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3: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3: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새샘 2025. 2. 8. 17:41

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 초상화(루브로 박물관)(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C%9D%B4_14%EC%84%B8)

 

루이 14세 Luise XIV(재위 1643~1715)의 공식 초상화를 보면 즉위식에서 입은 옷을 걸치고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둘러싸인 절대군주의 겉모습 이면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겉모습은 아마도 근대 초의 어느 통치자보다 인상적인 왕의 존엄성이 지닌 극적 효과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루이 14세가 용의주도하면서도 인위적으로 꾸며냈을 것이다.

루이 14세와 후계자들은 일반인이 근접하기 힘든 신적인 권세를 부여받은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통치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주도면밀하게 연출했다.

 

 

○베르사유에서 왕의 위엄을 연기하기

 

루이 14세가 자신의 통치권을 가장 공들여서 과시하고자 한 곳은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 Château de Versailles(영어 Palace of Versailles)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건물과 대지는 루이 14세가 날마다 의식을 거행하고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면서 귀족들을 복종시키려고 최면을 거는 무대가 되었다.

그 궁전의 정면은 길이만도 530미터 정도였다.

궁전 안에는 프랑스 군대의 승리와 국왕의 개선을 기리는 벽걸이와 그림이 걸려 있었고, 건물 전체에 걸쳐 거울들이 가물거리는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 조성된 아폴로 분수의 조각상 '아폴로의 전차 팀' 중 아폴로 상(출처-베르사유 궁전 아폴로 분수 복원 홈페이지 https://en.chateauversailles.fr/news/life-on-estate/restoration-apollo-fountain#apollos-fountain-a-fountain-inspired-by-the-legend-of-the-sun-god)

 

궁전 밖의 드넓은 정원에 있는 그리스의 태양신 the God of the Sun in Greece 아폴로 상 Apollo Statue은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태양왕 Roi Soleil(영어 Sun King)'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루이 14세가 침대에서 일어나면 귀족들은 경쟁적으로 그를 수행했고, 앞다투어 왕의 음식(왕실 주방에서 국왕 식탁까지 여러 블록의 거리를 운반해왔기에 대개 돌처럼 차가운 음식)을 먹었으며, 왕의 정원을 산책하거나(심지어 왕의 걸음걸이까지도 왕립 안무가가 춤곡으로 안무했다), 말을 타고 사냥에 나섰다.

루이 14세의 궁정은 태양왕의 집으로서 국왕의 광채가 발현되는 중심점이었다.
프랑스의 주요 귀족들은 연중 일정 기간을 베르사유에서 루이 14세와 함께 지내야 했다.

루이 14세의 장엄한 궁전은 국왕과 제휴한 귀족들의 위신을 높여주는 한편, 그들이 국왕에게 불복종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루이 14세의 영지에서 귀족들은 반역을 획책하기보다 국왕의 행차가 광대한 궁정 홀을 장엄하게 통과할 때 2~3분 동안만이라도 국왕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즐겼다.

하지만 동시에 궁정 주변의 세련되면서도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세밀한 예의범절의 규칙은 특권을 지닌 이들 귀족에게 완벽한 매너를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사소한 실수를 범해 국왕의 기분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줄곧 걱정하는 지속적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루이 14세는 이러한 연출을 통치자로서의 의무 중 하나라고 이해했고 매우 진지하게 이행했다.

루이 14세는 명석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근면하고 성실했다.

루이 14세가 실제로 "짐이 곧 국가다 L'état, c'est moi(영어 I am the state)"라고 말했는지 안 했는지 상관없이 그는 분명히 자신이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신민의 복리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을 위해 남긴 통치술에 관한 비망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신민으로부터 받는 복종과 존경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기대한 정의와 보호의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존경해야만 하듯이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행정과 중앙집권화

 

루이 14세는 이러한 책임을 절대주의적 입장에서 규정했다.

즉, 전반적인 국내 안정을 도모하려면 왕권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을 자신의 왕권 아래로 끌어들이는 한편, 상층 부르주아(자본가) bourgeois 계급을 국왕의 행정가 특히 36개에 달하는 프랑스의 기본 행정 단위인 제네랄리테(납세구納稅區) généralités의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장관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들 지방장관은 대개 자신의 출신 지역에 임명되지 않았으므로 관할 지역의 지방 유력자들과 결탁하는 일 또한 없었다.

그들은 국왕의 마음에 따라 관직을 얻었으며 확실한 왕의 사람이었다.

몇몇 행정관들은 행정적 봉사의 대가로 종종 새롭게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그러한 가문에서 충원된 행정관들은 베르사유에서 국정 수행을 보좌하기도 했다.

그들은 태양왕 루이 14세를 위한 연극배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국가 복리를 책임진 루이 14세를 대신해 고된 업무에 종사하는 보좌관들이었다.

루이 14세의 행정관들은 세금 징수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루이 14세의 호전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대외정책의 바탕인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에 필수적이었다.

근대 초기의 절대주의에서 드러나는 개인적인 요소는 언급할 만하다.

절대주의는 언뜻 보기에는 정치이론의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야심찬 군주가 정복과 과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부를 만들고자 하는 방식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17세기 전체를 통해 늘어난 타유 taille 즉 토지세에 더해 부가세가 부과되었다.

여기에 루이 14세의 정부는 카피타시옹(인두세) capitation까지 도입했으며, 소금·포도주·담배와 그 밖의 물품에 부과하는 간접세를 철저히 징수했다(소금에 부과되는 간접세를 염세 gabelle라고 한다).

그런데 귀족은 타유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만큼의 부담이 농민에게 무겁게 부과되었다.

그 결과 지방 곳곳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지만, 루이 14세는 그러한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지방의 반대 세력은 루이 14세의 치세 동안 결코 제거되지는 않았지만 줄어들었다.

지방 귀족을 베르사유로 이동시킴으로써 루이 14세는 지방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의 근원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또한 루이 14세는 지역 의회의 방해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법을 승인·집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의회의 의원도 즉각 추방시킬 것을 명했으며, 브르타뉴 Bretagne, 랑그도크 Languedoc, 프랑슈콩테 Franche-Comté의 지방 신분회의 권한을 무력화시켰다.

1614년에 마지막으로 소집되었던 프랑스의 전국적인 대의기구인 신분회身分會(또는 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영어  States-General)는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으며, 그 후 1789년까지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루이 14세의 종교 정책

 

국가적인 이유에서 또한 개인적인 성실함으로 루이 14세는 프랑스인에게 경제적·사회적 비용이 들더라도 종교적 통일성을 부여하고자 결심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러한 신앙심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대다수 프랑스인은 로마 가톨릭교도였지만, 랑스의 가톨릭교도는 정적주의자靜的主義者 Quietists, 장세니스트 Jansenists, 예수회 Jesuits, 갈리아주의자 Gallicans로 나뉘어 있었다.

정적주의자는 하나님과 개개인의 마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개인적 신비주의로 은둔할 것을 설교했다.

그러한 교리는 늘 그렇듯이 교회의 중개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하나의 국왕,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 un roi, une loi, une foi(영어 one king, one law, one faith)'이라는 신조와 결합된 절대주의 추종자가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창시자인 17세기의 이프르 Ypres 주교 얀센 Cornelium Jansen의 이름에서 유래한 장세니즘은 놀랍게도 가톨릭판 칼뱅주의 Calvinism처럼 보이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Hipponensis의 예정설을 주장했다.

루이 14세는 정적주의자와 장세니스트를 단호하게 박해했다.

그는 그들에게 믿음을 철회할 것인지 아니면 투옥과 추방을 감수할 것인지 양자택일하도록 강요했다.

반면에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개신교)에 대응하는 가톨릭교회의 반反(동動)종교개혁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예수회를 지원했다.

하지만 예수회에 대한 그의 지원은 프랑스 교회가 교황, 예수회, 에스파냐의 영향력(프랑스 교회는 이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등으로부터 독립하기를 바라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갈리아주의 Gallicanism 가톨릭교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가톨릭교도 사이의 불화로 말미암아 루이 14세의 왕권을 빛내주는 종교적 영기靈氣(신령스러운 기운)는 그의 치세 동안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개신교도) 위그노 Huguenot(16세기에서 17세기 프랑스의 칼뱅파 Calvinism 신교도)에 대해서 무자비한 전쟁을 벌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학교는 파괴되었고 프로테스탄트교도가 의학과 인쇄업을 포함한 많은 전문직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급기야 1685년에 이르러 루이 14세는 위그노가 1598년 이래 누려온 관용의 토대인 낭트 칙령勅令(왕이 내린 명령) Edict of Nantes을 취소하고 말았다.

프로테스탄트 성직자가 추방되고 평신도는 갤리선 galley(고대~중세에 지중해에서 쓰던 배의 하나로서, 양쪽 뱃전에 아래위 두 줄로 노가 많이 달렸으며, 전쟁 때에는 무장하여 병선兵船으로 사용)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그 자녀들은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해야만 했다.

많은 이들이 개종했지만, 20만 명의 프로테스탄트 망명자가 잉글랜드 England, 홀란드 Holland, 독일 Germany, 아메리카 America로 탈출했으며, 이와 더불어 자신의 전문 기술과 수공업자로서의 기술을 망명지로 함께 가지고 갔다.

이는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베를린 Berlin과 런던 London의 견직공업은 루이 14세의 박해를 피해 건너간 위그노가 설립한 것이었다.

 

 

○콜베르와 왕실 재정

 

프랑스를 통합하고 중앙집권을 이루려는 루이 14세의 정책은 1664년부터 사망한 1683년까지 국왕의 재무장관이었던 장 밥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1619~1683)가 감독한 왕실 세입의 엄청난 증가에 의존했다.

콜베르는 세금 징수 과정을 강화했으며 가능한 지역에서 세금 징수의 도급 관행(징세 대리인이 국왕을 위해 징수한 세금의 일정 비율을 보유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없애버렸다.

콜베르가 재무장관에 취임했을 때 왕국에서 징수된 세금의 약 25퍼센트만 국고에 귀속되었지만 그가 사망할 무렵에는 그 비율이 80퍼센트로 늘어났다.

콜베르의 감독 아래 프랑스는 판사직과 시장직을 포함한 여러 관직을 팔았으며, 길드 guild(중세 시대의 상공업자들이 만든 상호 부조적인 동업 조합)는 통상 규제를 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매입했다.

콜베르는 또한 대외 무역을 통제·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콜베르는 확고한 중상주의자(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 무역을 통해 자본 및 금·은과 같은 귀금속을 축적하는 것을 국부 증대의 이상적인 방법으로 여기는 경제사상 및 정책)로서 수입이 줄어들고 수출이 증가하면 프랑스의 부도 증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비단, 레이스 lace(서양식 수예 편물의 하나), 태피스트리 tapestry(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유리 등과 같이 이전에 수입되던 상품의 국내 제조를 촉진하기 위해 국고를 사용하는 한편 프랑스로 수입되는 외국 상품에 관세를 부과했다.

그는 특히 전시에 프랑스가 필요로 하게 될 모든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산업을 창출하기를 갈망했다.

그는 또한 국내 통상을 촉진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로, 교량, 수로 등을 개선했다.

 

국왕의 세입을 증대시키기 위한 콜베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은 궁극적으로 루이 14세가 요구하는 그칠 줄 모르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데 실패했다.

콜베르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잔소리했을 때 이러한 결과를 스스로 예견했다.

"무역은 국가 재정의 근원이며 국가 재정은 전쟁의 사활이 걸린 중추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전시에도 지출의 결정에서 쓸 수 있는 돈의 액수를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폐하께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간청하옵나이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그의 말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루이 14세의 치세 말 무렵에 그의 호전적인 대외 정책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프랑스의 재정은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비용 때문에 결딴나고 말았다.

 

 

○1697년까지 루이 14세가 치른 전쟁

 

루이 14세에게 절대주의는 결코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예컨대 국내에서의 영광은 해외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통해 이룩되는 것이었다.

루이 14세는 직접 통치를 시작한 1661년부터 1715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를 거의 끊임없는 전시 상태를 유지했다.

그가 전쟁을 치른 주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프랑스를 둘러싸고 있는 에스파냐 España,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Spanish Netherlands,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을 구성하고 있합스부르크 왕가 Haus Habsburg(영어 House of Habsburg)의 세력이 프랑스에 가하는 위협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 가문의 왕조적 이해관계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루이14세에게는 이 두 가지 목적이 종종 조화를 이루었다.

1667~1668년 루이 14세는 릴 Lille을 점령하면서 그가 왕비를 대신해 권리를 주장한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공격했으며, 1672년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 대한 이전의 공격을 훼방하려는 네덜란드인과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네덜란드인의 선동에 기분이 상해 홀란드와 그곳의 새로운 지도자인 총독 오라녜 공公 빌럼 3세 Willem III van Oranje(재위 1672~1702)(후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국왕인 윌리엄 3세 William III로 즉위, 재위 1689~1702)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투사였던 침묵공沈默公 빌럼 Willem de Zwijger(영어 Willam the Silent)이라 불렸던 오라녜 공 빌럼 Willem van Oranje(오렌지 공 윌리엄 William of Orange)의 증손자인 오라녜 공 빌럼 3세는 유럽에서 루이 14세의 정복 전쟁에 맞서는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1678~1679년에 맺은 네이메헌 조약 Treaty of Nijmegen으로 끝났다.

루이 14세는 비록 저지대 지방에 교두보를 거의 확보하지 못했지만 프랑슈콩테의 동부 지역을 정복·점령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루이 14세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의 자유시自由市(1681), 룩셈부르크 Luxemburg(1684), 쾰른 Köln(1688)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리고 그는 라인강 Rhine River을 건너 밀고 들어가 라인란트 Rheinland 중부 지역을 약탈·방화했다.

이 지역은 그가 자신의 불행한 처제이자 그 지역 통치자인 선제후選帝侯 팔츠 Kurfürst von der Pfalz(영어 Prince-elector of Palatinate)의 딸을 대신해 권리를 주장한 곳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침략에 대응해 오라녜 공 빌럼 3세(윌리엄 3세)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the League of Augsburg(대동맹 the Grand Alliance)을 조직했다.

이 동맹은 루이 14세에 대항해 홀란드, 잉글랜드, 에스파냐, 스웨덴 Sweden, 바이에른 Bayern, 작센 Sachsen, 라인 강 서부 팔츠 선제후령 Kurfürstentum Pfalz(영어 Electoral Palatinate) 등이 연합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일어난 9년 전쟁 the Nine Years' War(대동맹전쟁 War of the Grand Alliance,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War of the League of Augsburg)(1688~1697)은 엄청나게 파괴적이었다.

전쟁은 대부분 저지대 지방에서 치러졌지만, 아일랜드에서 인도 India 그리고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북아메리카에서는 이 전쟁을 '윌리엄 왕의 전쟁 King William's War'이라고 부른다)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마침내 1697년 라이스바이크 강화조약 Peace of Ryswick으로 루이 14세는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와 알자스 Alsace 주변 영토를 제외하고 프랑스가 근래에 획득한 대부분의 영토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 조약은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면서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 James II(재위1685~1688)를 프로테스탄트 군주인 윌리엄 3세 William III(재위 1689~1702)와 메리 2세 Mary II(재위 1688~1694)로 대체했던 명예혁명을 합법화해주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에스파냐 왕위 계승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
펠리페 5세(앙주의 필립)
루이 15세(프랑스의 왕)

재위 1621~1665년
재위 1665~1700년
재위 1700~1746년
재위 1715~1774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은 서부 및 중부 유럽에서 새로운 외교적 목표가 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목표란 프랑스 France와 같이 어느 한 나라가 너무 막강해져 유럽의 국제 체제 안에서 다른 주요 강대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을 방지하는 세력 균형의 유지였다.

이 목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전체 세력 균형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이후 200년 동안 유럽 외교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세력 균형 외교의 주요 옹호국은 잉글랜드, 네덜란드 연합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이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은 루이 14세가 동의한 목표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프랑스 인구의 약 5퍼센트에 달하는 100만 명이 1693~1694년의 프랑스 대기근으로 사망했다)으로 피폐해진 프랑스는 1697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으로 평화를 찾았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또 다른 실질적인 목표, 즉 프랑스인은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주장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신세계의 에스파냐 제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필리핀 Philippines등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첫 번째 부인은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 Felipe IV(재위 1621~1665)의 장녀였다.

펠리페 4세의 차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 Leopold I(1658~1705)와 결혼했다.

이 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펠리페 4세의 유일한 아들인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 Carlos II(재위 1665~1700)는 일생에 걸쳐 정신적·신체적으로 병약했다.

1690년대에 카를로스 2세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에스파냐 왕위 계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판돈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다.
만약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중 하나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프랑스는 연합한 합스부르크 세력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일 판이었다.

하지만 만약 루이 14세의 아들이나 손자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프랑스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압도적인 세력이 될 것이었다.

 

1690년대 동안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계획이 떠돌아다녔다.

그중 한 가지는 카를로스 2세의 조카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바이에른 공 Herzog in Bayern(영어 Duke in Bavaria)에게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시키자는 것이었지만 계획이 무르익기도 전에 그 아이가 죽고 말았다.

또 다른 제안은 이탈리아 영토 가운데 에스파냐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루이 14세에게 주고 에스파냐 제국의 나머지 영토를 레오폴트 1세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오폴트 1세는 이 제안을 묵살했다.

레오폴트 1세는 이탈리아 영토는 어찌되었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자신에게 속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있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해군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인정했던 것이다.

 

카를로스 2세의 조언자들은 이들 계획 중 어느 것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에스파냐 제국 전체를 단 한 명의 상속자에게 모두 넘겨줌으로써 분할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카를로스 2세에게 유언장에다 자신의 모든 영토를 두 가지 조건을 붙여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앙주의 필립 Philip of Anjou에게 넘겨주도록 조정했다.

그 조건은 앙주의 필립이 (어쨌든 상속에서 우선권이 있는) 자신의 형 루이 14세를 위해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그가 에스파냐 제국을 본래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유언장의 내용은 비밀로 하기로 했지만 루이 14세와 의논하기로 결정되었다.

카를로스 2세가 죽자 앙주의 필립이 펠리페 5세 Felipe V(재위 1700~1746)로서 에스파냐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되었고, 루이 14세는 프랑스 군대를 몰고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로 진격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프랑스 상인을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로 파견했으며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잉글랜드 왕으로 인정했던 것을 철회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 네덜란드 연합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Preussen(Preußen)(영어 Prussia)을 한편으로 하고 프랑스, 바이에른 Bayern, 에스파냐를 다른 한편으로 하여 전쟁이 일어났다(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War of the Spain Succession).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1702년 오라녜 공 빌럼 3세(윌리엄 3세)가 사망하자 그가 맡은 반反프랑스 연합 최고사령관 역할은 두 명의 탁월한 전략가인 잉글랜드의 말보러 공 존 처칠 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1650~1772)과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상류층 군인 사보이 공 오이겐 Prinz Eugen von Savoyen (영어 Prince Eugene of Savoy)(1663~1736)에게 넘겨졌다.

그들의 지휘 아래 연합군은 저지대 지방과 독일에서 치열한 전트를 치렀다.

그중에는 바이에른으로의 놀라운 진군도 있었는데, 블렌하임 전투 Battle of Blenheim(1704)에서 그들은 자신들에 대항해 정렬해 있던 5만 명의 군사 중 3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으며 프랑스와 바이에른 연합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후 곧이어 잉글랜드 해군은 지브롤터 Gibraltar와 미노르카 섬 Minorca을 함락함으로써 지중해에서의 전략적·상업적 교두보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본토에 새로운 군사활동 무대를 마련했다.

 

1709년 무렵 프랑스는 패망 직전에 있었다.

하지만 반프랑스 연합은 루이 14세에게 에스파냐에 있는 그의 손자에 대항한 전쟁에 가담해달라고 요구하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따라서 전쟁은 양쪽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면서 계속되었다.

8만 명의 프랑스군이 11만 명의 연합군과 맞서 싸운 말플라케 전투 Battle of Malplaquet(1709)에 서 말보러와 오이겐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2만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프랑스군 희생자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프랑스의 한 장군은 전투가 끝난 뒤 루이 14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다시 그런 전투에서 패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면, 폐하께서는 폐하의 적들이 절멸되는 것을 기대하셔도 될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앤 여왕 Queen Anne(메리 2세의 여동생이자 윌리엄 3세의 계승자)(재위 1702~1714)은 점차 전쟁에 환멸을 느꼈고 가장 유능한 장군인 말보러를 해임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상인들 또한 전쟁이 무역과 상업에 끼치고 있는 손실에 대해 소리 높여 불평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휘그당 Whig Party를 물리치고 새로 집권한 토리당 Tory Party 정부는 프랑스에 평화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사이 유럽의 외교적 상황도 바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가 1705년에 사망하고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요제프 1세 Joseph I(재위 1705~1711)마저 1711년에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의 왕권은 반프랑스 연합의 에스파냐 왕위 후보자였던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인 카를 대공大公 Archduke Karl에게 넘어가 카를 6세로 즉위했.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통치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6세 Karl VI(영어 Charles VI)(재위 1711~1740)가 에스파냐 왕위도 계승할 수 있다는 전망은 다시금 유럽 전역에서 세력 균형을 뒤흔들어놓을 가능성이 있었다.

 

 

○위트레흐트 조약

 

위트레히트 조약 이후의 1713년 유럽(출처-출처자료1)

 

전쟁은 마침내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Treaty of Utrecht으로 끝을 맺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모든 교전국에게 상당히 공정한 것이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는 에스파냐 왕으로 남았고 에스파냐의 식민지 제국을 본래대로 보유했으며, 루이 14세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결코 동일한 통치자 아래로 결합되지 않을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오스트리아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와 밀라노 Milano(영어 Milan) 및 나폴리 Napoli(영어 Naples)를 포함한 이탈리아 영토를 획득했다.

네덜란드인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국경에 대한 보호를 보장받았고, 프랑스는 릴과 스트라스부르 모두를 보유했다.

이들을 훨씬 능가하는 최대의 승자는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왕국이 된) 영국이었다.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유지했고, 뉴펀들랜드 Newfoundland, 노바스코샤 Nova Scotia 본토, 허드슨 만 Hudson Bay, 카리브 해 Caribbean Sea의 세인트키츠 섬 Saint Kitts Island을 포함한 신세계에 있는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획득했다.

또한 영국은 한층 더 값진 것으로서 에스파냐에게서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운송·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그 결과 영국은 이제 주요 노예 상인이자 18세기 세계의 지배적인 식민지 및 상업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서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조정했다.

이미 코앞에 있던 에스파냐의 붕괴는 1713년에 완결되었다.

에스파냐는 이후 2세기 동안 '유럽의 병자'로 남게 되었다.

홀란드의 쇠퇴는 에스파냐보다는 점진적이었지만, 1713년에 이르러 홀란드의 위대한 나날 역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네덜란드의 태평양 식민지인 스파이스 제도 Spice Islands[현 인도네시아 Indonesia의 말루쿠 제도 Maluku Islands(몰루카 제도 Moluccas)]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겠지만, 대서양 세계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 세력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북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이후 반 세기 동안 대결을 계속하게 된다.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식민지에 대한 세력 균형은 영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패권에 대한 신화가 산산이 깨졌다.

이제 프랑스의 육군이 아니라 영국 해군이 18세기의 새로운 제국 및 상업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2.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