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4: 중세 전성기 사회의 유동성 및 불평등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4: 중세 전성기 사회의 유동성 및 불평등
새샘 2023. 9. 10. 07:13
중세 전성기의 늘어난 부는 유럽의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
10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사회를 '일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전투하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1300년에 이르면 그런 표현은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서유럽의 신흥 도시에는 새로운 상인 엘리트와 전문직 엘리트가 등장했다.
1300년 무렵 유럽 사회의 가장 부유한 구성원은 귀족이 아니라 상인과 금융업자였다.
대귀족 가문은 짐짓 상업을 경멸하는 체했다.
그러나 귀족은 '타산적인 사람들'을 멸시하면서도 점점 상업의 세계로 글려들어갔다.
물론 귀족은 전투를 수행했다. 하지만 기사, 도시민 십자궁수, 농민 장궁수, 시민군, 농민 징집병 등도 전투에 참가했다.
노동 역시 더욱 복잡해졌다.
1300년에 이르러 잉글랜드 농민의 절반은 가족 부양이 불가능할 정도로 경작 면적이 협소했다.
농민은 농사짓기, 임금노동, 사냥, 채취, 구호금 따위에 의지해 살아남았고 때로는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도시와 시골 사이의 격차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시골 사람은 도시로, 도시 주민은 시롤로 자유롭게 이동했다.
온갖 종류의 학교가 등장했고 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들—법률가, 의사, 토지 관리인, 서기, 정부 관료 등—은 대거 신흥 전문가 계층을 형성했다.
그 결과 유럽 사회를 일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전투하는 사람의 세 신분으로 구분해서 말하기란 한층 더 어려워졌다.
부의 증대는 유럽 사회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회는 좀 더 유연해졌다.
하찮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고 부자를 가난뱅이로 끌어내리는 '운명의 수레바퀴' 이미지는 중세 전성기 유럽인이 죻아하던 표상이었는데,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난파, 화물 도난, 투자 실패, 또는 정치적 계산착오 등은 가장 부유한 가문과 가장 강력한 가문마저도 파멸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가난한 사람은 능력과 행운만 있다면 때로 최고의 지위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다.
특히 교회의 경우 능력 있는 사람에게 출셋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국왕에 대한 봉사는 사회적 지위 상승의 또 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사람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는 고향인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 시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지만, 1302년 피렌체에서 종신 추방당했다.
그는 추방 중에 쓴 그의 위대한 서사시에서 "남의 손에 있는 빵 부스러기를 맛보는 것이 얼마나 쓰라린 일인지"를 묘사했다.
○귀족과 기사
새로운 부는 사회적 유동성을 초래했지만, 동시에 귀족계급 내부에 한층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를 형성했다.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 시대(751~843) 귀족계급은 가문 간 통혼하는 소수의 전통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10세기와 11세기를 거치면서 신흥 가문이 기반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권력과 부에서 옛 카롤링거 귀족에게 밀리지 않았고 때론 능가했다.
이들 신흥 가문은 카롤링거 왕조를 섬기던 관리의 후손으로, 카롤링거 왕조가 몰락한 틈을 타 독립성을 확보했다.
다른 가문들은 약탈자였다.
그들의 권력은 성城, 기사, 장원 등에 대한 지배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카롤링거 귀족 가문은 신흥 가문이 귀족의 계급과 지위를 주장하는 것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새로운 귀족계급이 서유럽에 출현했다.
신흥 귀족 가문에는 새롭게 떠오른 백작, 성주, 기사 등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작, 백작, 성주城主(성채 소유자), 기사 사이에 한층 더 세밀한 계급 구분이 이루어졌다.
11세기의 기사는 반드시 귀족은 아니었다.
기사는 오히려 다양한 계층 출신 남성으로 이루어지 사회집단이었다.
11세기의 일부 기사들은 대귀족의 아들이었지만, 다른 기사들은 말을 타고 칼로 무장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다.
기사는 하나의 전문화된 전사집단으로서 귀족계급과 결합하면서 어느 정도 사회적 위신을 얻게 되었다.
기사가 귀족계급으로 격상된 것은 12세기와 13세기의 일이었는데, 그것은 중세 유럽 사회의 부의 증대와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기사의 각종 정비에 소요되는 비용이 상승하자, 13세기 중반에는 기사가 필요로 했던 말, 칼, 갑옷 등을 장만할 여력을 가진 남성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기사에게 기대되는 가정생활 수준 또한 고급스러워지고 많은 비용이 들었다.
1100년의 기사는 한 벌의 모직 겉옷, 말 두 필, 말구종 한 명만 있으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250년의 기사는 여러 필의 말, 비단 옷, 여러 명의 하인과 종자와 말구종을 필요로 했다.
이런 사치스런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기사는 주군에게 상당 액수의 연봉을 받거나 1,200에이커 acre(1에이커=4,047㎡=1,224평) 이상의 넓은 토지를 보유해야 했다.
에이커당 지대를 4펜스 pence(단수는 페니 penny, 1 파운드=100펜스, 현재 환율로 영국 1페니=17원)로 정할 경우 1,200에이커에서는 매년 20파운드 pound(현재 환율로 영국 1 GBP( British pound sterling 파운드 스털링)=1,666원)의 지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는데, 연간 20파운드는 13세기 잉글랜드에서 한 남성이 기사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당시 임금과 비교하면, 하루에 2펜스의 임금을 받는 평범한 노동자의 1년 소득이 1~2파운드 정도였다.
○기사도와 궁정의 사랑
기사 신분을 유지하는 비용이 늘어나자 기사의 사회적 위신 또한 올라갔다.
12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왕과 귀족은 '기사도 chivalry'로 알려진 기사의 행동규범을 신봉하고 장려했다.
그것은 용기, 충성심, 관대함, 무기 다루는 실력, 그리고 참된 귀족의 필수 자질인 예법 등을 강조했다.
'기사도'란 말 그대로 '마술馬術'이었고, 전쟁터나 마상경기에서 말을 타고 하는 싸움은 그 후 오랜 세월 유럽 귀족계급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요소로 남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기사도는 서유럽의 기사와 귀족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회적 이데올로기 ideologie(관념 형태: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를 말하며, 역사적·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세 전성기에 재력이나 권력 면에서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집단들—상인, 법률가, 기술공, 부유한 자유농민 등—가 구별 짓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귀족계급은 귀족 조상의 후예라는 사실을 사회적 지위의 핵심 요소로 강조했다.
하지만 사회적 유동성이 큰 중세 전성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귀족적인 삶을 영위하는 많은 가문들이 실제로는 자랑스러운 선조를 갖지 못했고, 반면 그런 조상을 둔 유서 깊은 가문들은 귀족적인 생활방식을 영위할 만한 재력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면 귀족계급의 성립 근거는 무엇인가?
출생과 더불어 부여받은 고귀한 지위인가, 아니면 개인적 성취의 결과물인가?
기사도를 기반으로 한 기사계급과 귀족계급의 결합은 양쪽 모두에게 유리했다.
그것은 전통 귀족 가문으로 하여금 그들의 혈통 속에 미덕이 내재하면, 기사도적인 가치는 귀족 부모 아래 태어난 자들에게서 가장 빈번히 발견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한편 (기사다운 언어와 관습을 습득한 상인이나 법률가를 포함한) 기사들에게, 기사도는 자신이 충성, 용맹, 실력 등으로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기사도는 처음에는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진) 기사계급의 가치 체계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에 이르면 기사도는 귀족(또는 귀족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과 구별하는 기능을 갖는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런 사회적 구분은 기사만이 기사도적 행동규범을 독점하는 공간인 전쟁터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기사도는 기사에게 상대측 기사를 정중하게 존경심을 갖고 대할 것을 요구했다.
기사를 포로로 잡을 경우 그를 죽이기보다는 몸값을 받아야 했고, 몸값을 지불하겠노라는 포로의 말—그의 맹세—을 신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절제와 유보는 평민 병사, 시민군, 궁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기사도적 전쟁 규범에 따르면 기사는 그들을 임의로 살육할 수 없었다.
적이 기사가 아니라면 몸값을 받기 위해 포로로 잡아둘 필요도 없었다.
기사도 이데올로기와 긴밀히 관계된 것으로 귀족 여성이 기사 애인의 경배 대상이 되는 이른바 '궁정의 사랑 courtly love'이 있었다.
물론 여기에도 사회적 지위라고 하는 중대한 요인이 개입되어 있었다.
궁정의 사랑은 '세련된 사랑'이었고, '예의 바른 courteous' 사랑은 왕이나 귀족의 궁정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정의 사랑은 귀족 여성(그녀만이 세련된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적절한 예법, 시, 영웅적 행동을 통해서만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과 농민 여성(궁정 예절 courtliness을 베풀 가치가 없는 여성)을 확연히 구별한다.
귀족 여성은 그녀에게 '구애 court'함으로써 그 사랑을 얻어낼 수 있지만, 농민 여성은 귀족 남성의 욕망에 따라 강제로 소유할 수 있었다.
궁정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얼마만큼이나 귀족 남성의 귀족 여성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 질문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논란에 휩싸여 있다.
하나는 궁정의 사랑에 관해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의 대부분이 문학 형식이고, 역사가들은 문학이 얼마나 정확히 삶을 반영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여성을 받침대 위에 올려주는 것 그 자체가 (비록 부드러운 것이기는 하나) 여성의 선택을 구속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문학적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문학에서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중반에 들어 귀족 여성은 갑자기 서정시인과 로망스 romance(로맨스, 낭만浪漫: '사랑에 관련된' 또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작가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궁정의 사랑을 다룬 문학은 비록 이상주의적이고 다소 인위적인 면도 있지만, 과거에 비해 상층계급 여성에게 정중한 태도를 갖게 된 귀족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2세기와 13세기의 일부 왕족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의 유고시에 사실상 국가를 맡아 통치했다.
우라카 여왕 Queen Urraca은 1109년부터 1126년까지 사망할 때까지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 León-Castilla(영어: León-Castile) Unitied Kingdom을 통치했다.
헨리 2세 Henry II의 불굴의 왕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Eleanor of Aquitaine(1122?~1204)는 아들인 리처드 1세 Richard I(사자심왕獅子心王 the Lionheart)가 1190년부터 1194년까지 십자군에 참전한 기간 동안 잉글랜드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카스티야의 블랑슈 Blanda de Castilla(1188~1252)는 13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서 프랑스를 지극히 훌륭하게 다스렸다.
즉, 한 번은 아들인 루이 9세 Louis IX가 아직 어렸을 때, 그리고 도 한번은 아들이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였다.
물론 왕비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을 아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 전성기 귀족 여성은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 중세 전성기는 상류계급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시기였다.
그와 같은 사정을 보여 주는 가장 상징적인 예는 체스 chess(서양장기) 게임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 이전까지 체스 게임은 이슬람 세계에서만 행해졌는데 그곳에서 여왕에 상응하는 말(마馬)은 왕의 신하인 남성이었고 한 번에 한 칸씩만 대각선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 유럽에서 이 말은 여왕으로 바뀌었고, 중세가 끝나기 전에 여왕은 장기판 모든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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