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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부 수술의 아버지 맥도웰

새샘 2025. 4. 5. 15:39

에프라임 맥도웰(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Ephraim_McDowell)

 

19세기 중반 프랑스 France 임상학파臨牀學派 Clinical school(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의학 갈래)의 활약과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의사들의 노력으로 유럽 Europe 및 미국 USA 각 지역에 대형 병원들이 생겨났지만 외과外科 surgery는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었다.

당시 외과 수술은 병원보다 주로 전쟁터나 환자의 집 주방 테이블에서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 University of Edinburgh in Scotland에서 유학 시절을 보냈던 에프라임 맥도웰 Ephraim McDowell(1771~1830)은 고국으로 돌아와 미국 켄터키주 댄빌 Danville in Kentucky State에서 외과의사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방광에 생긴 요석尿石이나 탈장脫腸을 수술로 치료하면서 조금씩 명성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1809년 12월 13일 제인 크로퍼드 Jane Crawford라는 여성의 진료 의뢰를 받았다.

 

크로퍼드 부인은 처음에 배가 불러와 임신 진단을 받았던 여성이다.

그런데 예정일이 훨씬 지나도록 출산의 징후조차 보이지 않은 데다 극심한 통증이 지속되자 그녀의 담당 내과의사가 맥도웰에게 연락을 취했다.

맥도웰은 고통에 시달리는 그녀에게 의심되는 진단을 알려주고, 난소 수술이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다는 점과 수술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수술 부위의 염증(복막염, 배막염)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크로퍼드 부인은 이런 통증을 안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느니 수술을 받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맥도웰은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려고 켄터키주 그린카운티 Green County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댄빌에 있는 자신의 진료실을 찾아오면 수술을 해주겠다고 했다.

거의 100킬로미터 거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힘든 몸을 이끌고 말에 올라 묵묵히 긴 거리를 이동해 맥도웰의 진료실에 도착했다.

수술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맥도웰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수술을 앞두고 신의 은총을 빌었다.

그래서 수술 날짜는 1809년 12월 25일 성탄절로 정했다.

 

수술 테이브에 묶인 크로퍼드 부인은 공포를 잊기 위해 내낸 찬송가를 불렀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아직 마취제가 등장하기 전이라 그녀는 엄청난 통증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녀가 느끼는 통증이 그대로 맥도웰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중요한 다른 장기가 다치거나 자신의 손가락이 잘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맥도웰은 최대한 수술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했다.

수술은 25분 걸렸다.

맥도웰이 그녀의 배에서 제거한 난소 종양의 무게는 무려 10.2킬로그램이었다.

약 3주 동안 안정을 취하고 나서 크로퍼드 부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 뒤 32년을 더 살다고 78세에 가족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세계 최초의 난소 종양 수술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맥도웰의 수술 성공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그는 이후에도 13명의 난소 수술을 했다.

맥도웰은 '복부 수술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는데 1830년 공교롭게도 복부 질환인 막창자꼬리염(충수염, 맹장염)으로 사망했다.

 

맥도웰이 복부 난소 종양을 잘라내는데 걸린 25분은 수술의 고통을 참는 환자 입장에서는 몇십 년에 가까운 긴 시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리 환자가 내색하지 않아도 그들의 고통은 고스란히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외과의사는 1초라도 빨리 수술을 끝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런 상황에게 섬세하고 꼼꼼한 수술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취제가 개발되고 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5. 4. 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