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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2. 전통산수화와 그 변화 본문

글과 그림

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2. 전통산수화와 그 변화

새샘 2023. 9. 6. 22:29

출처자료1의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의 안쪽 표지(사진 출처-영풍문고http://www.ypbooks.co.kr/book.yp?bookcd=100849358)

 

전통산수화의 변화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알다시피 전통그림은 오랫동안 '산수山水'가 그 특색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산수하면 산山과 수水가 한자로 표시하는 우리말의 '경치' '풍경', 영어의 'landscape' 아니냐고 간단히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산수'라는 것은 단순히 산천계곡이 아니라 철학적 개념이 들어 있어서, 중국의 북송北宋(960~1127) 이래 이른바 풍진속세風塵俗世(어지러운 인간 세상)와 대조되는 자연自然의 이념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정市井(사람이 모여사는 곳)에 살면서도 벽에 '산수'를 걸어놓고 이른바 고사高士(산속에 숨어 살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덕망 있는 선비)가 거닐던 자연의 경지를 생각하고 그 속에 노니는 기분을 맛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관념의 세계를 동경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기법으로 그런 '산수'를 표현하는 여러가지 방법, 곧 소위 준법皴法(산수화에서 산악·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기법), 수법樹法(산수화에서 나무를 그리는 방법), 인물, 토파土坡(흙으로 쌓아 올린 둑) 등의 기법이 발달되어 이러한 '산수'의 구체적 표현의 방식으로 정형화되었습니다.
물론 그러니까 '산수'를 똑같이 그렸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 준법, 수법, 발묵潑墨(먹물이 번져 퍼지게 그리는 기법), 몰골沒骨(동양화에서, 윤곽선 없이 색채나 수묵을 사용하여 형태를 그리는 화법)이라는 기법의 테두리에서 미묘하고도 무수한 변화를 전개해서 다양하고 독특한 미의 세계를 꾸며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법은 '전통산수'의 이념과 오래 밀착되어서 그런 기법이 바로 '산수'의 관념과 일체화되는 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전통산수화를 정형산수定型山水라고 부르지요.

믈론 이 '산수' 기법도 명나라 이후에는 북종법北宗法, 남종법南宗法으로 해석되고, 남종에서는 전통적 문사들의 심의心意(마음과 뜻)를 위주로 하는 문인화文人畵(전문적인 직업 화가가 아닌 시인, 학자 등의 사대부 계층 사람들이 취미로 그린 그림)가 발달한 것은 모두들 아시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산수' 기법이 이 전시회에 전시된 19세기 후반의 조선화단을 지배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비록 문인 관념이  박약한 화원들이라도 그 기법을 쓰면 결과적으로 전통을 따르는 정형산수가 되고 맙니다.

말하자면 기법이 '산수'의 성질을 결정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산수에 눈이 익으면, 이 기법과 전통관념을 교란하는 요소가 별안간 투입되면 감상에 난조를 일으킵니다.

생각해보세요.

전통산수를 치고 그 곳에 넥타이를 맨 인물을 넣으면 '산수'의 기본개념이 흔들릴 것입니다.

전통산수에 있어서는 준법, 수법, 인물 기타가 한 셋트로 되어 있고, 그렇게 감상되던 까닭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여기 전시되어 있는 오원 장승업은 기량에서 드물게 보는 천재였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전통화가요 전통산수에 맞지 않는 인물을 넣지 않았습니다.

또 그래서 옛날의 어떤 계회도契會圖(문인들이 계 모임을 그린 그림)를 보면 전통산수의 배경에 현실적인 계회를 담아서 묘한 위화감을 자아내는 예가 있습니다.

이런 전통과 기법의 일체화는 물론 '산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산수'에 비하면 그 이념적 성격이 매우 약합니다만 그런대로 다른 그림, 가령 화조花鳥(꽃과 새), 절지折枝(꽃가지나 나뭇가지), 사군자四君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에도 나타나는 면이 있었습니다.

요컨대, 이러한 림의 주제와 기법의 역사적 일체화는 한번 그 이념적, 관념적 의의가 사라지고 새로운 미감이나 새로운 관념에 알맞은 기법이 새로 발전되지 않았을 때, 곧 과도기에는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번 전시회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화인畵人(화가)이 소치小癡 허유許維(또는 허련許鍊)(1809~1892)입니다.

그 분의 자서전인 ≪몽연록夢緣錄≫이라는 유고를 보면, 소치가 30대에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한 것은 전라도 해남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고택에 갔다가 명나라 때의 화보인 ≪고씨화보顧氏畵譜≫를 보고 그림을 익힌 다음이라고 합니다.

이 화보는 만력萬歷(중국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연호) 연대 고병顧炳이란 사람이 편찬한 것으로, 그야말로 중국 역대의 전통화법을 대가들의 이름 아래 모아 판각한 것입니다.

옛날 그림을 배우는 과정은 먼저 옛 중국 화가의 화보 그림이나, 고인古人(옛날 사람)의 그림을 임모臨摸(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제법 그림 솜씨를 익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전통 기법, 곧 준법, 수법, 암석, 토파로부터 몰골, 발묵 그리고 설채設彩(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하는 기법)를 익혔다는 것이 되며, 따라서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산수나 화조 따위는 저절로 전통적 정형을 따른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1991년, 이구열 씨의 글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라는 것이 일제가 장악한 이른바 이왕직李王職(일제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의 후원으로 설립됐는데 그곳에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 선생이 그림 공부를 하러 들어갔습니다.

이당의 ≪서화백년≫이란 회고록을 보니까, 그때 선생이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이것 가지고 공부해라"하고 내준 것이 ≪역대명공화보歷代名公畵譜≫, 이 책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명나라 ≪고씨화보≫의 정식 명칭입니다.

그러니까 이 <근대회화백년전>의 처음에 나오는 허소치도 ≪고씨화보≫요, 끝판 가까이 나오는 김이당도 ≪고씨화보≫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마 이분들은 전통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법)의 이념적 배경은 잘 모르면서 그 기법을 배웠고, 그 기법을 토대로 해서 한 분은 전통의 계승을, 또 한 분은 전통의 변화를 당시의 사정에 따라 모르는 사이에 실시하는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물론 전통그림이니까 바뀌어야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전통의 이념과 기법의 일체화라는 조건에서도 그림의 엄청난 다양성이 있었고 눈이 훈련됨에 따라 그 짜릿한 미감의 다색多色함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어디까지나 전통 이념과 기법의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전통문화와 가치관이 달라지고 전통 이념의 의미가 상실되면 그것은 졸지에 형식적인 정형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고 신선미를 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기는 이 <근대회화백년전>에 앞선 시대에 이런 중국에서 내려온 전통이 일시 깨질 뻔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시대였죠.

겸재는 팔도를 돌아다니며 사생하던 중에, 그리고 단원은 금강산 지역 등을 실사하면서 전통산수에 결박된 기법에서 빠져나오는 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 사경산수寫景山水 같은 것인데,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경實景(실제의 경치나 광경)은 이념산수는 아니니까 자연 실사實寫(실물, 실경, 실황 따위를 그림)와 자연풍경에 맞는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아마 이런 경향이 의식화되면서 조선시대에 새로운 풍경화의 전통이 생겼을지 모릅니.

오호라!

그러나 이러한 풍조는 그만 단절이 되고, 실사에 연결될 수 있는 풍경화의 새 개념은 일제강점기에 와서 밖에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애석한 일이죠.

 

하여간 이번 <근대회화백년전>의 전반은 전통회화의 시기인데, 흥미로운 점은 그 시기에 나오는 전통화가는 한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제자이거나 제자격이나 아니면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니다.

이를테면 허소치,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 형당蘅堂 유재소劉在韶(1829~1911), 대원군大院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 그랬고,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19세기)도 그 영향을 면치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완당은 그 당시 문인사회 뿐 아니라 예원藝苑(예림藝林: 예술가들의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나는 일찍이 <완당 바람>이란 글을 통해 당시 완당 취미에 맞는 문인화풍이 크게 유행한 것을 논한 바 있습니다.

아마 이 중에는 그 글을 읽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완당 취미가 어떤 것이냐?

앞서 말씀드린 허소치의 ≪몽연록≫ 이것은 ≪소치실록小癡實錄≫이라고도 합니다만, 거기에는 완당이 소치를 처음 대하면서 하는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소치가 윤공재 고택에서 ≪고씨화보≫로 그림을 익힌 것은 잘한 일이요, 공재는 조선에서 그림을 제대로, 곧 중국의 명가의 그림을 배워 익힌 사람이지만 신운神韻(고상하고 신비스러운 운치)이 모자라며, 그리고 정겸재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은 다만 눈이 어지럽고 볼 것이 없는 화가라고 혹평을 하였습니다.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완당은 가슴에 화권기畵卷氣 곧 문기文氣(글의 기운)가 있어서 그것이 그림에 자연히 투영되는 심의心意에 참 그림을, 그러니까 문인화를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던 모양이고, 따라서 진경 같은 것은 한낱 보잘 것 없는 천한 그림이요, 문기가 없으면 기술만 드러내 보이는 장기匠氣(장인 곧 전문가의 기운), 습기習氣(배우고 익혀 얻은 기운)라고 본 것 같습니다.

하기야 대단히 감상안의 범위가 넓었던 표암豹菴 강세姜世晃(1713~1791) 같은 사람도, 당시로는 선구적 성격을 띤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1710 또는 1738~1784?)의 <인왕산도仁王山圖>를 전통적인 기법으로 쓴 '지도地圖' 곧 실사라고 평하였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알아야 합니다.

본래 그림은 당시의 감상안만큼, 그리고 때로는 감상안에 맞추어 그리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전시장에 있습니다.

소위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라고 해서 완당의 품평을 받은 화가 여덟 명의 작품입니다.

나는 이 품평을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통해 초략만을 보았습니다만...

 

하여간 이번에 전시된 8폭이 ≪예림갑을록≫에 기재된 그림의 일부인 것이 틀림없다는데, 그것들을 잠깐만 보아도 모두 김완당을 의식하고 그렸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시다시피 완당은 이들 화인들에 비하면 지체도 높고 더구나 문명이 당시 국제사회의 중심이던 연경에까지 떨친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고, 또 그 감상안에 대하여도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는 제1인자로 꼽혔습니다.

이 그림들은 상상컨대 완당의 문제門弟(문하생門下生: 문하에서 배우는 제자)격인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알선으로 완당의 품평을 받으려는 모임에서 그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완당이 즐길 만한 방식과 기법 담묵에 때때로 갈필로 점잖고 심의가 있어 보이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여늬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1808~?)의 산수와도 다르고, 보통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과도 다르고, 모두 중국 청대淸代의 군소群小(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거나 잘 드러나지 않는 여러 개) 문인화 같습니다.

더구나 김북산은 이번 전시에 나온 다른 산수와도 화풍이 아주 다릅니다.

이 북산 그림은 ≪예림갑을록≫에서 완당이 말한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일 것인데, 전통산수 범위에 속하는 그림입니다.

완당은 북산의 이른바 '솔이지법率易之法'이라는 독특한, 간단하고 쉽게 보이는 그림은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북산 그림을 좋게 말할 때는 그런 법을 쓰지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직업화가의 맛이 있다는 의미에서 장기匠氣가 있는 것은 내려 깎고 있습니다.

천하다고 하는 것이죠.

물론 ≪예림갑을록≫에 참가한 화인들이 매번 이렇게 문인화 맛을 내는 담묵淡墨(묽은 먹물), 갈필(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기법) 등의 산수만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죠. ≪예림갑을록≫ 그림은 김완당을 의식하고 그 눈에 들도록 그렸다고.

그러면 이때만 그랬을까요?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눈물 나는 일이죠.

1922년 조선총독부라는 것이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 이른바 선전鮮展이라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그 동·서양의 의 심사위원은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10여 년 뒤에 한두 명의 조선화가가 동양화 부문에 심사원으로 끼었는데 일본인 눈에 자기네 일본화의 영향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이 된 김이당 같은 분이 영입됐습니다.

선전도록鮮展圖錄을 지금 보아도 참가하는 조선인 화가의 화풍이 전통산수도 있으나, 점차 일본화의 영향을 받고 또 일본심사원의 눈을 의식한 듯이 보이는 그림이 늘어갑니다.

원래 화가, 특히 직업적인 화가는 약합니다.

그림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지 않는 경우도 김완당의 인정을 받거나 대감들에게 소개되거나 또 일본인 심사원의 마음에 들어서 선전에 입상하고 특선이 되면 패트론 patron(후원자)도 생기고 그림도 팔리고 또 취직도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일종의 대세죠.

따라서 허소치의 경우에 보듯이 김완당의 눈에 들어서 소치는 많은 대감들의 사랑방에 출입하게 되고 급기야 헌종憲宗왕에 불려가 그림을 그리게 되어 유명해졌습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 전통화단의 큰 줄기였다면, 일제 손에 나라가 들어간 1910년 이후에는 일본풍이 들어오고, 일본에 건너가 새로 일본화풍을 익히고, 그것을 가미하는 것이 20세기 전반에 큰 줄기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그 여진히 상당히 지속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전통 산수는 완당바람으로 문기文氣 그득한 산수가 일시 주류가 되고, 일본시대로 오면 새로운 화풍이 자체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정치 사회의 세와 풍조에 긴밀히 연관되었다고나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겸재, 단원의 진경산수, 사경산수만 하더라도 영·정시대의 시정인市井人(일반인)의 치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왕가王價의 안목과 수요가 으뜸입니다만 다음에는 새로 일어나는 민가民家의 수요가 있었습니다.

서민은 이른바 화권기畵券氣(문기文氣: 글의 기운) 많은 사인士人(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과는 다르고 이념산수라는 철학적 전통을 알리 없으니까 현실적으로 눈앞에 있는 풍경이나 유명한 금강산 그림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순조 때 이후로는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 말해주듯 나라도 혼란해지고 국력도 오무라드는 때에 거기에 사인 간에 새로운 중국 청조淸朝의 인텔리 취미가 들어온 것이죠.

일제시대에 오면 나라를 빼앗겼으니 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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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9. 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