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3: 비잔티움, 이슬람, 십자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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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3: 비잔티움, 이슬람, 십자군

새샘 2023. 8. 29. 21:34

9세기와 10세기에 아바스 칼리프국 Abbasid Caliphate(아바스 왕조 Abbasid Dynasty)이 쇠퇴하자 비잔티움 제국 Byzantium Empire의 세력은 팽창했다.

9세기 중반 비잔티움의 입지는 불안했다.

무슬림 함대가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와 크레타 Crēta(영어: Crete)를 함락했고, 이교도인 슬라브족 Slavs의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로의 이주는 발칸 지역에 대한 비잔티움의 지배권을 급속히 잠식했다.

제국의 동쪽 경계선은 8세기 초와 달라지지 않았지만 변경에 대한 무슬림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흑해 Black Sea와 카스피해 Caspian Sea로 흘러가는 러시아 하천망을 따라 입지를 확보한 바이킹 Vikings(루스족 Rus) 침입자와 상인이 새로운 적으로 등장했다.

루스족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는 아바스 왕조로서, 그들은 노예, 꿀, 밀랍, 모피 등을 아바스의 은이나 인도의 향신료, 중국의 비단 등과 거래했다.

그러나 루스족은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로 가는 길도 잘 알고 있었다.

비잔티움 황제와 군대가 동부 변경에서 무슬림을 상대하기에 분주했던 860년, 일단의 루스족 함대가 흑해로 항해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다.

 

 

○비잔티움의 부흥

 

1025년 무렵의 비잔티움 제국(사진 출처-출처자료1)

 

비잔티움 제국(900~1204년)
아바스 지배자에 대한 원정 성공 930~970년
러시아가 정교로 개종 911~989년
황제 바실리우스 2세 976~1025년
튀르크의 침입(만치케르트 전투 패배) 1071년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치세 1081~1118년
제1차 십자군 1095~1099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1204년

 

1025년에 이르러 비잔티움의 위상은 변했다.

몇 세기 동안 선교 침체기를 겪은 뒤 9세기의 비잔티움 선교사들—가장 유명한 인물은 키릴루스 Cyrillus와 메토디우스 Methodius 형제—은 발칸의 슬라브족을 정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고, 슬라브족을 위해 고대 교회 슬라브어 Old Church Slavonic 로 알려진 문어文語(글말: 대화가 아닌 주로 글에서 쓰는 말)를 고안하고 키릴 문자 Cyrillic alphabet—오늘날도 불가리아 Bulgaria, 세르비아 Serbia, 러시아 Russia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를 발명했다.

그리고 즉각 군사적 정복이 이어졌다.

황제 바실리우스 2세 Basilius II (재위 976~1025, 별명은 '불가르족의 학살자 Slayer of the Bulgars')가 사망한 1025년, 비잔티움은 그리스, 불가리아, 그리고 오늘날의 세르비아를 제국에 병합했다.

비잔티움인은 키예프(키이우) Kyiv를 거점으로 한 루스 왕국 Kingdom of Rus과 군사적·상업적 동맹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루스족으로 하여금 이슬람을 등지고 콘스탄티노플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911년 700명가량의 루스족이 비잔티움 함대와 함께 무슬림 지배하의 크레타를 공격했다.

945년에는 루스족과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957년 키예프의 그리스도교도 왕비 올가 Olga는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해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989년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키예프 왕 블라디미르 Vladimir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황제의 정적인 바르다스 포카스 Bardas Phokas—비잔티움 제국의 동쪽 변경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를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군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바실리우스는 여동생 안나 Anna를 블라디미르에게 시집보냈고, 블라디미르는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정교로 개종했다.

러시아는 오늘날까지도 정교회의 보루로 남아 있다.

 

930년대에서 970년대 사이에 비잔티움은 동부 및 동남부 변경에서 아바스 왕조에 대한 일련의 원정에 성공을 거두고, 7세기 이래 비잔티움이 차지하지 못했던 영토를 탈환해 재정복했다.

재정복된 영토에 살던 주민 대부분은 이슬람이 지배한 3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각별히 아르메니아인 Armenians과 시리아인 Syrians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그리스도교 전통(아르메니아 사도교회 Armenian Apostolic Church와 시리아 정교회 Syriac Orthodox Church)을 지키면서 교리적·언어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어 사용 교회와 대립각을 세웠다.

몇 백년 동안 종교적 전통 orthodox('올바른 믿음'이란 뜻)의 토대 위에서 정체성을 규정했던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 그와 같은 '이단'의 혼합은 제국 통합의 토대를 방해하는 일이었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동부 지역 정복으로 지방 귀족 가문—그들은 정복활동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이득을 얻었다—의 세력이 크게 신장됨으로써 결과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바깥에 처음으로 새로운 권력 구심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비잔티움 정치는 제국 동부의 귀족 가문들과 제구 관료 사이의 갈등과 대립 때문에 10세기 내내 혼란에 빠졌다.

이들 중 한 가문의 우두머리가 반란을 기도하자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동부 유력 가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 뒤 황제는 비잔티움 군사력의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고 베네치아 해군의 도움을 받아 불가리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동부 유력 가문들에 대한 견제는 일시적인 효과만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바실리우스가 사망한 뒤 제위는 노쇠하고 무능한 친족에게 넘어갔다.

그 결과 초래된 권력 공백 속에서 귀족 전사 가문들은 지방에 대해 지배권을 한층 강화한 반면, 궁정은 제국의 지출 증대와 더불어 세입이 감소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부족한 세입을 메우기 위해 황제들은 비잔티움 금화를 변조했다.

그 결과 1040년에서 1080년 사이에 금화 가치는 50퍼센트나 떨어졌고,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 ·제노바 Genova(영어 Genoa)·피사 Pisa가 동부 지중해 교역로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던 그 시기에, 비잔티움의 상업적 토대는 훼손되고 말았다.

1081년에 이르러 동부의 유력 가문들이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Alexius Comnenus(재위 1081~1118)를 제위에 올려놓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 세계에서 이미 절름발이 세력이 되어 있었다.

 

 

○이슬람 튀르크의 침입

 

11세기 말의 비잔티움은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베네치아·제노바·피사가 동부 지중해의 해상 지배세력으로 등장해, 이슬람 북아프리카(이집트 Egypt 포함)와 서유럽 사이의 수익성 좋은 교역을 상당 부분 차지해버렸다.

세력이 커지던 파티마 왕조 Fatimid Dynasty 이집트는 비잔티움 제국의 동남쪽 시리아 접경 지역에서 비잔티움의 이익을 갉아벅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큰 재양은 새로운 수니파 무슬림 세력인 셀주크튀르크 Seljuk Türk가 중앙아시아에 등장해 비잔티움 제국 핵심부인 소아시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튀르크가 아르메니아를 함락했을 때 황제가 그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동부의 귀족 가문들은 지원을 거절했고, 만치케르트 Manzikert에서의 결정적인 전투(1071)에서 비잔티움 황제군은 전멸했다.

바야흐로 튀르크에게는 아나톨리아 Anatolia(현 터키 반도) 전부를 장악하는 길이 활짝 열렸고,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부유하고 생산적인 지역이 단번에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졌다.

같은 해 또 다른 튀르크 집단이 시아파 Shia(시아 shia는 아랍어로 '파당'이란 뜻이며, 이슬람 종교 관행인 순나 sunna를 구속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티마 왕조로부터 예루살렘 Jerusalem을 탈취하고 거룩한 도시에 대한 수니파 Sunni(순나 sunna를 구속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이 튀르크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서쪽의 발칸 슬라브족 역시 이 무렵 반란을 일으켰고, 가뜩이나 심각한 수준으로 고갈된 비잔티움의 국고를 더욱 소진시켰다.

 

그러나 1090년대에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국고를 다시 채우고 비잔티움의 발칸 지배권을 회복했으며, 튀르크 원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1세기를 거치는 동안 서유럽의 기사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중무장 기병이 되어 있었다.

알렉시우스는 1085년의 한 전투—그는 이 전투에서 노르만인 Normans의 그리스 침공을 물리쳤다—에서 이 기사들과 대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는 투르크 경무장 기병을 물리칠 병력으로 그들을 데려다 쓰고 싶었다.

중무장 기병 부대를 모집하기 위해 알렉시우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Urbanus II에게 사람을 보냈다.

알렉시우스는 몇 천명 규모의 분견대만 있으면 소아시아에서 튀르크가 가져가는 이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되기 전에 교황은 10만 명의 서유럽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십자군十字軍 Crusades(군인들의 의복과 장식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었던 데에서 유래)을 편성해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 세계로 되돌리려 했다.

 

 

○제1차 십자군

 

1096~1204년 동안의 십자군 원정로(사진 출처-출처자료1)

 

십자군
제1차 십자군(예루살렘 탈환) 1095~1099년
제2차 십자군(셀주크튀르크에게 패배) 1145~1149년
제3차 십자군(프리드리히 바로바로사와 리처드 사자심왕) 1187~1192년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플 약탈) 1201~1204년
제5차 십자군(다미에타 함락) 1217~1221년
평화조약으로 예루살렘 회복 1229~1244년
제6차 십자군(프랑스 루이 9세 패배) 1248~1254년
제7차 십자군(프랑스 루이 9세 사망)
1270년

 

우르바누스 2세의 소집에 그토록 엄청난 반응이 나온 이유는 복잡하다.

우르바누스 2세 자신은 십자군을 다음 네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첫 번째 목적은 정교회를 다시 교황권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두 교회의 관계는 1054년 교황 사절과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만일 우르바누스 2세가 두 교회를 통합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의 교황군주국가 계획—이 계획의 목적 중 하나는 모든 주교와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首位權(모든 주교 가운데 제1의 권한)을 확립하는 것이었다—을 실현하는 크나큰 업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두 번째 목적은 우르바누스 2세의 최대 적인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 Heinrich IV를 곤경에 빠뜨리는데 있었다.

하인리히와 교황은 제각기 그리스도교 세계에서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20년 넘도록 전쟁 상태에 있었다.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강력한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이야말로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정당한 지도자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을 것이다(9장 참조).

셋째,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달성하고자 했다.

10세기부터 프랑스의 많은 주교와 수도원장은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신의 평화 Peace of God'), 특정한 축일에 전투 행위를 금지하는('신의 휴전 Truce of God') 평화운동을 지원했다.

제1차 십자군 운동을 선언한 1095년의 클레르몽 공의회 Council of Clermont에서 우르바누스 2세는 이 평화 운동에 대한 교황의 전폭적인 승인을 처음으로 공표했다.

실제로 우르바누스 2세는 소집된 기사들에게 만일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그리스도교의 대의를 위해 정당하게 싸우라고 말했다.

끝으로,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자체가 우르바누스 2세에게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중세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지구의 중심이자 예수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로 인정받고 있었다.

서유럽의 순진하고 무식한 기사들과 우르바누스 2세(그는 남프랑스의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가 보기에, 그리스도교도 기사들이 주 그리스도를 위해 무슬림에게 탈취된 그리스도의 고향을 되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우르바누스 2세의 요청에 대한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교황의 소집이 있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서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10만 명의 남성, 여성, 아이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할 생각이었다.

모든 대규모 계획이 다 그러하듯이 십자군 참가자들의 동기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일부는 동방에서 땅을 획득하거나 공국을 설립하고 싶어 했고, 다른 일부는 단순히 모험을 기대하고 참가했다.

주군을 수행한 종인從人(종자從者: 남에게 종속되어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제법 많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모호한 예언과 묵시적 열정에 사로잡혀 참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지 또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채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몇몇 대영주—그들은 대부분 남부 이탈리아에서 온 노르만인 Normans이었다—를 제외하면, 십자군 참가자가 동방에서 새로운 땅을 얻는다는 것은 가능성도 없었고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실제로 1099년 이후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의 라틴 제국 Latin Empire(로마니아 제국 Imperium Romaniae)이 직면한 최대 문제 중 하나는 동방에 머물고자 한 십자군이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서약한 바를 완수한 뒤 십자군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여행에서는 목숨을 잃을 위험이 매우 높았고 여행에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은 여행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최소한 2년치 수입을 손에 쥐고 가야 했다.

그만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대부분의 기사들은 땅을 저당 잡히고, 가족, 친구, 수도원, 상인 등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렸다.

운이 좋아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간다면 부채 상환 방안부터 찾아내야 했다.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서 아무리 합리적 판단을 내리더라도 십자군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그리스도교도의 영혼에 위한을 주는 일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 순례는 가장 인기 있는 그리스도교 고해 형식이었고, 예루살렘 순례는 그중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효험이 큰 순례로 간주되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십자군 참가자에게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다른 고해가 면제된다고 약속했다.

십자군 설교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군 참가자들에 대한 대사大赦를 약속했다.

즉, 십자군 참가자에게는 그때까지 그들이 범한 모든 죄에 대한 내세에서의 연옥 형벌이 완전히 면제되며, 십자군 원정 도중 죽은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대사는 실로 파격적인 은사였기에 군중은 그것을 얻고자 몰려들었던 것이다.

 

십자군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병사가 동방에서 그리스도의 적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십자군은 임무 수행을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슬림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땅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은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1세기를 거치면서 라인란트 Rhineland의 대도시들과 북부 프랑스 France의 소도시들에서는 유대인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었다.

십자군 무리의 유대인 공동체 공격은 1096년 북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고, 십자군의 동방 이동과 더불어 라인란트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몇 백 명의 유대인이 마인츠 Mainz, 보름스 Worms, 슈파이어 Speyer, 쾰른 Köln 등지에서 살해되었고, 십자군 기사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는 대가로 몇 백 명의 유대인이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을 제지하려는 교회 당국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공격은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십자군의 일상적이고도 당연한 행동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자신의 호소에 대한 서유럽의 반응의 본질과 규모에 경악한 나머지, 십자군이 최대한 빨리 콘스탄티노플을 지나쳐 소아시아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서유럽 십자군과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이내 분명해졌다.

알렉시우스는 예루살렘 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십자군이 무슬림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비잔티움 제국에 돌려줄 것을 약속해달라고 요구했다.

십자군의 눈에 이것은 배신으로 비쳐졌다.

이런 인상은 십자군의 행군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에 기대했던 보급품 공급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자 확신으로 굳어졌다.

알렉시우스의 입장에서 십자군 집단은 위협적이었다.

특히 십자군들 가운데 불과 10년 전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려 했던 노르만인 지도자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자신들이 신에게서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정 무슬림 지배자들과 싸우기 위해 다른 무슬림 지배자와 기꺼이 동맹을 맺으려고 한 비잔티움 황제의 태도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나아가 십자군은 비잔티움 황제가 실제로는 자신들이 원정을 훼방하고 있으며, 심지어 십자군에 맞서 무슬림을 지원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십자군의 이런 의심은 근거 없는 것이긴 했지만, 이런 의심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예루살렘 회복 노력에 대한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서유럽인의 확신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어려움 끝에 제1차 십자군은 성공을 거두었다.

1098년 십자군은 안티오크 Antioch를 함락했고 시리아 해안 대부분을 점령했다.

1099년 말 그들은 예수살렘을 함락하고 무슬림·유대인·그리스도교도 주민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십자군의 적인 무슬림이 그 무렵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이 도착하기 불과 몇 달 전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재탈환했고, 르크인은 자기들끼리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전술, 특히 중무장 기사들이 개활지에서 보여준 우월한 전투력 또한 십자군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제1차 십자군이 제노바와 피사 해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제노바와 피사는 십자군 원정이 성공할 경우 홍해 Red Sea를 거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에 이르는 인도 향신료 무역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런 의미에서 제1차 십자군은 비잔티움 상업의 쇠퇴를 가속하는데 기여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비잔티움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의 경쟁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플-바그다드 간 교역로 및 중국으로 가는 중앙아시아 비단길에 대한 르크의 침공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1차 십자군은 비잔티움과 서유럽의 세력균형을 깨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의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세력균형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십자군 왕국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Palestine 해안선의 인구 희소한 좁은 띠에 불과했다.

십자군이 홍해를 지배하지 않는 한 이슬람과 인도·극동 사이의 주요 교역로는 예루살렘의 종교가 어떻게 바뀌건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십자군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군은 그들이 새로 획득한 영토를 통과하는 육상 대상로에 어떤 식으로든 간섭할 의사가 없었다.

한편 무슬림에게 예루살렘 상실은 경제적 손실이라기보다는 단연 종교적 모욕이었고, 그들이 영토 회복을 계획하기 시작한 것도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1144년 시리아에 있던 십자군 공국들은 대부분 무슬림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제2차 십자군에서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의 지휘를 받은 그리스도교도 전사들은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방으로 왔지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시리아와 이집트는 위대한 무슬림 지도자인 살라딘 Saladin 아래 통일되었고, 1187년 살라딘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이에 맞서 제3차 십자군이 출범했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Friedrich Barbarossa, 프랑스의 존엄왕(오귀스트 Auguste) 필리프 2세 Philippe II, 잉글랜드의 리처드 사자심왕獅子心王 Richard the Lionheart이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제3차 십자군 원정도 실패하고 말았다.

바르바로사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소아시아에서 익사했고 존엄왕 필리프 2세도 곧 고국으로 돌아갔다.

리처드 사자심왕의 영웅적 노력 덕분에 라틴 왕국은 그 다음 세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리처드마저도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1198년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의 주된 야심은 예루살렘 탈환이었고, 그는 이를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지만, 그것은 재앙이었다.

독일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전쟁까지 겹쳐 십자군 참가를 희망하는 기사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십자군 병력을 성지로 수송하기로 계약 맺은 베네치아인은 예정된 십자군의 절반만 도착하자 운임을 제대로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자 베네치아인은 1204년 십자군의 방향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 성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베네치아는 막대한 물질적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사실상 파멸되었고, 앞으로 60년 동안 라틴 속주와 그리스 속주로 영토가 분단되었다.

1261년 베네치아의 경쟁국인 제노바는 새로운 황제권 주창자인 팔레올로구스 왕조 Palaeologus Dynasty의 미카엘 8세 Michael VIII를 도와 비잔티움 황제권과 콘스탄티노플 지배권을 회복시켜주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판도는 이제 콘스탄티노플 도시로 축소되었고,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는 결국 오스만튀르크 Ottoman Türk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제4차 십자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서유럽의 노력은 13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1229년 서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가 이집트의 술탄 Sultan of Egypt과 조약—앞으로 10년 동안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 지배권 아래 두기로 했다—을 체결했을 때를 제외하면 서유럽 지도자 중 누구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직접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13세기의 십자군은 주로 이집트를 겨냥했고(1217~1219, 1248~1254). 1270년에는 튀니스 Tunis(지금의 아프리카 튀니지 Tunisie)를 목표로 삼았다.

이제 십자군은 무슬림의 성지 지배를 지탱해주는 경제적 생명선의 단절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 십자군 운동을 설명하면서, 예루살렘(파괴된 이 도시에는 성벽도 없었고 주민도 거의 없었다)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운 십자군의 원정 동기를 이탈리아 상인들의 야심(그들은 이집트를 경유한 극동 무역, 그리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부터 튀니스를 관통한 황금 무역을 장악하고 싶어 했다)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3세기 라틴 제국의 최대 상업 도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아크레(아코) Acre였다.

1291년 아크레가 무슬림에게 함락되었다.

아크레의 함락은 성지 회복을 목적으로 한 서유럽의 원정이 사실상 종식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물론 그 후로도 원정 계획은 수립되었다).

 

 

○십자군의 결과

 

비잔티움 제국에게 있어 십자군 운동의 영향은 파멸적이었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허약해진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경제적·군사적 세력균형에 결정적 변화를 초래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십자군의 영향이 훨씬 미미했다.

이슬람과 서유럽 사이의 무역은 시리아·이집트·북아프리카에 대한 십자군의 공격으로 인해 간헐적으로 중단된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가장 큰 경제적 이익은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 베네치아와 제노바에 돌아갔다.

하지만 이슬람 상인도 상품 판매를 위해 서유럽 시장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서유럽과 이슬람 양쪽 모두 군사적 견지에서도 얻는 것이 있었다.

서유럽인은 새로운 축성 기술을 배웠고, 무슬림은 새로운 공성 방법과 중무장 기병 활용법을 배웠다.

끝으로 십자군은 이교도에 맞서 싸우는 성전聖戰(거룩한 사명을 띤 전쟁)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양쪽의 교리를 확고히 하는 데도 기여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성전도 무슬림의 지하드 jihad(성전과 같은 뜻의 아랍어)도 상대방 교리에서 영향을 받은 바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 즉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와 그리스도교 유럽을 갈라놓고 있었던 상호간 적대감을 한층 더 격화시켰다.

 

십자군이 서유럽에 미친 영향은 판단하기가 더욱 어렵다.

언뜻 보기에 십자군은 중세 전성기 서유럽의 전반적인 팽창 성공 스토리에 오점을 남긴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유럽인은 중동에서—그린란드 Greenland와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에서 그랬듯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도를 넘고 말았다.

서유럽인은 자신들이 건설한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었고 마침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십자군은 유럽인에게 그들이 과거에 전혀 몰랐던 더 넓은 세계를 '새롭게 활짝 열어주지도' 못했다.

그 넓은 세계는 1095년에도 이미 존재했었고, 유럽인은 이미 그 일원이었다.

이슬람 세계와 그 너머 인도·극동과의 무역을 통해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 교역망은 십자군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십자군이 끝난 뒤에도 존속했다.

실제로 십자군은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 사이의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증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위축시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십자군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 짓는 것은 잘못이다.

십자군이라는 서유럽 군사력을 배경 삼아 '이슬람 중간상인을 배제하고' 향신료·비단·황금 무역을 독점하려 했던 서유럽 상인들의 야심을, 우리는 13세기의 십자군 운동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충동은 그 후로도 계속 유지되었고, 마침내 16세기 이후 유럽인에 의한 범세계적인 상업·식민 제국의 창출로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십자군의 이상이 유럽인의 내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면 안 된다.

십자군은 에스파냐 España에서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즉, 1110년과 1250년 사이에 카스티야 Castilla·포르투갈 Portugal·아라곤 Aragon의 왕들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이베리아 반도 Iberian Peninsula를 재정복했다.

각별히 이베리아에서 십자군은 16세기 말까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견지하면서, 15세기에 이루어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발견 항해 및 16세기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에 중요한 동기를 제공했다.

십자군은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 특히 오스만튀르크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튀르크는 16세기의 정복활동으로 빈 Wien의 대문 앞까지, 그리고 이탈리아 국경까지 접근했다.

최후의 서로마 황제라 할 수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마저도 십자군의 이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그 또한 (단명하긴 했지만) 1799년 예루살렘(아크레) 재정복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3. 8. 2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