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9 - 귤나무 본문
운향과 귤나무속에 속하는 귤나무의 학명은 시트러스 레티큘라타 Citrus reticulata, 영어는 Mandarin orange(만다린 오렌지) 또는 Unshiu orange(운슈 오렌지), 중국어 한자는 감자목柑子木, 밀감蜜柑, 귤橘 등이다.
우리는 흔히 감귤柑橘나무라고 부르며, 그 열매를 감귤, 귤, 밀감 등으로 부른다.
늘푸른 작은키나무(높이 5미터)인 귤나무는 우리나라 서귀포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에서만 나는 특별한 과일나무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도 재배한다.
조선시대엔 임금에게 진상될 때를 맞춰 황감시黃柑試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먹는 귤은 일본에서 개량한 온주밀감溫州蜜柑이 대부분이며, 영어 이름 운슈 Unshiu 오렌지는 원산지인 중국의 원저우(온주温州/溫州)의 일본식 한자 독음인 운슈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면 갈수록 더 좋아지는 제주도.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받고 보랏빛 노을에 낮의 장막을 내리는 거대한 한라산.
흰 꿈은 백록白鹿의 심연에 녹아 현무암 틈새로 흘러 바닷가 절벽에서 가루가 되어버리는 체온體溫의 물줄기.
봄꿈은 귤꽃으로 깨어나고 가을 꿈은 황금빛으로 여물어가는 방울방울 구슬구슬의 열매들.
천년이고 만년이고 외줄기 생각에 다반사茶飯事를 생략해버리는 해탈에 살아온 한라산.
저 아래쪽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며 노래하고 울어대는 인간들의 속사俗事에는 아랑곳없이 한라의 치맛자락을 주실朱實(귤)로 수놓으면서 자연을 구가하는데 만족해온 영주瀛州의 봉우리.
귤꽃이 피고 귤이 익어가는 정감에 제주도는 더욱 값지다.
○제주도의 귤 역사
제주도의 귤은 옛부터 유명했다.
기록에 제주도에서는 동지 때가 되면 귤을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진상을 받으면 이것을 먼저 왕에게 울리고, 감사의 뜻으로 시신侍臣(근신近臣: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과 제주(성주星州라 부름)목사에 포백布帛(베와 비단) 등을 하사하였다.
지금은 귤을 많이 생산하여 신기한 과일로 여기지 않지만 옛날에는 귀한 것으로 여겨 나라에서는 진상받은 감귤을 성균관과 사학四學(동학, 서학, 남학, 중학의 네 교육기관)의 유생들에게 하사하고 이를 계기로 해서 임시 과거를 보아 관리를 뽑았는데, 이 제도를 황감제黃柑製라고 했다.
황감제의 과거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제주의 감귤은 조정과 그 주변에 경사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감귤과 그 밖의 각종 임산물을 진상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비자나무·녹나무·조록나무·이년목 등은 인근 주민들을 간수인으로 정해서 해마다 연말에는 그 수량을 보고하도록 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이어서 "경상도·전라도의 해변에 가까운 고을에 매년 가을이면 관찰사가 차사원差使員을 보내 감甘·귤橘·유자柚子를 지키도록 하고 그 수량을 보고토록 한다"라고 되어 있어 제주도 임산물로서 귤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감귤은 옛부터 제주의 특산물이었고 권세가나 지위 높은 자가 아니면 얻기가 매우 힘들었다.
1421년 제주도의 감귤 수백 그루를 전남 순천 등의 해안에 시험 식재한 일이 있고, 1428년 강화도에 심기도 했다.
정약용에 따르면 "전남 해남부터 순천 사이에서 감귤이 생산된다"고 했으니, 남쪽 해안 지대의 식재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조는 "감귤에는 변종이 잘 나타나며, 추운 곳을 피해 양지 바른 곳에 과원을 개설하되, 미숙한 종자로 묘목을 키우면 나쁜 품종이 생겨나므로 주의할 것이며, 우량한 모목母木을 선발해서 그것으로 접목모를 생산하도록 하고, 껍질이 두터운 종류는 저장이 더 잘 되는 점에도 아울러 유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감귤원 설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감귤원은 주위에 돌담을 쌓아서 보호했다고 한다.
○감귤 진상할 때 관리들의 행패
제주에서 감귤을 진상할 당시 관리들의 행패가 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귤사橘史≫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남쪽 해안가 고을에 귤과 유자가 생산되는데, 처음에는 나무가 많더니 지금은 귀족 집에만 한 그루쯤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 되면 관리가 장부를 가지고 와서 나무의 수와 나무에 맺은 열매의 수를 세고 갔다가 열매가 익을 때 찾아와서 그 수효대로 수확할 것을 강요한다. 그동안 바람 때문에 떨어진 것도 있을 것이나 이런 것은 불문에 붙인다. 만일 처음 수효대로 진상을 하지 못하면 돈으로 쳐서 그 값을 징수한다. 물론 생산된 감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이때 동네에서는 관를 대접하느라 닭 잡고 돼지 잡고 해서 온통 잔치 분위기가 되지만, 이 비용은 모조리 감귤나무 소유자에게 떠맡긴다. 따라서 감귤나무를 소유한다는 것은 온 집안이 망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므로, 백성들은 귤나무 싹이 돋아나면 바로 이것을 뽑아버리고 또 살아 있는 감귤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어 그 속에 후춧가루를 집어넣어 그 나무가 저절로 말라죽도록 했다. 그러면 이 나무는 관리 대장에서 빠지게 된다. 관리의 간섭이 심할수록 백성의 고통이 더 심해지니, 누가 심고 가꾸기를 좋아하겠는가?"
한편 제주도의 과원果園 개설에 관해서는 제주도 찰방사의 상계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성이 과목을 재배하는 것은 그 과목으로써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며, 또 민간 소유의 과목에서 열매를 따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미 법으로 정한 바 있는데도 이곳 관리들은 민간이 가지고 있는 감귤에 대해서 진상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나무의 수를 대장에 올리고 열매가 미숙할 때 그 수효를 적고 그 뒤 이것이 줄어들면 절도죄로 몰아 백성의 원망이 대단하므로, 이후로는 관官에서 직접 귤과원橘果園을 만들 것이며, 민간 소유의 나무에서 진상용 열매를 딸 때에는 충분한 값을 치르도록 해야 합니다."
제주도에는 국가에서 개설원 귤과원도 상당수 있었다.
하여튼 관리들의 행패와 부패는 나라 발전을 크게 저해하는 것이라고 유형원, 이익 등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같이 귤을 왕에게 공물로 바치는 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있었다.
하夏나라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우왕禹王은 중국 남쪽 지방으로부터 귤과 유자를 진상받았다고 한다.
○청귤
어떤 분의 권유로 1978년 11월 초 제주에 있는 청귤靑橘나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제주도에서 자라는 감귤의 종류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하며, 이곳의 청귤나무도 재래종으로서 그 수가 극히 적고 조사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청귤나무는 다른 감귤과는 달리 12월까지도 껍질이 푸르고 2~3월에 가서야 등색橙色(오렌지색)으로 익는다.
열매의 지름은 4센터미터 정도다.
11월 초에 보았을 때는 껍질 표면이 우글쭈글했다.
두 그루의 청귤나무가 있었는데, 나무 높이는 모두 7미터가 넘었고 그 옆에는 재래종 감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지천으로 달고 있었다.
청귤 한 그루의 갈라진 줄기 사이에 돌이 박혀 있었는데, 이것은 열매를 많이 맺도록 시집보내는 것(나무시집보내기=가수嫁樹)으로 생각되었다.
과일나무는 보통 갈라진 줄기 사이에 돌을 끼워서 시집을 보낸다.
나무의 줄기껍질은 회적灰赤색(회색빛을 띤 붉은색)으로 미끈한 편이고, 가지는 모두 굽어서 복잡하게 갈라져 있었다.
쳥귤도 옛날엔는 진상 품목이었고,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감귤 열매를 맛보기 어려웠다.
이 나무는 당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을 보면, 감에는 황감, 유감遊柑 등 몇 종이 있고, 귤에는 금귤金橘,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왜귤倭橘, 청귤의 5종이 있다 했으며, 청귤은 봄이 되어서 익는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산유자山柚子도 제주에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산유자목을 조록나무로 풀이한 책도 있지만, 이 경우 산유자나무는 조록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귤나무라 하면 밀감나무를 말한다.
≪세종지리지≫의 <토공土貢> 항목에 "제주에는 비자·감귤류·이년목·비자목이, 정의旌義(제주도 동부)에는 감귤·비자가, 그리고 대정大靜(제주도 서부)에는 비자·감귤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감귤은 제주도 전체에서 생산된 듯하다.
○탱자나무와 금귤
귤 종류와 닮은 것이 탱자나무인데, 탱자 열매의 표면에는 털이 나 있어 귤과 구별이 되고, 또 탱자나무는 3개의 작은 잎이 모여 나지만 귤 종류는 한 개씩 나는 잎 즉 단엽單葉인 것이 다르다.
한편 귤나무를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열자列子≫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사이에 유수柚樹라는 나무가 있는데, 잎은 푸르고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그 열매의 맛은 달면서도 시다. 그런데 이것을 회수淮水 이북 지방에 옮겨 재배하면 탱자나무가 된다(도회북화위지渡淮北化爲枳)"라고 적혀 있다.
회수는 양자강과 황하 사이를 흐르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이 글의 내용이 옮겨 심은 귤나무가 탱자나무(지枳)가 된다는 것인지, 또는 그 열매가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전에는 이와 비슷한 말이 있었다.
≪주례周禮≫와 ≪회남자淮南子≫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즉 "제주도에 금귤金橘이 있는데, 이것은 금감金柑 또는 하귤下橘이라 해서 열매가 매우 작고 둥근 것"이고, "열매는 탄알처럼 작고 황금빛을 띠는데 이것을 금귤이라 부른다(실소여탄황여금위지금륙實小如彈黃如金謂之金橘)"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제주도 원산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흔히 일본 말 그대로 '낑깡(금감金柑キンカン)'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목천자가 곤륜산 요지에서 왕모를 만나 금귤을 먹었다(목천자회왕모어요지식금귤穆天子會王母於瑤池食金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귤이 신선과 같이 훌륭한 존재가 맛보는 과일로서 그 품격이 매우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귤중지락橘中之樂'이라 해서 귤 열매를 쪼개었더니 그 안에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면서 즐기고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요컨대 귤은 훌륭한 사람과 관계있는 과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착한 척하는 위선자 같은 사람들은 원래 귤 먹기를 꺼렸으나 지금은 그들도 먹는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에는 "별이 떨어져 귤이 되었다(성산위귤星散爲橘)"는 전설이 있는데, 하여튼 아름다운 것이 변해서 이 나무가 되었다는 점은 서로 통하고 있다.
귤 열매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귤 껍질을 말린 것은 약재로 쓰이며 3~5년 정도 오래 묵은 것일수록 약효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진피陳皮(황귤피黃橘皮: 오래 말린 귤 껍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귤나무를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 전국시대 시인 굴원屈原(서기전 340?~서기전 278?)이 지은 <귤송橘頌>이다.
이는 비교적 긴 노래로 귤나무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나무 (후황가수后皇嘉樹)
하늘의 명을 받아 우리 땅에 내려왔다 (귤래복혜橘徠服兮)
타고난 성품은 바뀌지 않아 (수명불천受命不遷)
남쪽 나라에 터를 잡았다 (생남국혜生南國兮)
깊고 단단한 뿌리 옮겨 심기 어려워 (심고난사深固難徙)
한결같은 마음씨를 지녔음이라 (갱일지혜更壹志兮)
아름다운 열매 속살 희게 가져 (정색내백精色內白)
그 뜻 고고함이여 (류가임혜類可任兮)
그 모습 너그러워 (분온의수紛縕宜脩)
허욕 멀리하고 자유분방 살아가니 (소세독립蘇世獨立)
잡되지 아니하다 (횡이불류혜橫而佛流兮)
이 나무 심어 내 스승으로 모시리라 (치이위상혜置以爲像兮)"
이런 시를 읽노라면 귤을 섣불리 먹기가 어려워진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https://blog.naver.com/peaceboy85/220644026572(굴원의 '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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