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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3: 브라헤의 관찰과 케플러의 법칙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3: 브라헤의 관찰과 케플러의 법칙
새샘 2025. 4. 9. 19:00
1543년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의 ≪천체의 회전에 관해≫가 발간되고서 50년이 안 되어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us의 우주 모형에 비판적이었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 Tycho Brahe(1546~1601)와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1571~1630)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부활시키고 수정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로 간주되었다.
브라헤는 덴마크 Denmark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추구하기 위해 가문의 군사적·정치적 유산을 포기했다.
그는 재능이 있었지만 성미가 급해서 스무 살 때의 결투로 코의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처럼 전통적인 천문학의 모순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론가였던 코페르니쿠스와는 달리 브라헤는 관찰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하늘에 관한 주도면밀한 관찰이 우주의 비밀을 풀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1572년 유난히 반짝거리는 완전히 새로운 별을 관찰하고 '신성新星 nova'(나중에 '초신성超新星 supernova'으로 밝혀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브라헤의 연구에 감명을 받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 Frederick II(재위 1559~1588)는 그에게 조그만 섬을 주고 그곳에 특별히 천체관측소를 설치하기 위해 설계된 성을 짓도록 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브라헤는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천문학 자료들을 수집하며 밤하늘의 중요한 관측 대상들을 매우 세심하게 도표로 만들었다.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행성들이 궤도를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돌고 있지만, 그 체계 전체가 정지해 있는 지구의 궤도를 돈다고 암시했다.
이러한 우주의 질서에 대한 그림은 서투르긴 하지만 관측된 증거로 보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보다 더 적합한 것처럼 보였고, 코페르니쿠스 모형이 지닌 혼란스런 물리학적·신학적 뒤엉킴도 피했다.
1590년대 말 브라헤는 자신이 연구하고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프라하 Praha(영어 Prague)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신성神聖로마제국帝國 Holy Roman Empire의 황제 루돌프 2세 Rudolf II(재위 1576~1612)의 궁정 천문학자가 되었다.
프라하에서 그는 요하네스 케플러라는 젊은 수학자를 조수로 두었다.

케플러는 브라헤보다 코페르니쿠스 우주 모형에 더욱 치우쳐 있었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를 신비주의, 점성술, 수학의 종교적 힘에 대한 자신의 연구와 결합시켰다.
케플러는 인간의 영혼에서 행성의 궤도에 이르는 모든 것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이 법칙을 이해한다면 인간은 신의 지혜를 공유하고 우주의 내적 비밀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수학은 신의 언어였다.
수학적 완벽함의 유형에 대한 탐색은 케플러에게 완벽한 음악적 조화를 이루는 행성 궤도와 수학 공식 안의 집합적인 기하학적 형상을 제공했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사망한 뒤 그가 수집해놓은 관측과 계산 자료뿐만 아니라 프라하에서의 지위까지 물려받았다.
브라헤의 그 자료들은 케플러에게 행성의 천체 운행과 관련된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가정이 관측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Aristotle)의 완전 개념에 보조를 맞추어 행성 궤도는 원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 주위를 타원형의 궤도로 운행한다고 계산해냈고, 이 발견은 그의 제1법칙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의 천체 운행은 일정하고 불변이라고 주장했지만, 케플러의 제2법칙은 행성의 속도는 태양과의 거리에 따라 다르다고 기술했다.
케플러는 또한 태양과 행성 사이의 자력은 행성의 궤도 운동을 유지해준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거의 80년 뒤인 17세기 말 뉴턴 Newton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식화하는 것을 열어준 통찰력이었다.
1596년 ≪우주 구조의 신비 Mysterium Cosmographicum≫(영어 The Cosmographic Mystery)에서 1609년의 ≪새로운 천문학 Astrmornia nova≫(영어 New Astronomy)과 1619년의 ≪세계의 조화 Harmonice mundi≫(영어 Harmoniously the World)를 통해 계속된 케플러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수정하고 보강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대한 케플러의 수정은 당대 최고의 관측이었던 브라헤의 관측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했다.
새로운 위치에서 지구의 운동을 설명해줄 수 있는 규칙에 대한 케플러의 탐색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이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핵심이었던 하늘과 지구 사이의 구별을 무너뜨렸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4.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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