계통 주민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이렇게 붙이는 것은 마치 금발의 외국인을 무조건 미국인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같다.
2017년 경주 월성에서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터번 turban(이슬람교도나 인도인이 머리에 둘러 감는 수건)을 두른 듯한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가 출토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소그드인(중앙아시아 소그드 Sogd를 근거지로 하는 스키타이 Scythai 계열의 유목민) 인물상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소그드인은 터번을 쓰지 않았으며, 아랍에서 터번은 신라 멸망 이후 한참 뒤에나 유행했다.
반대로 2018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대고려전'에서 고려시대 승려 희랑대사 좌상이 대표 작품으로 소개되었는데 희랑대사의 얼굴을 보면 코가 아주 크고 얼굴이 길쭉하여 서양인과 닮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서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가 판단하는 서양인의 모습은 객관적이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선입견에 많이 좌우된다.
외형을 단순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1950년대 산업화 이전의 한국인과 요즘 젊은 사람들을 비교하면 신장과 체형은 물론 생김새도 다르다.
미국이나 러시아의 교포들을 보아도 이민을 간 지 3~4세대만 지나면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외모의 차이가 뚜렷하다.
사람의 외형은 유전적인 요소에 생활과 식습관이 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모에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 혈연적인 관련성과 함께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서양인'의 모습을 낯설어하는가이다.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지난 5000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서양인들은 우리 이웃으로 살면서 꾸준히 새로운 문화를 공급하고 전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역사는 망각한 채 서유럽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서양인들을 익숙하게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서양인'들이 있다.
다행히 지금 한국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 출발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5000년 전의 우리 이웃들을 다시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미지의 땅'이라는 선입견이 아닌 '우리의 이웃'이라는 인식의 전환 말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구글 관련 자료
2023. 8. 2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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