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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6: 그리고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뉴턴, 16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6: 그리고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뉴턴, 16장 결론
새샘 2025. 5. 2. 14:22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1642~1727)의 연구는 과학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갈릴레이 Galilei는 1600년대 초 자신의 망원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지구와 천체가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갈릴레이의 진자振子(흔들이: 줄 끝에 추를 매달아 좌우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든 물체)에 대한 실험은 운동의 법칙(그는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기존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관성慣性 inertia의 이론'을 제창했다)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물의 운동 법칙을 정연하게 밝히고 우주가 작동하는 방법에 대해 이치에 맞는 통일된 전망을 제시한 인물이 뉴턴이었다.
뉴턴은 우주의 모든 물체는 그것이 지구상에 있든지 하늘에 있든지 간에 동일한 기본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일련의 힘과 한 가지 유형은 행성이 타원 궤도를 도는 이유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유(그리고 속도)를 설명해주었다.
어느 이탈리아 Italia의 수학자는 나중에 뉴턴이 "인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운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했는데, 그 이유는 우주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가 바로 그 우주의 법칙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크리스마스 날 잉글랜드 England의 소규모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고취시키는 일은 친척, 가족의 친구들, 교장 선생 순으로 맡겨졌다.
1661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University of Cambridge의 트리니티 칼리지 Trinity College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수학 분야의 루카스 석좌교수 L ucasian Chair of Mathematics 로서 30년 동안이나 재직했다.
근대 과학의 화신이 된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숨기고자 했던 은둔적이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었다.
광학에 대한 초기 연구 기간에 그는 자신의 눈을 갖고 실험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손으로 누르며 안구의 상이한 모양이 빛의 효과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알아보고자 했으며, 자신의 안구가 실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매우 두툼한 바늘을 '가능한 한 눈의 뒷 부분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정도로 눈과 뼈 사이에' 찔러 넣으면서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도 했다.
뉴턴의 창의성이 최초로 만개한 것은 그가 "내 인생에서 발명의 전성기"라고 말했던 1664~1666년 케임브리지에서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세 가지 분야에서 초석을 놓았다.
첫째는 광학光學 optics 분야였다.
데카르트 Descartes는 색은 미립자의 회전 속도로 생겨난 부차적인 성질이지만 빛 자체는 흰색이라고 믿었다.
뉴턴은 지방 시장에서 구입한 프리즘 prism을 이용해 흰색의 빛이 서로 다른 색깔의 광선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뉴턴이 일궈낸 혁신적인 두 번째 연구 분야는 수학數學 mathematics였다.
그는 눈부신 성찰을 통해 적분과 미적분을 모두 정리해냈는데, 이는 공간에서 운동의 모형을 만들기 위한 수학적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뉴턴의 창의적 천재성이 발휘된 세 번째 분야는 중력重力 gravity에 관한 그의 초기 연구를 포함한다.
뉴턴은 나중에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설명을 했다.
예컨대 중력에 관한 생각은 그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과는 왜 "옆으로나 위로 올라가지 않고 항상 지구의 중심을 향하는가?"
"그 이유는 확실히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물질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음에 틀림없다."
18세기 프랑스 France의 평론가 볼테르 Voltaire는 뉴턴의 단순 명쾌함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중력 이론은 수학 공식에 의존한 것이었고, 단순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20년 이상 흐른 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영어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1687)가 출간될 때까지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흰 빛의 합성적 성질에 대한 뉴턴의 연구는 그를 렌즈 lens가 아닌 곡면 거울을 이용한 반사망원경反射望遠鏡 reflecting telescope)을 만드는 길로 이끌었다.
이 망원경으로 그는 왕립학회 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출되었고(1672), 마침내 케임브리지의 어두컴컴한 오두막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왕립학회의 지원으로 광학에 대한 이론을 서술하는 논문을 썼고 이것을 ≪철학적 보고서≫에 게재했다.
전 유럽 Europe의 천문학자와 과학자들은 그 논문에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왕립학회의 실험 관장인 로버트 훅 Robert Hooke(1635~1703)은 다른 입장을 보였다.
훅은 뉴턴의 논증 양식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과학이 수학적이어야 한다는 뉴턴의 주장이 독단적일 뿐만 아니라 고압적이라고 생각했다.
훅은 이 은둔적인 천재와의 일련의 날선 편지 교환에서 뉴턴이 자신이 발견 결과에 대해 아무런 물리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뉴턴은 훅과의 갈등으로 마음이 상하고 자신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자연철학자가 거의 없다는 생각에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오랫동안 자신의 연구를 공유하기를 거부했다.
뉴턴이 다시 출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오로지 친구들과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 Edmond Halley(1656~1742) 같은 동료 과학자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그중 핼리는 남반구에서의 천문학적 관측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며 혜성[핼리 혜성 Halley's Comet(공식 명칭은 1P/Halley)]에 자신의 이름이 명명된 인물이기도 했다.
1687년에 출간된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핼리에게 자극받은 완성된 저작이기도 했다.
뉴턴을 방문한 핼리는 그에게 왕립학회에서 한창 논의되고 있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 문제는 행성의 타원 궤도에 대한 수학적 근거가 있는가였다.
핼리의 질문은 뉴턴으로 하여금 그가 일찍이 천체 역학과 지구 역학을 망라하는 이론으로 만들었던 계산법을 확장하도록 자극했다.
핼리는 뉴턴의 연구를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의 출간을 감독하고 (뉴턴보다 돈이 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핼리는 또다시 훅과 다른 사람들의 비판적 보고서로 인해 화가 단단히 나 있던 뉴턴에게 연구를 계속하고 그가 발견한 것들을 출간하도록 설득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분량이 길면서도 어려웠는데,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집필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뉴턴이 "수학을 조금 아는 척하는 사람들에게 지분거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 명제는 중력은 만물에 작용하는 힘이며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뉴턴은 관성에 관한 갈릴레이의 연구, 행성의 타원 궤도에 관한 케플러 Kepler의 발견, 보일 Boyle과 데카르트의 연구, 그리고 자신의 경쟁자인 훅의 중력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언젠가 "내가 만일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뉴턴의 만유인력萬有引力(중력) 이론은 이전의 여러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연구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공식화했다.
그는 질량과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일한 서술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모든 물체에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호 중력의 원리가 부여된다."
중력의 법칙은 관찰과 실험으로 보강된 수학 공식으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만유의 공식으로 기술되었다.
하지만 뉴턴 시대에 과학적 엘리트 elite(정예精銳)들이 이를 모두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기계론 철학자들 특히 데카르트 학파는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작용하는 힘에 대한 뉴턴의 이론이 지닌 탁월함에 반대했다.
그러한 인력은 신비주의—또는 비학秘學—를 연상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동하고 있는 어떤 메커니즘(구조) mechanism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2판≫(1713)에 <일반 주해 General Scholium>라는 논문을 추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무엇이 중력을 일으키는지 모르지만 "가설을 꾸며내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계속해서 "현상에서 연역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가설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실험 철학에서는 그것이 설 자리가 없다"라고 썼다.
뉴턴에게 확실성과 객관성은 현상에 대한 엄밀한 수학적 특성화, 어느 역사가가 표현한 대로 '우주의 수학화'에 있었다.
과학은 언제나 원인을 파헤칠 수도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서술하고 실험으로 입증된 대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면 되었다.
여러 자연철학자들은 즉시 오래된 난제를 풀어낸 뉴턴의 연구에 갈채를 보냈다.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 Copernican cosmology(즉 지동설地動說)이 옳다고 확신했던 사상가들은 자전하는 지구의 물리학에 대한 조각 그림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뉴턴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핼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초판에 시 한 편을 실었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그토록 끈기 있게 함깨 일해온 사람에 대해 "(뉴턴보다) 신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노라"고 썼다.
핼리는 지적인 흥미뿐만 아니라 재정적 관심도 갖고 있었기에 이 책이 널리 알려지고 학술지에 서평이 실리도록 해주었다.
존 로크 John Locke(그의 ≪인간 오성론人間 悟性論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도 거의 같은 시기인 1690년에 집필되었다)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두 번이나 읽고 영국 해협 건너의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프랑스어로 요약했다.
1713년 무렵 유럽 전역에 배포하기 위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해적판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Amsterdam in Netherlands에서 출판되었다.
1727년 뉴턴의 임종 무렵 그는 영국의 국가적 영웅이 되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Westminster Abbey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1688~1744)는 유명한 시의 대구對句에서 뉴턴이 그의 동시대인 몇몇에게 영감을 준 데 대해 다음과 같이 경외심을 표현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뉴턴이여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자인 볼테르는 탁월한 여성 수학자였던 에밀리 뒤 샤틀레 Emilie du Chatelet(1706~1749)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뉴턴을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뒤 샤틀레는 뉴턴을 프랑스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볼테르와 한 권의 책을 공저했으며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 일은 기를 죽일 정도의 과학적·수학적 작업이었으며 볼테르의 수학적 능력을 한참 넘어서는 일이기도 했다.
뉴턴의 프랑스인 추종자들과 선전가들은 뉴턴이 발견한 것들을 널리 보급시켰다.
그들이 보기에 뉴턴은 문화적 변화, 즉 지식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대표했다.
○과학과 문화적 변화
17세기 이래로 과학은 '근대적'이 의미하는 것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과학은 점차 서양 문화를 구별해주는 중추로 성장했다.
즉, 과학적·기술적 권능은 서양 제국의 팽창과 다른 민족의 정복을 합리화시키는 이론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혁명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서양 문화의 구조를 고쳐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아직도 종종 그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어느 역사가가 쓴 것처럼 "어떠한 집도 예전의 유형과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계획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재료로 세워지지 않으며, 어떤 문화도 그 과거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대부분의 '혁명들'은 그 혁명이 선전하거나 선전된 것보다 그리 많은 전면적 개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우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변화는 엘리트의 지식과 관련된 것이다.
첫째, 보통 사람들은 매우 상이한 문화 세계에 살았다.
둘째, 자연철학자의 발견들, 예를 들어 브라헤의 수학과 갈릴레이의 관찰은 고대인의 권위를 한 방에 날려버리지 못했으며,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셋째, 과학은 종교를 와해시키지 못했다.
새로운 발견으로 전통적인 개념들이 무너졌을 때조차 자연철학자들은 신이 정한 우주라는 그림을 복구하는 일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기계론자들은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따위의 발견으로 드러난 우주의 난해함이야말로 신이 직접 현존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보일은 과학적 방법으로 '무신론을 논박'하는 일련의 강연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고, 뉴턴은 자신의 연구가 그러한 일에 기여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뉴턴은 1692년 강연자 중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보다 나를 더 기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태양과 고정된 별들"의 창조와 "지금 행성들이 보여주는 운동은 어떤 자연적 동인動因(어떤 사태를 일으키거나 변화시키는 데 작용하는 직접적인 원인)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대행자가 힘을 가한 것이기도 합니다."
과학은 최소한 17세기에 걸쳐 신의 섭리에 따른 설계라는 믿음과 철저하게 양립했다.
위대한 과학 사상가들은 '근대近代 Modern'라는 개념에 걸맞지 않는 믿음(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런 점에서 뉴턴은 가장 놀라운 경우이다.
20세기의 위대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1883~1946)는 뉴턴의 사적인 원고들을 통독한 최초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뉴턴 탄생 300주년(기념식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연기되었다)에 케인스는 이 위대한 과학자들 다음과 같이 재평가했다.
"나는 뉴턴이 그에 대한 전통적인 모습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18세기와 그 이래로 뉴턴은 최초의 가장 위대한 근대 과학자이며 우리에게 냉철하고 무결한 이성에 따라 사고하도록 가르친 합리주의자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부분적으로 흩어져 없어지기는 했지만 뉴턴이 1696년 케임브리지를 떠날 때 꾸렸던 우리에게 전해오는 상자의 내용물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를 그렇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뉴턴은 이성의 시대 최초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마법사였고 마지막 바빌로니아인 Babylonian이자 수메르인Sumerian이며, 1만 년 남짓 전에 우리의 지적 유산을 건설하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똑 같은 눈으로 지적 세계를 바라보았던 최후의 위대한 정신이었다."
이러한 시선은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 text(문서), 즉 인간에 대한 신의 말씀으로 보았다.
이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독서와 연구는 그 신비를 풀어줄 것이다.
이와 같은 충동으로 뉴턴은 마법에 관해 읽고 연금술을 행하고 그가 세부적 내용에 정통했던 교부敎父(종교상의 훌륭한 스승과 저술가)들의 저술과 성경에 몰두했다.
당시 뉴턴은 옛 전통의 마지막 대표자였으며 또한 거의 의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전통의 선구자였다.
그러면 과학혁명이 변화시킨 것은 과연 무엇인가?
17세기 자연철학자들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천문학과 물리학에 관한 오래된 의문이 다시 제기되었고 어느 정도 (비록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해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체계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축적하고 해독하고 통합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 발전했다.
이 접근 방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의 작용에 대해 훨씬 더 많은 통찰이 이루어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시기에 가장 혁신적인 과학적 연구는 교회와 대학의 구속적인 환경을 제거했다.
자연철학자들은 서로서로 대화를 시작했고 연구의 표준을 발전시키며 세속의 조직에서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왕립학회는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와 베를린 Berlin 그리고 나중에는 러시아 Russia에 비슷한 학회가 탄생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Académie des sciences(영어 Academy of Sciences)는 특히 프랑스 군주정 및 국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가는 이 아카데미에 대한 감독권을 행사했으며 학회 회원이 발견한 것에 대한 보상을 분배받고자 했다.
새로운 것은 과학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믿음이었다.
복잡한 문제를 부분들로 나누는 방식은 물리학에서 더 많은 상이한 의문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수학은 새로운 과학에서 한층 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마침내 단순히 기존의 진리들을 확인하기보다는 미지의 것을 탐구하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이 고안되었다.
케플러가 갈릴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듯이 "이론적 사색과 시각적 경험, 그리고 대척점對蹠點 Antipodes(유럽 대륙의 정반대 쪽에 있는 오세아니아 Oceania 즉 대양주大洋洲를 가리킴)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ios(영어 Ptolemy)의 논의와 콜럼버스 Columbus의 신세계 발견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컸다."
지식 자체는 재고되었다.
이전 방식에서는 알려면 읽어야 했다.
알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주장하고 고전 문헌들을 비교하고 유한한 지식의 실체를 흡수해야 했다.
하지만 보다 새로운 방식에서는 알려면 발견해야 했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한했다.
◎16장 결론
선구적 자연철학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일부는 우주의 활동을 드러내려고 했고, 일부는 인간은 단지 자연에서 관찰된 규칙성을 분류하고 서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상호 동의 아래 제1 원인(신)의 문제는 따로 남겨두었다.
새로운 과학은 '이유'는 묻지 않고 '방법'을 물었다.
뉴턴은 수학에 배열된 창조의 논리를 드러내줄 설명을 위해 연구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관찰되고 검증될 수 있는 운동과 관련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을 세웠다.
18세기 뉴턴의 후계자들은 훨씬 더 대담했다.
실험 과학과 과학 학회들의 연구는 대부분 실험자의 규칙과 한계를 지켰다.
그러나 인간 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자연철학자들은 선행자들의 경고를 잊어버렸다.
사회, 기술, 정부, 종교, 심지어 인간의 정신까지 기계 장치나 연구되어야 할 더 광범위한 자연의 일부로 여겨졌다.
과학혁명은 천 년 동안이나 이어져온 자연계에 대한 이해 방식을 바꿔버렸으며, 사상가들이 사회에서의 혁명에 더 큰 관심을 갖도록 고취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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