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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1: 서론 및 내셔널리즘과 1848년 혁명 1-1848년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독일 국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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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1: 서론 및 내셔널리즘과 1848년 혁명 1-1848년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독일 국민

새샘 2026. 3. 20. 11:24

◎21장 서론

 

1848년은 소란스러운 해였다.

베를린 Berlin에서 부다페스트 Budapest를 거쳐 로마 Roma(영어 Rome)에 이르기까지 반란자들은 서둘어 방어 울타리(바이케이드 barricade)를 쌓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왕과 소국의 군주들은 비록 일시적인 것이긴 했지만 황급히 퇴각했다.

대서양 너머에서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통하여 방대한 영토 거래와 더불어 멕시코 Mexico와 미국 USA의 전쟁을 종결지었다.

미국은 1,500만 달러를 주고 캘리포니아 California를 비롯한 214만 제곱킬로미터의 서부 영토를 획득했다.

이 교환은 미국의 팽창을 거의 완성시켜주었지만 남북전쟁을 이끌었던 갈등을 선도했다.

1848년 7월 세네카 폴스 총회 Seneca Falls Convention는 유럽 Europe에 필적하는 미국에서의 여성 참정권을 위한 조직적 운동의 도래를 알렸다.

≪뉴욕 헤럴드 New York Herald≫는 그해의 사건 중에서 불온한 공모관계를 탐지해 다음과 같이 신경질적으로 논평했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건 주목하는 짓은 정치적·사회적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혁명의 과업은 더 이상 구세계나 남성적 젠더(성性) gender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광부들이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을 발견한 것도 1848년이었다.

이것은 대서양 건너까지 반향을 불러일으킨 골드러시(금광 붐 boom) Gold Rush의 시작을 알렸다.

격렬한 사회적 갈등의 여름이 지난 1848년 가을에 캘리포니아의 황금 소식이 파리 Paris에 도착했을 때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1818~1883)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말했다.

"황금을 향한 꿈이 사회주의를 향한 파리 노동자들의 꿈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영토 팽창, 정권 교체, 경제 발전, 어떤 사람이 시민권을 받을 만한가에 관한 토론 따위가 모두 1848년의 문제들이었고, 내셔널리즘(국가주의) nationalism과 국가 건설 과정의 일부였다.

1848년의 격변들은 혁명 시대의 정점을 나타냈고, 그것의 실패는 그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시대는 완전한 형태로 도래하고 있었다.

20장에서 정의내린 것처럼 '내셔널리즘 nationalism'은 역사적·지리적·문화적·정치적 전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다.

역사가들이 지적했듯이, 이 생각은 강력하기도 하고 산만하기도 해서 지식인, 혁명가, 정부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권장할 수 있고 또 장려되기도 한다.

내셔널리즘은 자유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정치와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 동안 내셔널리즘은 대체로 자유주의적 목적에 연계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내셔널리즘은 보수주의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1848년은 한층 더 거대한 변모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미국의 국경선을 극적으로 바꾸어놓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같은 영토 변화는 중요했다.

그러나 정부가 작동하는 방법, 정부가 자국의 시민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변화시킨 정치 개혁과 새로운 국가 구조 역시 중요했다.

미국의 남북전쟁,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통일, 통일 독일 Unified Germany의 창건 따위는 영토뿐만 아니라 왜곡된 정치적 변화를 포함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국제 질서에 광범위한 결과를 남겼다.

프랑스 France, 영국 UK, 러시아 Russia, 오스트리아 Austria가 이 시기 동안에 재되었다.

즉, 이 나라들의 관료제는 철저한 검증을 받았고 선거권은 확대되었으며 소수민족 집단 사이의 관계도 재조직되었다,

미국의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농노제도 폐지되었다.

국가와 국가가 통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변화하는 관계는 국가 건설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은 1848년의 혁명적 대변동에 대항한 반동으로 촉진되었다.

 

◎내셔널리즘과 1848년 혁명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1848년 봄에 혁명과 이에 대한 진압이 잇달아 일어나는 어지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혁명의 근원에는 사회적 적대관계, 경제 위기, 정치적 불만 따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혁명은 또한 결정적으로 내셔널리즘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개혁가와 혁명가는 확실히 대의제 정부, 특권 폐지, 경제 발전 따위와 같은 자유주의적 목표를 갖고 있었으며, 어떤 형태의 국가적 통일을 모색했다.

실제로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Poland, 오스트리아 제국의 개혁가들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목표가 오로지 강건한 '근대적' 국민국가에서만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이들 지역에서 1848년 혁명의 운명은 정권의 반대자들을 동원하기 위한 내셔널리즘의 힘뿐만 아니라 혁명 동맹을 산산조각내고 그 밖의 동맹과 가치를 완전히 짓밟을 수 있는 내셔널리즘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누가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가? 1848년의 독일

 

1815년의 독일연합(출처-출처자료1)

 

독일의 국가 건설(1800~1850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Preußen(영어 Prussia)을 패배시킴
농노제를 폐지하는 칙령
1808년의 조례
관세 동맹 창설
자유주의자의 저항들
1848년의 혁명
프랑크푸르트 의회 모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프로이센 헌법 승인

1806년
1807
1808년
1834년
1820년대~1840년대
1848년
1848
1850

 

 

1815년에는 '독일'이란 나라가 없었다.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포함되는 그러나 폴란드와 헝가리 Hungary의 비게르만계 non-Germanic 영토들은 포함하지 않는 38개국의 느슨한 조직인 독일 연방 German Confedration을 창건했다.

이 연합은 오로지 공동의 방어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연합은 실질적인 집행권을 갖지 못했다.

사실상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그 지역에서 강대국이었기에 독일 정치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1806년 프로이센은 나폴레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즉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재위 1804~1815) 휘하의 프랑스에게 패배했다.

많은 프로이센인 Prussians은 그 패배를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the Great(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재위 1740~1786)의 통치 이래로 프로이센이 빠진 무력증에 대한 고발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센인은 '애국심과 국가적 명예 그리고 독립'의 부활을 겨냥해 위로부터 부과된 일련의 적극적인 개혁을 통과시켰다.

프로이센 개혁가들은 나폴레옹의 사례를 따라 군대를 재조직했다.

장교들은 비록 대다수가 융커 Junker라는 귀족계급에서 계속 배출되었지만 출생보다는 능력에 근거해 모집되고 승진했다.

그 밖에도 베를린에 있는 왕립 사관학교의 훈련을 근대화했고 중간계급이 공무원직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고취시켰다.

1807년에는 농노제와 장원제가 폐지되었다.

1년 뒤인 1808년에는 중간계급에게 시민으로서 스스로 독일인이라는 의식을 증대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시도로 도시와 소읍들은 자체의 시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독립적으로 재정을 관리하도록 허용되었다(사법과 치안은 베를린에 있는 중앙정부가 계속 관리했다).

프로이센의 개혁가들은 초등 및 중등 교육기관의 수를 늘렸고 몇몇 열렬한 내셔널리스트(국가주의자) natioanlist 교수진으로 채워진 베를린대학교 University of Berlin를 개교했다.

 

프로이센은 자국을 주도적인 독일 국가이자 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에 대항하는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 점에서 프로이센의 가장 중요한 승리는 1834년의 관세 동맹 Zollverein(영어 Customs union)이었다.

이것은 독일 국가들 사이에서 자유무역을 실시하고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에 대항해 통일된 관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 Georg Friedrich List(1789~1846)가 옹호한 공개적인 보호주의 정책이었다.

1840년대에 관세 동맹은 독일계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 국가들을 포함했고 제조업자에게 거의 3,400만 명에 달하는 시장을 제공했다.

1835년 이후 철도의 확산은 이 확대된 국제시장 안에서의 교환을 가속시켰다.

 

1840년대 동안 프로이센과 좀 더 소규모의 독일 국가들에서 학생들의 정치 클럽과 급진주의자들이 대의제 정부와 개혁을 향한 새로운 요구 사항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법률가, 의사, 사업가 따위의 중간계급 집단과 제휴했다.

검열에 저항하는 신문의 수가 늘어났다.

자유주의적 개혁가들은 독일 연합에 대한 프로이센의 지배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왕가 House of Habsburg의 보수주의 양쪽 모두에 분개했다.

그들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 정치적 삶을 옥죄는 전제정치와 관료적 권위의 결합을 공격했다.

그들은 독일의 국민적 자주성이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개혁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지역적 파편화를 종식시켜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V(재위 1840~1861)가 프로이센 왕위를 계승했을 때 희망은 드높았다.

이 새로운 카이저 Kaiser(황제)는 자유주의적 개혁에 동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1840년대에 경제적 문제들이 다가오자 카이저의 정권은 권위주의로 되돌아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영국산 수입품과 좀 더 전반적으로는 실업, 임금 인하, 굶주림 따위에 저항하는 슐레지엔 Schlesien 지역의 직조공 봉기를 가차 없이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정부의 무자비한 대응은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

카이저는 또한 입헌주의뿐만 아니라 입법 및 예산 문제에 어떠한 대표가 참여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프랑스에서처럼 프로이센과 독일 영방 국가들의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는 개혁 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848년 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라인 강 Rhene River 전역에 걸쳐 불만이 확산되었다.

소규모 독일 영방 국가들의 왕과 소국의 군주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혁명 운동에 굴복했다.

이들 정부는 언론의 자유, 선거, 선거권의 확대, 배심제 심판, 그리고 여러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했다.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시골에서의 사회 불안으로 동요되었고 베를린에서 250명이 사망한 군대와 혁명가들 사이의 대결에 충격을 받아 마침내 항복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독일 국민

 

혁명의 두 번째이자 가장 이상주의적 단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독일국민의회 즉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영어 Frankfurt National Assembly)'에 보낼 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그리고 소규모 독일 영방 국가들에서 온 대표들이 통일된 독일 국가 창건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대표단의 대부분은 법률가, 교수, 행정관과 같은 전문직 계층 출신이었으며, 대부분은 온건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들 중 다수는 프랑스인의 의회와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자유주의적이고 통일된 독일을 위한 헌법을 기초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오산이었다.

1789년 프랑스에는 프랑스 의회가 개혁하고 치유할 프랑스 국민국가와 중앙집권화된 최고권이 이미 존재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아무런 수단도, 차지할 아무런 최고권도, 단일한 법전도 갖고 있지 못했다.

국민의회 대표들은 11개월 동안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낡은 교회의 하나뿐인 휴게실(라운지 lounge)에서 일했기에 입법을 위해 토의하고 결정할 장소가 없었다.

국민의회는 대표들의 열의·이상주의·헌신이 넘쳐나기는 했지만, 엄청난 장애에 직면했고 때때로 대혼란 직전의 상태에서 동요했다.

 

국민의회에서 국민 문제가 논란의 초점이 되었고 이는 파괴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새 국가에서 누가 독일인이 될 것인가?

의회 대표 대다수는 독일인이란 언어, 문화 또는 지리적으로 스스로를 통일 과업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독일 국가는 가능한 한 많은 독일인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이 입장은 합스부르크 제국 Habsburg Empire이 해체되는 비참한 광경으로 말미암아 고취되었다.

이것이 '대大독일주의'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소小독일'을 요구하는 소수민족의 반대에 직면했다.

소독일의 입장은 독일계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토를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대독일주의자는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그들의 영역에 포함되기를 꺼려하는 다른 민족들 때문에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예를 들어 보헤미아의 체코인 Czechs of Bohemia은 대독일의 어떠한 일부도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힘든 논의 이후에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지지를 철회했을 때 국민의회는 소독일 해결책을 취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섰고 1849년 4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새로운 독일 국가의 왕관을 제안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국민의회가 제안한 헌법이 너무 자유주의적이고 자신의 왕권을 의회에 신세지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프로이센 군주는 왕관과 한층 더 큰 독일 국가 모두를 원했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하기를 원했다.

단기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군대에 의해 즉석에서 진압된 이후 대표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환멸을 느꼈으며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목표들이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다.

일부 대표들은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억압을 피했다.

다른 대표들은 외견상 현실주의적인 국민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유주의적 관점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프로이센에서는 군대가 혁명 세력의 잔당을 처치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대중 혁명이 나름대로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농민은 징세사무소를 약탈하고 가축을 불태웠다.

노동자는 기계를 박살냈다.

마을과 도시에서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새로운 일간 신문들이 늘어났다.

또한 정치 클럽도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 클럽 중 다수는 처음으로 여성의 가입을 허용했고(비록 여성에게 발언권은 주지 않았지만), 새로이 결성된 여성 클럽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이런 대중적 불만의 분출은 온건 개혁파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 전체 universal manhood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도 급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이 왕으로 하여금 1848년 초 봄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지만, 온건 개혁파는 그러한 저항이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들 온건파에게 민족 통일은 점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호소력을 지녔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위한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한 후보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우리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강대하고 막강한 정부를 원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습적인 군주의 권한으로 강화된 국민 주권은 어떠한 무질서와 어떠한 위법 행위도 철권鐵拳으로 진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민은 새로운 헌법과 정치공동체뿐만 아니라 준업하게 집행되는 법의 지배를 대표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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