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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동이족인가

새샘 2023. 9. 12. 10:57

공자 전신상(사진 출처-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C%9E%90)

 

동이東夷는 원래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안에서 사용한 명칭이다.

동이족은 주周나라(서주西周: 서기전 1046~서기전 771) 건국 직후 상商나라(서기전 1600 무렵~서기전 1046무렵) 사람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서기전 770~서기전 221)를 거치면서는 산둥반도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통일을 이룬 진한秦漢시대[진(서기전 221~서기전 206)과 한漢(서한西漢~동한東漢: 서기전 206~서기 220)]에는 바다 건너 고구려, 부여, 옥저 등 한반도와 북방의 만주족을 통칭해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라는 명칭의 등장과 그 의미 변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중국 문명의 발달 과정, 그리고 서해를 둘러싼 몇천 년 동안의 문화교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근대 이후 제국주의의 발흥과 중화사관中華史觀(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란 뜻으로, 중국인이 자기 나라를 이르는 말)의 팽창으로 인해 동이족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미루어진 채, 현대 국가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동이족의 의미를 해석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친근하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동이족을 둘러싼 여러 나라의 동상이몽과 그 실체를 살펴보자.

 

 

○제국주의로 촉발된 중국의 동이족 사랑

 

중국에서 동이족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 일군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중국사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국립타이완대학 총장을 역임한 푸쓰녠(전사년傳斯年)이 그 대표 주자로 그는 중화 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을 제창했다.

'이夷'는 상나라의 동이족, '하夏'는 하夏나라의 화하족華夏族(중국 한족漢族의 원류가 되는 민족)을 말한다.

중국 최총의 국가인 하나라는 지금의 산서(산서山西) 지역으로 채색무늬토기를 쓰는 신석기시대 양사오(앙소仰韶)문화에서 기원했으며, 뒤이은 상나라는 산둥(산동山東) 지역으로 흑색의 토기를 쓰는 룽산(용산龍山)문화에서 기원했다고 푸쓰녠은 설명한다.

한마디로 중화 문명은 동과 서 양쪽에서 이원 체제로 기원했다는 의미다.

 

이는 서양 학계에서 주장하던 중국 문명의 서방전래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서양학자들은 미개한 중국인들이 스스로 문명을 만들 리 없으며 중국 문명은 근동 지역 문명의 수혜를 받아 탄생했다는 극단적 전파론을 주장했다.

게다가 스웨덴의 고고학자이자 지질학자인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 Johan Gunnar Anersson이 1920년대에 양사오 유적지에서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토기와 너무나 비슷한 채색무늬토기를 발굴하면서 중국 문명의 서방전래설이 더욱 확실해지는 듯했다.

그러자 푸쓰녠이 이하동서설을 들고 나와 산둥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의 토착 문화를 강조한 것이다.

이하동서설은 제국주의를 합리화할 수 있는 서방전래설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지, 우리나라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의 동이족 역사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푸쓰녠의 동이족에 대한 생각도 진화했다.

만주 지역은 고조선 성립 이래 전통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만주족에 세운 청淸나라(1616~1912) 300년 동안에는 만주족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었다.

어떤 경우든 중원의 한漢족이 만주 지역을 자신의 역사로 주장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푸쓰녠을 비롯한 중국의 열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비분강개하여 만주가 태고부터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폈다.

푸쓰녠은 자신의 저서 ≪동북통사東北通史≫에서 상나라부터 만주와 한반도까지 모두 '동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이 모든 곳이 중원에서 발흥한 역사라고 견강부회했다.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사를 동원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동이족에 대한 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들어 푸쓰녠의 학설은 동북공정 제창과 함께 다시 등장해 만주 일대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재편하려는 중국의 팽창주의 사관에 이용되고 있다.

 

 

○고고학이 밝혀낸 공자의 착각

 

중국의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공자孔子(서기전 551~서기전 479)는 70세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16세의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사마천司馬遷(서기전 145무렵~서기전 86무렵)≪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는 어릴 적부터 제사그릇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가 무녀였다고 주장한다.

무녀의 역할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니 공자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그 모습을 보았고, 이를 흉내내며 놀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혼자서 공자를 키웠으니 이런 주장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어머니가 무녀인지와는 별개로 공자가 제사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살았던 춘추시대 귀족들의 장례와 제사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얻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춘추시대 귀족들의 무덤에서 다양한 제사 용기나 편종編鐘(아악기의 하나로, 두 층의 걸이가 있는 틀에 12율의 순서로 조율된 종을 한 단에 여덟 개씩 달아 망치로 치는 타악기) 같은 악기가 함께 발견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다.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탄압하는 시대를 벗어나 인간 본연의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휴머니즘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자의 입장에서는 원시시대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허례허식이 없이 평소에 질그릇으로 먹고 마시던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중국 고대사 전문가 로타르 폰 팔켄하우젠 Lothar von Falkenhausen은 자신의 저서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심재훈 옮김, 세창출판사 2011)에서 고고학에 기초하여 공자시대를 재구성했다.

그에 따르면 공자가 이상향으로 여기던 요순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엄격하고 올바른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진 상나라와 서주 초기에도 공자가 얘기하는 제사 규칙을 지킨 무덤이나 제사터는 없었다.

공자가 회복하고자 했던 의례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금 보면 공자가 살던 때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과거인, 서기전 850년부터 정립되었다고 팔켄하우젠은 주장한다.

공자가 시대를 잘못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 중국인들의 상례尙禮(예법을 중히 여기고 숭상함)는 엄격한 제사가 중심이었다.

공자 역시 조상에게 예를 갖추고 제사 지내는 것을 사회의 기초 질서로 보았다.

반대로 예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오랑캐로 매도되었다.

상류 계층에서 조상의 존재는 귀족사회 체계를 유지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공자가 살던 시절의 수많은 무덤에서 발굴된 다양한 청동기는 당시 사회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말주초商末周初 시기 제사 전통은 공자의 생각과는 달리 사실상 상나라의 것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공자는 왜 동이족에게 칼을 뽑았을까

 

공자의 삶은 자신의 미천한 출신과 개인적인 경험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공자가 동이족이기 때문에 한국인이란 주장이 인터넷상에 유포되었다.

공자가 동이족이란 주요 근거는 공자가 죽기 직전 자신의 빈소가 상나라 식으로 차려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출생 자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그가 동이족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공자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자는 아버지 무덤의 위치조차 몰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합장을 하기 위해 아버지의 무덤을 수소문했고, 무덤을 지키던 할머니가 위치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제야 공자는 정식 부부도 아닌 두 사람을 합장할 수 있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공자의 출신을 거론해 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가 결코 없다.

공자를 혈연적으로 동이족이라고 보는 전제 자체가 처음부터 문제가 있음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조선시대 화가 김진여가 그린 협곡회제(사진 출처-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6136)

혈연적인 계통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공자가 동이족의 관습과 문화를 금기시했다는 점이다.

'협곡회제夾谷會齊'라 불리는 고사가 있다.

노魯나라(서기전 1046년 서주의 제후국으로 건국되어 전국시대인 서기전 256년 초楚나라에게 멸망)는 정공定公 10년(서기전 500년)에 앙숙으로 지내던 산둥반도의 강력한 제후국인 제齊나라(서기전 1046년 서주의 제후국으로 건국되어 전국시대인 서기전 221년 진秦나라에게 멸망)와 협곡에서 회담을 하게 되었다.

노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열린 회담에 공자도 노나라 대표원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회담 전 행사에서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제나라가 데려온 이 악사들은 래인萊人으로 산둥반도 바닷가에 사는 동이족의 일파였다.

공자는 군자들의 모임에 동이족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분개하며 칼을 뽑아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 춤을 추는 광대들의 손발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이 고사는 두 나라의 외교에서 소국인 노나라가 대국인 제나라의 기선을 제압한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로 주로 소개되지만, 한편으로 동이족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불쌍한 광대들의 손발을 자른 공자의 행동에서 공자가 동이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공자가 동이족이고 더 나아가 한국인이라는 설은 사실 지나가는 수많은 해프닝 중 하나로 끝날 수준의 이야기였지만 중국과 타이완의 인터넷에 퍼져 곡해되고 침소봉대되면서 중국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이 전세계의 대학들에 중국 연구소를 세우면서 이름을 '공자학원'이라고 붙일 정도로 공자를 신성시하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반응은 이미 학문의 차원을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공자의 동이족 논란은 제대로 된 학문적 연구 영역은 사라지고 현대 국가들 간 갈등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동이처럼 중국에 의해 오랑캐로 치부된 사람들에 대한 역사 기록은 대부분 단편적이고 그 내용도 중국인의 편견으로 쓰인 것이 많아서 본래의 모습을 알기가 너무나 어렵다.

중원의 남쪽인 양쯔강(장강長江) 유역도 마찬가지다.

양쯔강 유역에는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 초나라와 '오월동주吳越同舟'로 유명한 오나라, 월나라 등이 있었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이들은 미개한 야만인이라며 멸시하는 투로 쓰여 있다,

하지만 정작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해보니, 초나라와 오월 지역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같은 시기 중원보다 훨씬 우수했다.

무덤의 규모나 유물로 보아도 결코 중원에 뒤처지지 않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양쯔강 일대의 경우 중원이나 네이멍(내몽골, 내몽고內蒙古)의 홍산紅山문화(서기전 4700년 무렵~서기전 2900년 무렵)보다 더 발달한 성터를 만들고 옥기를 사용한 신석기시대 량주문화(량저良渚문화: 서기전 3400년 무렵~서기전 2250년 무렵)가 등장했다.

한편 중국 서남쪽의 쓰촨(사천四川) 지역에서는 상나라와 같은 시기에 중국에 못지않은 사람만 한 크기의 신상神像(받드는 신의 조각상)을 청동기로 만들고 고도로 정제된 옥을 만든 문명인 싼싱두이(삼성퇴三星堆)문화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밝혀진 문명들은 역사에 전혀 기록된 바가 없거나 미개한 오랑캐로 치부되던 것이다.

고고학 자료를 통해 역사 기록의 한계를 돌파한 좋은 예들이라 할 수 있다.

 

 

○동이족과 한중 문화교류

 

다시 산둥 지역의 동이족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동이족을 둘러싼 혼란이 가중된 또 다른 원인은 바로 동이족 개념이 점진적으로 변화한 데 있다.

한반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던 춘추시대(서기전 770~서기전 403)에 중국인들은 산둥반도 지역을 동쪽 끝으로 인식했고, 그 지역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쪽의 오랑캐 즉 동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산둥반도 지역 사람들은 신석기시대부터 한나라가 통일하기 전까지의 자신들의 고대문화를 '동이족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산둥반도 전체가 중국의 땅이 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미 자신들의 땅이 된 이상 산둥반도 지역의 사람들을 더이상은 오랑캐라고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무제와 고조선의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 이때부터 중국인들의 지리 관념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 넓어지게 된다.

그 결과 '동쪽의 오랑캐' 동이족은 산둥반도를 포함해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한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동이'는 고조선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예맥족으로 통칭되는 사람들, 한반도 남쪽 지역의 삼한으로 불린 마한·진한·변한,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 청나라와 금나라를 건국한 선조인 읍루, 숙신, 말갈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야말로 한반도와 그 주변 전체를 포괄하는 큰 개념이다.

 

지명과 민족의 개념 변화는 전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서양인=미국인'이라고 오해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가 접한 서양인이 대부분 미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동이족 역시 그렇다.

'동이족'이란 이름 하나를 들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이분법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 이름이 등장하는 앞뒤의 사정과 함께 발견되는 유물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그 구체적인 실체를 알 수 있다.

 

동이족 개념이 산둥반도에서 한반도로 확장된 배경에는 또다른 원인이 있다.

선사시대 이래로 서해를 끼고 있는 산둥반도와 만주, 한반도는 서로 인적·물적으로 정말 많은 교류가 있었다.

약 6000년 전부터 산둥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가 랴오둥반도 일대에서 발견되고, 한반도에서 주로 보이는 빗살무늬토기가 산둥반도에서도 발견된다.

 

협곡회제 고사에서 공자의 칼에 봉변을 당한 래인은 산둥반도와 랴우둥반도 사이 바다를 끼고 어로에 종사하며 고조선과 교류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조선의 특산품인 모피를 수입하기도 했다.

이는 모두 고고학 자료로도 증명되었다.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안가에 만주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고인돌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고조선 시기에는 비파형동검과 관련된 청동기들도 흔히 발견된다.

랴우둥반도에서도 4000년 전부터 산둥반도의 주민들이 살면서 무덤을 만들었던 유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사실 서해를 둘러싼 이 지역들 간의 교류는 지리적 조건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북 완주 상림리 출토 중국식 동검. 서해를 둘러싼 한중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때로는 단순한 교류를 넘어 실제로 사람들이 이주하기도 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즈음에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과 그 일파가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으로 이동한 증거가 있다.

전라북도 완주 상림리에서 출토된, 한데 묶여 있던 중국식 동검 26점이다.

2014년 국립전주박물관의 도움으로 직접 이 동검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사용 흔적이 거의 없는 새 제품이었다.

이 중국식 동검은 산둥지역의 청동기 기술자가 진시황의 박해를 피해 한반도로 이주해와 남긴 것이다.

 

이렇듯 동이족 개념의 확장에는 중국의 통일과 함께 서해를 둘러싼 몇천 년 동안에 걸친 한중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동이'라는 이름을 중국의 산둥반도를 들어 중국사로 규정하거나, 반대로 한나라 이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동이전'을 들어 한국사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고대사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찬 중국인이 '동이' 개념에 매달려 현대의 관점에까지 고집스럽게 적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역사는 그것이 쓰인 시대와 정보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동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가르려는 지금의 사람들이다.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하되, 대신 중국인이 만들어낸 선입견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들이 중원 이외 지역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동쪽 미지의 땅을 대표하는 단어가 된 동이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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