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3. 19세기 후반의 중국화 본문
그러면 19세기 전반을 지배하던 전통산수와 기타의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술)는 중국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중국은 1840년에 소위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s(청나라와 대영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1차 1840~1842, 2차 1856~1860)이 일어나서 중국은 현실적으로 서양세력에 굴복하였고, 1850년에는 내전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또는 태평천국운동)(1850~1864)이 일어나서, 10여 년 동안 나라가 소란하고 그 영향이 조선사회에까지 ㅇ미쳤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은 서양의 이른바 근대사상을 휩쓸려 들어가게 되는데,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사상은 곧 개성적인 것이 가치 기준의 전면에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은 모르는 사이에 개성이 나오게 마련이고, 한 나라의 그림은 부지불식간에 그 나라의 특성이, 다시 말해서 향토적 특성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개성이 거기에 있다는 것과 그 개성적인 것을 개성미로서 제일로 꼽는다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서양미술사에서 16세기의 고전시대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을 흉내내려고 했고, 명明나라(1368~1644) 초에는 송宋나라(960~1279)와 원元나라(1271~1368)작품을 모방한 점에서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개성주의가 들어오면서 중국 그림의 맥락을 새로이 보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통산수의 정형성定型性(일정한 형식이나 틀)과 그것에 따른 기법이 매력을 잃게 됩니다.
명나라만 해도 별안간 진순陳淳(1483~1544)이나 서위徐渭(1521~1593) 같은 이색적인 화가가, 특히 그들의 화훼花卉(화초花草)가 주목되고, 개성이 넘치는 명나라 유민인 팔대산인八大山人(1623?~1705)과 석도石濤(1642~1707)가 주목됩니다.
그리고 청淸나라(1616~1912)의 이른바 건륭乾隆 연간年間(1735~1796) 양주팔괴揚州八怪라는, 그 당시 정통이라던 화법과는 아주 다른 것을 구사한 화가군이 이목을 끌게 됩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석도 같이 산수로 이름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산수라는 것은 명나라 유민의 심의心意(마음과 뜻)도 담으면서 개성적으로 독특한, 따라서 기법도 독자적인 산수를 쳤습니다.
이같이 산수가 주가 되는 사람은 오히려 예외고 다른 사람들은 전통에서 벗어나기 쉬운 꽃, 새, 인물, 기타 신변의 물건을 개성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화단의 새바람이 해상海上, 곧 지금의 상해上海(상하이 Shanghai)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위장渭長 임웅任熊(1823~1857)과 부장阜長 임훈任薰(1835~1893) 형제, 백년伯年 임이任頤(1840~1896) 같은 사람, 이 뒤를 이어서 창석昌碩 오준경吳俊卿(1844~1927), 일정一亭 왕진王震(1866~1938) 같은 청나라 말기 사람이 출현합니다.이런 흐름의 한가닥이 우리에게 일찍 들어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양주팔괴 중 막내격이 되는 화인이 양봉兩峯 나빙羅聘(1733~1799)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동심冬心 금농金農(1687~1763)의 제자 격으로 금농의 매화를 이었으며, 그것을 다시 아들인 철연도인鐵硯道人이 본받아 청말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나빙이 청나라 수도였던 북경에 와 있을 때 조선 사신, 그것도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 같은 사검서四檢書의 한 사람이요 시화서 삼절의 인물과 접촉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빙은 한국의 묵객 등과 알게 되어 그의 유묵이 제법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특히 나빙은 박제가에게 경복敬服(존경하여 복종하거나 감복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복한 증거가 사신에게 준 화시첩畵詩帖(시화첩: 그림과 시를 함께 넣어 만든 책)에 나와 있습니다.
또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가지고 온 나빙이 그린 <노송도老松圖>도 있고, 나빙의 시고詩稿(시의 원고)도 남았습니다.
그전부터 박제가의 그림이라는 <연평초령의모도延平髫齡依母圖>는 과연 박제가의 그림이냐 아니냐 하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말이 많았는데, 나는 그 그림이 나빙의 붓이 들어가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하여튼 나빙이 박제가와는 절친했던 것 같습니다.
이 나빙의 산수는 아주 풍경화적, 그러니까 전통산수와 다른 사경적寫景的(사실적으로 주변 풍경을 그린 사경산수화)이고 기법도 달랐습니다.
아마 완당 김정희가 나빙을 만나서 그의 신변의 사경화를 보았더라면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오호라! 그 때 나빙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하여튼 이 나빙의 새 맛은 결국 조선에 퍼지지 못하고 다만 매화 그림, 홍백매의 일단이 우봉又峰 조희룡熙龍(1789~1866) 그리고 여기 전시된 균정筠廷 오경림吳慶林(1835~?)의 백매에 나타나 있습니다.
임이, 오준경, 왕진의 시대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청나라 말기인데 이때는 서양화도 충분히 알려진 때며, 개성이 강하게 표현되어 전과는 다른 필치로 주로 화훼,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바로 이때 그 당시에 조선의 세도가였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 홍삼 전매권을 가지고 상해에 자주 드나들고 또 오래 체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죽영竹英 포화蒲華(1834~1911) 등 당시 청나라의 새로운 그림의 일파와 매일같이 만나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약간의 시일이 흐르면 늦게나마 새 조류가 조선에 들어옴직하였고, 또 민씨 집안에 자주 드나들던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그림에는 편린이나마 희미하게 그 영향이 산수아닌 그림에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물결이 들어오기에 정치가 문을 가로막았다고 할까요.
그만 일본 세력이 한중의 교류를 끊어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 계통의 화훼를 그린 거의 유일한 분인 구룡산인九龍山人(또는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1878~1968)도, 비록 젊었을 때 중국에 갔었다고 하지만, 정말 중국맛을 낸 것은 서울에 왔던 왕일정王一亭에게 배운 탓이라라는 것이 정평이었는데, 그 왕일정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고 일본에 갔다 일본인의 연줄로 서울에 온 것뿐입니다.
김용진의 그림은 말년 것을 치지 않고 50~60대를 치는데 그때 그림 중에는 중국 풍미가 있어서 어느 의미에서는 이 <근대회화백년전>의 고도孤島 같은 면도 있습니다.
요컨대 북경에 사신으로 간 사람은 강남의 신풍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민영익이 상해로 간 덕에 청 말기의 새로운 그림 풍조에 접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영익이나 그 집안을 통해 새로운 중국 그림도 일부 들여왔습니다만, 반대로 조선의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4 이후),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 같은 사람의 선작善作(선정된 좋은 작품)을 중국에 가지고 가서 그 곳의 화인, 묵객의 제찬題贊(화제畵題: 그림에 써넣은 시를 비롯한 각종 글귀)을 받아왔는데 그런 것이 지금도 종종 눈에 띕니다.
하여간 중국 전통화는 새로 개성적 화훼, 인무을 중심으로 탈바꿈하고 현대에 오면 유명한 백석白石 제황齊璜(1863~1957)이 나오죠.
물론 제황 외에도 새로운 산수를 낸 빈홍賓虹 황질黃質(1864~1955), 양화에서 변신한 서비홍徐悲鴻(1895~1953)의 말, 대천大千 장원張爰(1899~1983), 후도인朽道人 진형각陳衡恪(1876~1923) 등 중국의 산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돌았으니 이미 정형산수는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중국 전통산수화의 움직임은 우리보다 5, 60년 정도 큰 변화가 먼저 왔습니다만 그전과 달라 국제정치로 인해서 그 풍조가 조선 화단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앞서도 누누히 말씀드렸듯이 조선은 19세기 말까지의 주류는 전통기법, 산수는 전통산수, 그것도 높이 평가되는 것은 완당류의 감상안이 통하는 문기文氣 고담古淡한(글 기운이 풍기면서 예스럽고 맑은 느낌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런 그림은 사실은 감상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첫째로 선묘의 고담한 맛을 알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필치, 필법, 그리고 먹의 성질, 종이, 비단의 성질을 잘 알아야 되고, 더구나 심의心意 표현의 전통에 익어야 합니다.
본래 자연의 묘사도 아니고, 고도의 문화를 등에 진 그림은 많이 보고 눈에 익히고 그 배경을 알지 못하면 감상이 어렵습니다.
가령 완당의 난초나 또는 걸작이라는 <세한도歲寒圖>는 그 붓 돌아가는 묘미를 모르면 첫째 맛을 모를 것입니다.
또 여기 전시에 나와 있는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는 그 고담하고 독필禿筆(몽당붓: 끝이 거의 다 닳아서 없어진 붓), 갈필渴筆(빳빳한 털로 만든 붓)로 맛을 낸 심의心意 표현의 전통을 모르면 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화가 있습니다.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1892)이 처음 완당을 뵈었을 때 이런 것을 보고 배우라고 빌려준 화첩이 중국 청나라의 왕잠王岑(1778년 무렵 활동)의 것이었답니다.
나는 솔직히 왕잠의 그림을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기록에 보면 그 화가는 전통 산수화가인 존고尊古 황정黃鼎(1660~1730)의 제자로 담묵으로 문기 있는 필록을 구사했다고 하는데, 상상컨대 아마 이 전시에 나와 있는 고람 전기나 형당蘅堂 유재소劉在韶(1829~1911)의 편화산수 같은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허련 것으로 완당이 좋아했던 것이 그런 것이고, 또 헌종 임금에게 올렸다는 화첩을 여러 해 전 광주에서 본 일이 있는데 역시 이러한 담묵문기淡墨文氣(묽은 먹물에서 풍기는 글 기운)가 감돌고, 단아하고(단정하고 아담한) 담채淡彩(엷은 채색)한 그림이었던 까닭입니다.
물론 이런 완당류의 고담하고 단아한 그림 맛만이 있었을 수도 없고 또 색다른 별취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예 화원들이 완당 같은 대문인의 식견과 취미로 그림을 그리려는 것도 말이 안되고, 또 한편 뒤에 나오는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 같이 시대의 흐름을 뛰어넘는 이색분자도 있었고, 민영익이나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위창 오세창의 아버지) 등이 가지고 온 중국 그림에 자기의 천분天分(타고난 재질이나 직분)의 새맛을 가미한 장승업도 있었습니다마는 하여간 한 두 사람을 제외하면 역시 전통기법, 전통산수에 잡혀있던 것이 일본 세력이 들어올 때까지의 조선 후기 화단의 실정이었습니다.
완당의 영향력은 대원군에게까지 미치고 있었으며, 완당이 귀양가 있었을 때도 서울의 임금은 완당 글씨를 받아다가 궁의 나무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에 사용했습니다.
더구나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1783~1859) 같은 영상領相(영의정)을 위시해서 위당威堂 신헌申櫶(1810~1884),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 당대 세가世家(세족世族: 여러 대를 계속하여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맡아 오거나 특권을 누려 오는 집안)와 식자識者(학식 있는 사람)들이 완당의 식견과 감식안에 탄복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완당은 전통문인화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예술가로서는 고독했습니다.
완당의 글씨는 유명해서 신위, 조희룡, 허련 등 여러 사람들이 모방하였으나 결국 그 맥이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완당의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또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인 서예書藝의 전통에서 볼 때 완당 글씨는 이단이라는 것인데, 요컨대 너무 개성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2. 9.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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