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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의 진정한 주인

새샘 2023. 8. 31. 22:29

일본인의 역사인식은 자기모순적이다.

스스로를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세력 안의 다른 민족은 끊임없이 부정하고 열등화했다.
일본열도에서 1만 년 이상을 살아오던 조몬인(승문인縄文人)이 야요이인(미생인弥/彌生人)들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처럼 현대에는 아이누Ainu인들이 철저하게 탄압받으며 변방의 사람들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갔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을 열등하다고 간주하면서 집요하게 일본인으로 만들려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홋카이도(북해도北海道)를 대표하는 원주민인 아이누인은 7세기 무렵 '에미시(하이蝦夷, '에조'라고도 함)'라는 이름으로 일본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아이누인은 1500년 가까이 일본인들과 큰 충돌 없이 살았다.
하지만 1869년 메이지유신(명치유신明治維新)과 함께 일본은 이 지역을 개발하고 현지 원주민을 학살했다.
이 지역은 '에미시의 땅'이란 '에조치(하이지蝦夷地)' 대신 '홋카이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아름다운 관광지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홋카이도 일대에는 지난 세기 일본의 단일민족 정책에 희생되고 철저하게 탄압받았던, 일본열도의 진정한 주인공들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자기모순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이 섬나라의 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001년 아키히토(명인明仁) 일왕은 생일 기자회견에서 조상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며 본인의 뿌리가 백제계임을 공식화했다.
이 일이 상징하듯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계 도래인은 고훈(고분古墳)시대(3세기 중반에서 7세기 말까지로 대체로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한다) 일본의 역사를 주도했던 중추였다.
삼국시대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수많은 문화들은 일본 문화의 자양분이 되었고, 현대의 일본이라는 국가가 형성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을 굳이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 자료를 보면 한반도계 문화는 도래인이 기록에 등장하는 고훈시대보다 약 1000년이나 앞선 시기에 이미 일본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 2700년 전 남한에서 쌀농사를 짓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바다 건너 쌀농사에 유리한 규슈(구주九州)로 이동하면서 일본에 한반도계 청동기문화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야요이(미생弥生)문화'라고 부른다.
한반도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화는 일본열도를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어 멀리 동북쪽에 있는 아오모리현(청삼현靑森)까지 전래되었고, 일본 전역은 금세 한반도발 쌀농사 문화로 뒤덮혔다.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이 계통을 한반도와 대륙에서 찾는 것도 일정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의 기원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일왕) 만세일계를 외치며 순혈의 단일민족임을 내세웠다.
그렇다면 야요이 이전의 거의 1만 년 가까이 있었던 조몬시대의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니란 말인가?
이러한 자기부정의 역사는 일본 동북쪽에서 살던 아이누인과 남쪽에 살던 오키나와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일본 본토의 터줏대감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인류학과 고고학을 받아들인 일본은 처음에는 아이누인들을 통해서 선사시대 일본인의 기원을 밝히고자 했다.
일본은 미국 고고학자 에드워드 모스 Edward Morse를 초청했다.
모스는 1877년 연락선을 타고 미국을 출발해 요코하마(횡빈橫浜/)에 도착한 뒤, 다시 당시 갓 건설된 기차를 타고 도쿄(동경東京)로 들어가던 중 창 너머로 철도공사로 파괴된 조개무지(조개더미, 패총貝冢)을 발견했다.
모스는 조몬시대에 해당하는 오모리(대삼大森) 패총을 조사하고는 당시 사람들이 식인종으로 아주 미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누인보다도 더 원시적인, 아이누의 신화에 나오는 전설 속 사람인 '고로폿쿠루コㇿポックㇽ'라고 보았다.
아시아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개입된 모스의 주장이었다.
일본인의 기원이 미개한 식인종이라는 고로폿쿠루 논쟁은 일본 학계에서 5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당시는 일본이 천황의 만세일계를 내세우며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민족임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던 시점이었다.
고로폿쿠루 논쟁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미개한 섬나라가 아니라 북방 대륙에서 기원했다고 더욱 굳게 믿게 만들었다.
또한 아이누인을 비롯한 원주민들을 자신들과 관계없는, 없어져야 할 원시인으로 낙인찍었다.
 

입가에 문신을 한 아이누인의 모습. 아이누인은 일본 전역에 살다가 북쪽으로 밀려간 사람들의 후손으로 북방 몽골로이드 계통과는 외모부터가 다르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아이누인은 현재 공식적으로 홋카이도에만 1만 명 남짓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이누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입 주변에 마치 영화 <다크 나이트 The Dark Night>(2008)의 조커 Joker를 연상시키는 문신을 하고, 서양인처럼 보이는 신기한 외모에 곰을 숭배한다는 정도다.
하지만 아이누인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에미시'라는 이름으로 일본 역사에 기록된 것은 7세기 무렵이지만 이누인은 일본에 국가가 등장하기 전부터 일본열도 전역에 살다가 북쪽으로 밀려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시베리아와 극동에 살면서 추위에 적응된, 눈이 작고 광대뼈가 발달한 소위 '북방 몽골로이드 Northern Mongoloids' 계통의 주민과는 외모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핀란드의 언어학자 유하 얀후넨 Juha Janhunen은 언어적으로 보아도 아이누의 언어는 북쪽이 아니라 일본 혼슈(본주本州)의 남쪽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일본 역사에서 아이누인은 미개와 관계가 멀다.
그들은 귀한 각종 모피, 해산물, 바다코끼리의 송곳니 등을 일본과 교역하던 파트너였다.
에도(강호江戸)시대 그들과 인접했던 마쓰마에번(송전번松前藩)은 일본열도의 수많은 번들과 달리 유일하게 농사가 아닌 아이누와의 교역만으로 주요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주로 일본 혼슈 동북부인 도호쿠(도북道北) 지역에서 살던 아이누인은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서 13세기 무렵에는 홋카이도로 뻗어나갔고, 사할린 Sakhalin과 캄차카반도 Kamchatka Peninsula까지 진출했다.
 
아이누인이 도호쿠에서 바다를 건너 홋카이도로 간 것은 700년 전이다.
그렇다면 아이누 이전에 홋카이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그 실마리는 '오호츠크문화'에 있다.
홋카이도 북쪽 오호츠크해 Sea of Okhotsk 해안가 일대에서 일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토기와 집 자리가 발견되어서 '오흐츠크문화'라 이름 지어졌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정체를 풀려 했지만 실패했다.
최근에 이들의 기원이 발해의 기층基層(바탕을 이루는 층)을 이뤘다가 사할린으로 건너간 말갈족靺鞨族임이 밝혀졌다.
실제로 두만강 하구에 있는 대표적인 발해 유적인 크라스키노 Kraskino 유적에서 발굴한 말갈 계통의 토기와 똑같은 토기들이 사할린 남쪽에서도 발견되었다.
발해의 기층을 이루었던 말갈족이 동해의 여러 산물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가 살았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실제로 극동 지역과 사할린 사이를 가르는 네벨스코이 해협 Nevelskoy Strait은 거리가 8km에 불과하고 겨울에는 해협이 얼어붙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
홋카이도로 건너갔던 말갈 계통 사람들은 13세기 무렵에 사라지는데, 그때 몽골제국이 아무르강(흑룡강黑龍江) 하류에 사령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도 몽골을 이어서 이 지역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여진 지역인 노아간을 통치하는 정부 기구)를 설치했다.
말갈 계통의 오호츠크 문화인들은 중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쿠릴섬 Kuril Island을 따라 북쪽 캄차카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북극권의 여러 원주민들 사이에서 바다를 따라 교역을 주도했다.
최근 알래스카 Alaska 일대에서 발해와 말갈 계통의 유물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환태평양 교역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고고학 조사 결과 변방의 오랑캐로 치부되던 아이누인과 오호츠크 문화인들이 오랜 기간 일본열도와 사할린에 살았던 진정한 주인공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인이 야마토(대화大和 또는 왜倭)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는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1990년대까지 유엔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인은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현재 홋카이도 외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누인은 제대로 된 통계마저 없다.
일본은 그들을 천민계급인 부라쿠민(부락민部落民)으로 규정하면서, 지금까지도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게, 하지만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다.
 
 

아이누인의 눈물 어린 투쟁

 
어떤 젊은 고고학자가 당신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당신 부모님의 무덤을 파헤치겠다면 어떨까.
학문이란 미명 아래 졸지에 조상의 무덤을 잃어버린 아이누인의 사연을 재구성해보자.
일본 본토에서 온 젊은 고고학자는 갓 박사학위를 받아 과거의 문화를 연구하겠다는 의욕이 가득하다.
그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부모님은 고고학적으로 소중한 자료이니 내가 무덤을 파서 그 인골을 가져가겠습니다. 당신 인종은 아주 특별한 연구 자료거든요."
 
해마다 무덤을 참배하며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당신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리일 것이다.
특히나 조상의 무덤은 유교문화가 널리 퍼진 동아시아에서는 더욱 각별하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소수민족인 당신은 힘이 없다.
헌병들이 동원되어 반강제로 조상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무덤을 파묘한다면 정성껏 예를 올리고 한삽 한삽 경건히 파야 하건만 고고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사방으로 줄을 치고 삽으로 무심하게 파다가 해골이 나오면 들고 신기해하며 숫자를 적어 상자에 넣었다.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았지만, 저들은 거대한 일본이라는 공권력을 뒷배로 둔 고고학자가 아닌가.
부모님의 유해로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리고, 또 학문에 공헌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며 스스로 억지 위로를 하고, 멀어져가는 발굴단의 트럭을 눈물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홋카이도대학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오호츠크 문화인(왼쪽에서 두 번째), 아이누인(왼쪽에서 세 번째), 야마토인(맨 오른쪽)의 머리뼈(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것이 바로 아이누인의 현실이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연구라는 명목으로 후손들이 멀쩡히 관리하던 무덤에서 인골을 꺼내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누인은 빈 무덤을 간신히 보존하며 인골 반환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인골이 특히 많은 곳이 홋카이도대학이다.
아이누인은 '북대개시문서연구회北大開示文書硏究回'(북대는 홋카이도대학의 준말)라는 모임을 조직해서 인골을 반환해달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홋카이도대학의 입장은 단호하다.
아이누인의 머리뼈(두개골頭蓋骨) 중 일부는 지금도 홋카이도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머지 인골은 대부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대학 박물관의 지하창고에 처박혀 있다.
하지만 대학 측은 '소중한' 연구 자료이니 절대로 돌려줄 수 없단다.
계속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에 있어야 한단다.
정부도 이에 수수방관한다.
 
2020년 7월 '교도(공동共同)통신'은 도쿄대학에 있는 아이누인의 인골을 장기간의 논의 끝에 반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아이누인의 숙원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아이누인과 비슷한 상황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있었다.
다행히 미국 각 대학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골 반환은 지난 몇십 년 동안 눈물의 호소와 운동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고 본면 식민지의 아픔을 겪은 우리에게도 그런 비극이 있다.
일본에서도 동학운동가를 처형하고 그 인골을 전리품처럼 보관 중이다.
아이누인의 모습에서 일제강점기 차별받고 희생당했던 한국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의미 없는 쿠릴섬 귀속 논쟁

 
국내적으로 아이누인이나 오호츠크 문화인들과 같은 원주민들의 존재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일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외교적으로 쿠릴섬은 일본의 것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한다.
한국을 상대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은 러시아를 향해서도 남부 쿠릴의 네 개 섬, 소위 '북방 4개 섬'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해마다 러시아가 당장 주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뉴스를 양산한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쿠릴섬은 관심 밖이었다.
러시아가 1739년에 쿠릴섬으로 진출하고 나서야 에도(강호江戶) 막부幕府 즉 도쿠가와(덕천德川) 막부가 부랴부랴 쿠릴 지역으로 사람을 파견했을 정도다.
쿠릴섬은 러시아의 슬라브인들보다 일본의 아이누나 오호츠크의 역사와 훨씬 가깝다.

하지만 일본 스스로 아이누인과 다른 소수민족을 말살하고 그들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았는가.

 
쿠릴섬 논쟁은 철저하게 현대 정치의 산물이다.

러시아도 일본도 쿠릴섬에 대한 역사적인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사할린과 쿠릴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바로 활처럼 늘어진 쿠릴열도를 따라 캄차카반도로, 더 나아가 베링해 Bering Sea로 이어지는 대륙 간 문화교류를 주도했던 사람들인 말갈 계통의 오호츠크해 문화인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지역이 동아시아 문명과 북극 및 태평양을 잇던 사람들을 위한 연구 대신에 현대 국가 간 영토분쟁의 아이콘으로만 남아 있으니, 역사적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는 셈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https://route.tistory.com/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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