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람 전기 '매화초옥도' 본문
"우정이 캐럴송처럼 울려 퍼지는 그림"

12월은 창가의 햇볕이 달다.
화초가 유난히 반짝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12월은 밀린 숙제를 하듯 소식이 뜸했던 이들을 만나 회포를 나누는 감사의 달이다.
약간의 눈마저 내려준다면 금상첨화다.
첫눈이 오는 날은 소원해진 지인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전화가 망설여진다면 SNS로 그림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때론 음성보다 영상이 더 낭만적일(로맨틱할 romantic) 때가 있다.
첫눈을 선물하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의 <매화초옥도梅花書屋圖>다.
이 작품은 매화가 눈처럼 펑펑 피는 날, 친구를 찾아가는 여정을 한 장면(컷 cut)의 순간사진(스냅사진 snapshot)처럼 담았다.
둘의 우정이 난로처럼 따스하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겨울이 오면 화가들은 매화를 찾아 나선다.
매화 덕후(마니아 mania, 광狂팬)들이다.
매화를 찾아 떠나는 그림인 '탐매도探梅圖'는 그들의 인증샷(기념촬영)이었다.
매화는 사군자 중 으뜸으로 선비들이 즐겨 다룬 시와 그림의 소재였다.
매화가 문학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중국 북송대의 임포林逋(967~1028)가 시조였다.
그는 자연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 삼아(매처학자梅妻鶴子) 여생을 즐긴 학자였다.
그의 고사에서 유래된 매화는 '은둔처사隱遁處士'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매화는 문인들이 즐겨 다룬 문학의 소재로 등극한다.
그런가 하면 매화 그림도 유입되어, 조선시대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매화서옥梅花書屋' 또는 '매화초옥梅畵草屋'이라는 제목의 매화 그림은 눈송이처럼 매화가 핀 서재에서 선비가 글을 읽거나 매화를 감상하는 정경이 일반적인 양식이다.
전기의 <매화초옥도>는 매화 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는,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매화서옥도>와 쌍벽을 이룬다.
전기는 조선시대 말기 남종문인화가 전성기를 이루는데 일조한 화가다.
스물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한 탓에 기량을 마음껏 펴지 못했다.
몇 점 안 되는 유작에서 그의 인품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약방을 운영하며 그림을 그린 전기는 중인 신분으로 시와 그림 품평에 조예가 깊었다.
<매화초옥도>를 보면, 매화가 환하게 피었는데 눈까지 펑펑 내리고 있다.
이때다 싶어 초옥의 주인은 매화를 감상하기 위하여 친구를 초청했다.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적힌 '역매인형초옥적중 亦梅仁兄草屋笛中'이라는 글귀만 봐도 알 수있다.
초옥의 주인은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다.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을 편집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가 절친을 기다리며 피리를 부는 중이다.
전기는 초옥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오경석은 역관 출신으로 '매화광梅花狂'이었다.
초옥의 둘레에 매화를 빼곡히 심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호號도 '역매亦梅' , 즉 '역시亦是 매화梅花'라는 뜻이다.
그는 전기가 요절하자 상심이 컸다.
더 이상 친구와 매화 감상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행기 전기가 그려준 <매화초옥도>가 남아 있었다.
화폭에는 연둣빛 도포를 입은 오경석이 서재에서 전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옆에는 피리까지 대령했다.
언덕 아래 멀리서 붉은 도포를 입은 전기가 거문고를 메고 다리를 건너고있다.
마침내 전기의 눈에 초옥이 보인다.
친구는 전기의 언 손을 맞잡아 녹여줄 것이다.
둘은 매화를 감상하며 뜨끈한 차도 마실 것이다.
피리에 맞춰 거문고를 뜯을 생각을 하니 웃음마저 동행한다.
사방은 눈이 내려 어둑하고 매화는 별이 되어 반짝인다.
마치 성탄절 나무(크리스마스트리 christmas tree)에 불을 밝힌 것 같다.
눈은 성탄 축가(캐럴 carol)가 되어 울려퍼진다.
둥실한 먼 산에는 눈이 쌓여 있다.
짙은 먹을 찍어 산의 맥을 강조했다.
마을 아래 언덕에는 봄을 잉태한 녹색 태점이 얼굴을 내민다.
머지않아 봄이 올 모양이다.
사방이 눈으로 고요한데, 다리를 건너는 붉은 인물이 연둣빛 인물을 향하고 있다.
흰 눈을 배경으로 원색 옷을 입은 인물이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포인트 point를 주었다).
명쾌하다.
색상에 힘입어 작품은 더 수작秀作(우수한 작품)이 되었다.
12월은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달이다.
오경석이 친구인 전기를 초청했듯, 오랫동안 뜸했던 지인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전화가 어렵다면 문자로, 아니 문자보다는 <매화초옥도>를 보내보자.
그리고 그림의 주인공들처럼 얼굴을 마주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자.
<매화초옥도>의 우정은 그렇게 현실이 된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6. 3.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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