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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8 - 굴피나무

새샘 2024. 5. 8. 17:17

가래나무과 굴피나무속에 속하는 굴피나무의 학명은 플라티카리아 스트로빌라세아 Platycarya strobilacea, 영어는 cone-fruit platycarya(솔방울 굴피나무), 중국어 한자는 필율향必栗香 또는 화향수化香樹다.

 

갈잎 큰키나무(높이 5~15미터)인 굴피나무는 중남부 지방의 숲 가장자리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나무다.

넓은잎나무이면서 솔방울처럼 생긴 열매가 특징이다.

 

굴피나무 잎과 몸통줄기(사진 출처-출처자료1)

 

오래전부터 굴피나무의 질긴 나무 껍질(피皮)로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기에 '그물피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굴피나무란 이름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굴피집이란 이름을 들어봤어도 굴피나무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나무가 그만큼 흔하지 않다는 뜻이다.

옛날에야 많았을 테지만, 길가나 산기슭에 버려져 사람들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 나무의 이름을 구태여 들추어내는 이유에는 그 열매의 기이함과 잎의 특이한 짜임새뿐 아니라, 북반구나 동양에만 있고 남반구나 서양에는 없기 때문이다.

굴피집은 두터운 굴참나무 껍질(굴피皮)로 지붕을 덮은 집으로서 굴피나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무 혈통

 

굴피나무, 호두나무, 가래나무 이 세 나무가 모여서 가래나무과라는 한 족보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얇고 몇천 년이 지나도록 족보를 고칠 필요조차 없이 단순히 그 혈통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온 그런 족보였다.

굴피나무는 호두나무의  많은 계파를 대산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고소하고 먹음직한 살을 열매 속에 담아 장사꾼의 속셈으로 세상을 행세하느냐는 것이다.

옛날 사농공상 시대의 선비를 자처하는 굴피나무가 장사꾼 호두나무를 눈 아래로 보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람의 손에 넘어가 품종 개량이라는 부정不貞한 교배 수단 즉 육종育種에 몸을 맡기는, 그런 치사한 족보의 일부분을 아예 갈아치워버리자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바로 굴피나무다.

 

가래나무야 열매 속에 살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장사꾼 노릇 할 주제가 못되므로 굴피나무와는 더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가래나무는 시베리아와 만주, 우리나라 북쪽에 터전을 잡아 그 후손이 자못 번성하였다.

그런데 굴피나무는 따뜻한 남쪽을 택해서 한반도 남쪽을 차지하고자 했지만, 워낙 거세고 생활력이 강한 나무들이 많아서 이제는 체념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고고한 선비 같은 나무, 은둔하는 선비인 것이다.

거의 거동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기개로 살고 있다.

 

 

○꽃들의 별명

 

굴피나무 꽃과 잎(사진 출처-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s://species.nibr.go.kr/home/mainHome.do?cont_link=009&subMenu=009002&contCd=009002&pageMode=view&ktsn=120000060543)

 

굴피나무 꽃, 한가운데 있는 키 작은 황록색 암꽃 주위를 키 큰 수꽃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사진 출처-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s://species.nibr.go.kr/home/mainHome.do?cont_link=009&subMenu=009002&contCd=009002&pageMode=view&ktsn=120000060543)

 

수꽃은 다 떨어지고 암꽃만 남은  굴피나무 꽃(사진 출처-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s://species.nibr.go.kr/home/mainHome.do?cont_link=009&subMenu=009002&contCd=009002&pageMode=view&ktsn=120000060543)

 

암수한그루인 굴피나무는 6월에 새 가지 끝에 황록색 꽃이 핀다.

2~3센티미터로 키가 작은 솔방울 모양 암꽃이삭은  2~15센티미터 훨씬 길고 곧게 선 원주형 수꽃이삭들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암꽃이삭이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기 시작할 무렵이면 주위에 곧게 선 수꽃이삭들은 모두 떨어져버리고 암꽃이삭만 홀로 남게 된다.

 

세상에는 이름을 떨치는 꽃들이 많다.

작약은 흔히 문 앞에 심기 때문에 근객近客(가까운 손님)이요, 모란은 귀한 상을 가져서 귀객貴客(귀한 손님)이요, 국화는 가을 서리를 맞아도 견디는 까닭에 수객壽客(오래 사는 손님)이요, 매화는 향기가 맑아서 청객淸客(맑은 손님)이요, 난초는 향기가 그윽하여서 유객幽客(그윽한 손님)이요, 서향은 반갑고도 사랑하는 사람의 몸내음을 가져서 가객佳客(아름다운 손님)이요, 정향나무는 내음이 담담하여 소객素客(담담한 손님)이요, 연꽃은 움직이지 않는 향기를 가져서 정객靜客(고요한 손님), 장미는 가시를 달고 향기가 야성적이라서 야객野客(야생적인 손님)이요, 재스민 jasmine은 먼 나라에서 온 향기의 나무이기 때문에 원객遠客(먼 데서 온 손님)이요, 계수나무는 신선들과 어울리기 때문에 선객仙客(고상한 손님)이다.

 

이런 식물들은 나들이를 잘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이렇게 사교성이 좋은 것들에게 굴피나무는 아랑곳없다.

굴피나무의 자랑은 여기에 있다.

향기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끌자는 것이요, 관심을 모으고자 하는 것은 이름을 높이자는 속셈이 있기 때문에, 굴피나무의 성미에는 도무지 맞지 않는다.

 

 

○독특한 솔방울형 열매

 

굴피나무 열매와 잎(사진 출처-출처자료1)

 

굴피나무 열매(사진 출처-출처자료1)

 

굴피나무의 훈장은 그 열매다.

굵은 도토리만 한 열매는 그 모양이 솔방울과 닮았으나 훨씬 잘 생겼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부드럽고, 꽃 같으면서도 열매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있다.

열매이지만 꽃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

 

가을이 되어서 온갖 나무의 잎들이 떨어진 뒤에도 이 나무의 까까중머리 같은 열매는 그대로 달려 있다.

이듬해 봄까지도, 아니 여름까지도 달려서 고향을 등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제주도에 나는 나무로 지금은 구슬꽃나무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이전에 중대가리나무(승두목僧頭木)가 있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떨기나무인데, 열매와 꽃이 모양이 까까중머리 같아서 중대가라나무란 이름을 얻었다.

이 나무의 열매가 얼핏 굴피나무 열매의 모양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닮았다.

 

나무 크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굴피나무의 솔방울 열매는 한 나무에 몇천 개씩 달린다.

몇백 개씩이 아니다.

그들은 모조리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량없이 달린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모든 나무가 꽃을 잃어버린 황량한 겨울날에 담갈색의 아름다운 꽃을 지천으로 피우는데, 이것이 굴피나무의 성숙한 꽃들이다.

장관이고도 남음이 있다.

하늘로 곧추섰다는 뜻은 고고한 선비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모든 것을 열매 안에 담아보겠다는 뜻이 갸륵하다.

까슬까슬한 열매의 비늘 사이에 하얀 눈을 담뿍 담을 때, 이 나무는 순식간에 흰꽃을 단 매화가 되어 버린다.

신발 신을 사이도 없이 단숨에 나무 아래로 뛰어가게 만들어버리는 나무가 바로 굴피나무다.

맑게 갠 추운 겨울 하늘을 바라보고,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땅의 세상에 한눈팔지 않는 굴피나무의 열매에 우리는 끝없는 박수를 보내도 아깝지 않다.

 

요즈음 어떤 이들은 열매가 달린 굴피나무의 가지를 꺾어 꽃꽂이 재료로 쓰고 있다.

백자 수반에 물을 담아 그 안에 있는 납으로 된 침판에 굴피나무 가지를 꽂는다.

이것을 꽂는 데는 여러 가지 이론도 내세우고 유형별 양식도 있다고 설명하지만, 굴피나무는 어떤 응접실의 모퉁이에 장미꽃과 나란히 진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밝은 전등불 아래에서 텔레비전 화면과 함께 어울릴 것이 못된다.

오히려 꺾인 채 산속 풀 사이에서 썩는 것이 격이 맞다.

 

굴피나무 열매는 영리하고 재치 있는 비늘을 가지고 있어 단단하다.

비늘같이 보이는 것을 꽃턱잎(포苞)이라고 하는데, 열매자루가 하도 단단해서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꼼짝하지 않는다.

이것은 굴피나무의 굳은 지조를 상징한다.

꺾이는 경우는 있어도 굽혀지는 일은 없다.

말라서 빳빳한 굴피나무의 겨울꽃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이색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이 나무를 볼 때마다 눈을 더 크게 뜨게 된다.

 

굴피나무 잎은 가래나무나 호두나무와 닮았지만, 큰 잎을 만들고 있는 작은 잎(소엽小葉)의 수가 많고 작은 잎의 모습이 더 날씬하다.

이왕 열매다 먹음직한 것이 못될 바에야 외관이라도 잘생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울산 울주군 전읍리의 300년 이상 묵은 굴피나무 보호수(사진 출처-출처자료1)

 

어떤 책에서는 이 나무가 높이 4미터 정도 되는 작은 나무라 하는가 하면, 일본 책에는 10미터 가량 되는 큰 나무라고 적혀 있다.

또 굴피나무는 남쪽 따뜻한 곳을 더 좋아한다는 설명도 있다.

남쪽으로 가면 이 나무가 더 왕성하게 자라고 더 큰 나무가 되는 까닭에 누군가가 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심었다기보단 자연생일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나무라 할 수 있으므로 보호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굴피나무 열매는 검은색 물감을 얻는데 이용된다.

옛날에는 이것을 천연염료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 굴피나무 껍질에는 독이 있어서 잎과 가지를 찧어서 시냇물에 넣으면 물고기들이 죽게 된다고 한다.

 

일본에도 굴피나무가 있어 그들은 이 나무를 돌호두나무라고 부르고, 가래나무는 귀신호두나무라 부른다.

 

굴피나무는 씨를 뿌려 키울 수 있으므로 공원이나 넓은 뜰이 있으면 원시적인 이 나무를 몇 그루쯤은 심어 보는게 어떨까.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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