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2: 절대주의에 대한 대안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2: 절대주의에 대한 대안
새샘 2025. 2. 4. 15:03
절대주의가 17세기와 18세기 유럽 군주들의 지배적인 본보기이긴 했지만, 유럽인을 지배했던 유일한 체제는 결코 아니었다.
베네치아 Venezia에서는 공화주의共和主義 Republicansim(개인의 사적 권리보다 시민이 갖추어야 할 덕德의 고양을 보다 강조하는 정치 이념) 과두정寡頭政 oligarchy(2인 이상의 소수 지도자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이끌어가는 정치 체제)이 계속해서 이 도시를 지배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Netherlands에서는 에스파냐 España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영토들이 근대 초기에 유럽에서 유일하게 탄생된 진정한 신생국인 네덜란드 연합주를 형성하기 위해 결합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네덜란드인은 어떠한 군주정에 대해서도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홀란드 Holland가 이 연합주를 지배했지만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오라녜 가 House of Oranje는 결코 이 신생국을 공화정에서 군주정으로 변모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1688년 이후 오라녜 공公 빌럼 3세 Willem III van Oranje(영어는 오렌지 공 윌리엄 3세 William III, Prince of Orange)이 잉글랜드 England·스코틀랜드 Scotland·아일랜드 Ireland 국왕 윌리엄 3세 William III(재위 1689~1702)가 되었을 때에도 네덜란드 연합주는 공화정으로 남았다.
○제한 군주정: 잉글랜드
유럽 여러 나라에 걸쳐 대의기관의 권력이 잠식되고 있을 때 잉글랜드 의회는 유럽의 대의기관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하고 있었으며 가장 고도로 발전했다.
잉글랜드의 정치이론가들은 몇 세기 동안 자신들의 정부를 군주정, 귀족정, 비非귀족정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혼합 군주정으로 보았다.
하지만 17세기 동안 이러한 전통은 의회 없이 통치하려고 했던 찰스 1세 Charles I(재위 1625~1649)의 시도로,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의 독재적인 호국경 정치 기간(1653~1658) 동안에 위협을 받았다.
1660년 군주정의 회복은 잉글랜드가 장차 공화국이 될 것이냐 아니면 군주국이 될 것이냐의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가 어떠한 군주국이 될 것인가는 찰스 2세 의 치세가 시작되면서 미해결의 문제로 남았다.
●찰스 2세의 치세
찰스 2세 Charles II(재위 1660~1685)는 잉글랜드인에게 상당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참수된 찰스 1세의 아들이었지만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다.
그는 즉위하면서 프로테스탄트 '반대자들'[공식적인 '잉글랜드 국교회 Church of England(또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인이 아닌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제한적인 종교적 관용을 선언했다.
또한 찰스 2세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유머를 섞어가며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노라'고 선언하면서 대헌장大憲章[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과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외설스러운 유희, 무도회, 성적인 방종과 더불어 해이해진 도덕적 분위기는 청교도淸敎徒(퓨리턴 puritans) 지배 시절의 제약을 잊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을 반영했다.
일부 비판자들은 '처녀성과 정조에 대한 소문난 적' 찰스 2세가 자기 나라를 너무 엄숙하게 다스리기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떠맡았다는 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자嫡子(정실이 낳은 아들)가 없었고 왕좌를 놓고 다투게 될 한 명의 사생아만 있을 뿐이었다.
프랑스 France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성장한 찰스 2세는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예찬자였다.
1670년대 동안 그는 공공연하게 루이 14세 Louise XIX의 절대주의를 자신의 왕권을 위한 본보기로 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의 유력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찰스의 지지파(반대파는 이들을 '토리 Tory'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일랜드 Ireland의 가톨릭교도 산적들의 잘 알려진 별명이었다)와 반대파(토리파는 이들을 스코틀랜드계 장로교도 반도叛徒들의 별명을 따서 '휘그 Whig'라 불렀다)로 나뉘었다.
양쪽은 왕권에 대한 저항이 내전,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화주의를 불러일으켰던 1640년대의 좋지 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과 절대주의를 염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가능성을 한층 더 두렵게 여기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종교 역시 분열을 일으키는 문제로 남아 있었다.
찰스 2세는 심지어 1685년 임종할 때까지 개종할 정도로 로마 가톨릭교에 호의적이었다.
1670년대에 그는 의회의 입법을 무시할 수 있다는 국왕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며 가톨릭교도와 프로테스탄트 반대자들에 대한 벌금을 잠시 유예했다.
결국 그는 대중의 강렬한 항의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엇지만, 이 논쟁은 찰스 2세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자인 독실한 가톨릭교도 제임스 James(찰스 2세에 이어 제임스 2세로 즉위)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1679년과 1681년 사이에 치러진 일련의 선거에서 휘그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급진적 휘그당 일파가 형의 뒤를 이어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법으로 막으려고 시도했지만, 찰스 2세는 이른바 '왕위 계승 배척 위기(제임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려는 배척 법안 Exclusion Bill 위기)'에서 반대파를 억눌렀다.
그 후 찰스 2세는 늘어나는 관세 수입과 루이 14세가 보내준 비밀 보조금을 합치면 의회에 의지하지 않아도 통치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이 확보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아가 찰스 2세는 휘그당 정치인 중 몇 명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지방 정부를 국왕의 통제에 더욱 복종하도록 개조하는 등의 조치로 휘그당에게 경고를 보냈다.
찰스 2세는 1685년 자신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서거했지만 그보다 더 유능하고 한결 노련한 후계자가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종교적 유산을 남겨놓았다.
●제임스 2세의 치세
제임스 2세 James II(재위 1685~1688)는 세속적인 형과는 사뭇 달랐다.
열광적인 가톨릭교 개종자인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와 프로테스탄트 반대자들이 정치적 관직을 맡는 것을 금하는 법을 유예함으로써 대부분이 잉글랜드 국교회 교인이었던 자신의 토리 지지자들을 소외시켰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백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바란다고 공공연히 공표하고 로마 Roma(영어 Rome) 교황 사절들이 런던 London 거리를 공개적으로 행진하게 하면서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믿음을 과시했다.
1688년 6월 제임스 2세가 모든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들에게 설교단에서 종교적 관용에 대한 자신의 포고령을 읽도록 명령했을 때 이를 거부한 7명의 주교는 선동적인 명예훼손죄로 즉시 투옥되었다.
하지만 재판에서 주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교들의 재판은 위기를 불러온 단초에 불과했다.
1688년 제임스 2세와 두 번째 부인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 반도의 모데나 출신의 메리 Mary(이탈리아어 Maria) of Modena 사이에 예기치 않게 아들이 태어난 것이었다.
가톨릭교도로 자라나야만 하는 이 아이는 그보다 훨씬 연상이며 프로테스트탄트교도인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후에 메리 2세 여왕 Queen Mary II로 즉위)가 지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대체했다.
이 아이의 출생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 그가 사실은 제임스 2세의 아들이 아니고 워밍팬 warming-fan(침대에 놓인 이불이나 시트를 따뜻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기구)에 담겨 국왕의 침실로 몰래 들여왔다는 소문이 널리 나돌았다.
이른바 '워밍팬 아기 warming-pan baby'의 출생과 더불어 사건은 빠르게 절정으로 치달았다.
휘그와 토리 대표단은 메리 스튜어트와 오렌지 공 윌리엄(오라녜 공 빌럼)을 초빙하기 위해 잉글랜드 해협을 건너 홀란드로 갔다.
대표단은 새로운 의회를 소집해 프로테스탄트와 잉글랜드인의 자유를 지켜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들이 침략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건너오기를 청했다.
윌리엄은 당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대륙 연합의 지도자로서 루이 14세의 팽창주의적 대외 정책에 대항해 잉글랜드를 연합국으로 만들기 위한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명예혁명
1688년 윌리엄과 메리의 잉글랜드 침공은 무혈 쿠데타가 되었다(비록 제임스2세가 위기의 순간에 코피를 흘렸다는 소문이 있지만 말이다).
제임스 2세가 조국을 등졌기 때문에 의회는 왕좌의 공위空位를 선언하고 윌리엄과 메리가 계승권에 따라 공동 통치자로서 즉위할 길을 열어주었다.
1689년 의회에서 통과되고 새로운 왕과 여왕이 받아들인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은 배심제, 인신보호법(누구도 범죄로 기소되지 않는 한 투옥될 수 없다는 것을 보장), 의회를 통해 군주에게 불만 사항을 청원할 수 있는 권리 같은 잉글랜드인의 인권을 재차 확약했으며, 군주는 나라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1689년에 통과된 관용법 Act of Toleration은 프로테스탄트 반대자들에게 비록 관직을 맡을 수는 없지만 자유로운 예배의 권리를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1701년의 왕위 계승법 Act of Succession은 장래의 모든 잉글랜드 군주는 잉글랜드 국교회 교인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자식이 없는 메리 여왕이 죽고 이제 국왕 윌리엄마저 죽는다면 왕위는 메리의 여동생인 프로테스탄트교도 앤 Anne(재위 1702~1714)에게 넘어가고, 앤마저 자녀 없이 죽는다면 독일 Germany 하노버 공국 Dutch of Hanover의 선제후 Elector이며 프로테스탄트교도인 제임스 1세의 증손자 조지 George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맺어진 공식적인 연합법 Act of Union은 제임스 2세의 가톨릭교도 후계자는 장차 잉글랜드의 왕위를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차지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명시했다.
잉글랜드인들은 1688년과 1689년의 사건들을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명예로운 이유는 명예혁명이 유혈사태 없이 진행되었고 '의회에 속하는 국왕'이 통치하는 혼합 군주정으로서의 잉글랜드를 굳건하게 확립시켰기 때문이다.
윌리엄과 메리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은 계속해서 상당한 정도의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1688년 이후 잉글랜드의 어떤 군주도 그때부터 해마다 열렸던 의회를 무시하고 통치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의회 특히 하원은 과세와 지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특히 명예혁명을 잉글랜드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로 기렸다.
그들은 유리한 (프로테스탄트의) 순풍이 윌리엄과 메리에게 불어와 그토록 빠르게 잉글랜드에 당도했으며, 제임스 2세의 함대가 동원할 수 있는 저항군을 결집시키는 것을 방해했다는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하지만 1688년은 모두에게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치하에서 지방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위협받아왔던 거대한 재산 소유자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주었던 혁명이었다.
따라서 명예혁명은 곧 정부에 대한 후원과 전쟁을 통한 이윤으로 더 한층 부유해지게 될 부유층 거물을 대신한 현상 유지의 회복이었다.
명예혁명은 또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교 소수파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 다수파를 비참한 신세로 만들었다.
1690년 국왕 윌리엄이 보인 전투 Battle of the Boyne에서 제임스 2세의 군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 아일랜드의 권력은 아일랜드 사회에 대한 지배를 현대까지 지속하게 될 '프로테스탄트의 우세' 아래 견고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존 로크와 정부 계약 이론
명예혁명은 독특한 정치적 환경의 산물이었지만 보댕 Bodin(1530~1596), 홉스 Hobbes(1588~1679), 필머 Filmer(1588~1653), 보쉬에 Bossuet(1627~1704) 같은 저술가들의 사상에 부응해 형성되고 있던 17세기 말의 반反절대주의 정치이론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 절대주의의 반대자 중 주요한 인물은 명예혁명 이전에 집필한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을 1690년에 처음으로 출간한 잉글랜드의 존 로크 John Locke(1632~1704)였다.
로크는 인간이란 본래 어떤 형태의 정부도 없는 절대적인 자유와 평등을 특색으로 하는 자연 상태에서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자연 상태에서 유일한 법은 각자의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자연권을 스스로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자연법(로크는 이를 이성의 법과 동일시했다)이다.
하지만 인간은 곧 자연 상태에서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는 것을 지각한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절대적 평등에 입각한 시민 사회를 세우고 나서 시민 사회 안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논쟁을 중재하기 위해 정부를 세우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인간은 정부의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정부는 단순히 모든 사회구성원의 권력을 결합해놓은 것에 불과하며, 정부의 권한은 "사람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그 권한을 공동체에 넘겨주기 전에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정부에게 명시적으로 양도하지 않은 모든 권력은 인민 스스로에게 유보되어 있으며, 따라서 정부의 권한은 계약적이면서도 제한적인 것이다.
만약 정부가 자체에 부여된 권한을 넘어서거나 남용한다면 사회는 정부를 해체하고 또 다른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로크는 모든 형태의 절대주의를 비난했다.
그는 절대군주를 공격했지만, 의회의 통치권 주장에 대해서는 비판의 강도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정부란 생명·자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기에 어떤 정치적 권위체도 신성한 이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의 자연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권리들이 구현된 자연법은 입법·행정·사법을 망라하는 정부의 모든 부처에 대한 자동적이고 절대적인 제약이었다.
18세기 말 로크의 사상은 아메리카 혁명과 프랑스 혁명 모두에서 중요한 지적 배경의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1690년과 1720년에 그의 사상은 그보다는 훨씬 미흡한 급진적 목적에 기여했다.
제임스 2세를 윌리엄과 메리로 대체한 거물 지주들은 로크가 자신들의 보수적 혁명을 옹호해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제임스 2세가 자신들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해주기보다는 두 가지를 모두 위협했기 때문에 거물 지주들은 제임스 2세가 수립한 폭정으로 무너뜨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자연권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해줄 수 있는 정부로 대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1689년 이후의 잉글랜드 정부는 의화에 의해 지배되었고, 의회는 차츰차츰 관직을 향한 탐욕스런 경쟁 또는 가끔씩 원리에 대한 불일치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훨씬 능가하는 토지 귀족에 의해 통제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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