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대인들의 환경 적응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석기' 본문
한 손에 착 감기면서도 무게감이 적당한 물건을 두고 우리는 '그립감이 좋다'라고 한다.
손에 딱 맞게 쥐어지는 그립감(한 손으로 물건을 쥘 때의 느낌)에 대한 선호는 비단 현대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원시시대 석기를 보면 어쩜 그리 한 손에 딱 쥐어지기 좋게 만들어졌나 싶어 감탄스럽다.
석기石器는 원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돌로 만들어진 도구를 통칭힌다.
석기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오래된 도구다.
돌은 도구이기도 하지만 인류 최초의 명품이기도 했다.
가령, 화산 폭발 시 만들어진 흑요석은 유라시아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널리 사랑받은 보석이었다.
돌은 인류 역사에서 때로는 실용적인 도구로, 때로는 치장의 도구로써 다방면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제부터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돌에 새겨진 250만 년 전 인간의 역사
고인류학에서 화석인류를 지칭하는 명칭을 잘 살펴보면 해당 화석인류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는 '생각하는 사람(슬기사람)',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는 '직립보행하는 인간(곧선사람)'이라는 뜻이다.
직립보행도, 사고하는 것도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영국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 Louis Leakey(1903~1972)는 아프리카 Africa 탄자니아 Tanzania 올두바이 협곡 Olduvai Gorge에서 18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뼈와 뼛조각을 발견한다.
그는 이 고인류를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손쓴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호모 하빌리스는 두뇌 용량과 키가 커지면서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한다.
최근에는 케냐 Kenya 투르카나 호수 Lake Turkana나 에티오피아 Ethiopia 일대에서 250만 년 전 무렵을 전후한 시기의 석기들이 꽤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330만 년 전의 석기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프리카 일대에서 살던 호모 속屬 genus들이 만든, 거칠게 돌을 깨서 제작한 석기들을 '올도완 Oldowan 석기'라고 부른다.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기의 모양은 한층 더 정교해진다.
180만 년 전 무렵이 되면 올도완 석기 형태에서 더욱 발달하여 주먹도끼 형태의 석기가 등장한다.
이를 '아슐리안 Acheulean 석기'라고 한다.
중기 구석기시대인 약 30만 년 전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는 아슐리안 석기에서 또 한 차례 발달한, 거북등날식 석기를 사용했다.
후기 구석기시대인 5만 년 전부터는 '좀돌날'이라고 하는 작고 날카로운 석기도 등장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전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다
석기의 발달을 이야기할 때 한반도는 세계 고고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 인근인 전곡리에서는 고고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1970년대 후반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세계 고고학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전기와 중기 구석기시대 석기류가 발견된 적이 없었고, 그보다 더 거친 형태의 찍개류만 발굴되었다.
이에 착안해 미국 하버드대학의 고고학자 모비우스 Hallam L. Movius는 20세기 중반 '모비우스의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이론의 골자는 구석기시대 문화를 두 갈래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인도 서쪽은 정교한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사용한 구석기 문화였고, 동쪽은 그보다 다소 투박한 도구를 사용한 덜 발달된 구석기 문화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동아시아 지역의 구석기인들은 서양의 구석기인들과는 달리 열등해서 발달된 석기를 만들 수 없었다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었다.
인종차별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 주먹도끼가 발견됨에 따라 고고학계에 널리 퍼진 오래된 편견이 깨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의 연대가 너무 늦다는 사실이었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약 20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반면,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가 만든 주먹도끼는 15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130만 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적 간극이다.
또한,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의 수는 너무나 적었고, 제작 방식도 매우 거칠었다.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석기가 상당히 조악粗惡하다(거칠고 나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아시아 지역에서는 석기의 발달이 늦어졌을까?
고고학자들은 다른 가능성에 주목했다.
지능이 아니라 환경과 석재 문제에 주목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잘 깨지지 않는 단단한 석재인 차돌이 풍부했다.
재료 자체의 가공이 어려우니 거칠게 제작한 찍개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
그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 연구가 그렇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단순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고고학 연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다양한 맥락을 고려한 촘촘하고 정밀한 연구 자세가 필요한 이유다.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시베리아의 석기
이처럼 환경적인 이유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전기 및 중기 구석기인들은 타 지역에 비해 다소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거친 석기를 선호했다.
그런데 5만 년 전 무렵, 즉 후기 구석기시대에 돌입하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이때부터는 나무나 뼈로 만든 손잡이에 작고 날카로운 돌날을 끼워서 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도구가 커다란 효과를 발휘한 곳은 추운 시베리아 Siberia 지역이었다.
빙하기가 도래하자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후기 구석기인들은 날카롭고 정교한 석기로 매머드 mammoth를 사냥하는 노련한 사냥꾼으로 변신했다.
이들은 날카롭고 정교한 석기로 매머드를 잡아 추위를 버티게 해줄 든든한 식량으로 삼았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유명한 시베리아 동부의 야쿠티아 Yakutiya라는 곳에서는 1970년대에 약 2만 년 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듁타이 동굴 유적지 D'uktai Cave Site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에서는 매머드 사냥에 썼을 것으로 보이는 돌날로 만든 창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1만 7,000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들어진 것과 똑같은 형태였다.
이후 또 다른 시베리아 지역, 특히 바이칼 Baikal 일대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만 7,000년 전 베링해 Bering Sea를 건너간 매머드 사냥꾼들의 기원지가 밝혀진 것이다.
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떼고, 다듬고, 날카롭게 갈아 만든 석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썩지도 않고, 녹아내리지도 않는 그 단단함으로 몇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품어온 석기는 주어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적응하고 진화해온 인류의 분투를 보여주는 잣대(바로미터 barometer)인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2. 구글 관련 자료
2025. 2. 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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