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식물, 먼지 속에서 찾아내는 문명의 흔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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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먼지 속에서 찾아내는 문명의 흔적

새샘 2026. 4. 8. 00:11

식물고고학植物考古學 archaeobotany이라는 분야는 유적에서 발견되는 식물의 흔적을 통해서 과거 사람의 흔적을 찾는 분야를 말한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주요한 식사의 원천인 식물은 우리의 과거를 파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식물 자료는 발굴을 하는 과정에서 실제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경우(토기의 볍씨 자국, 체질을 통한 채집)도 있다.

 

그런데 몇천 년 전의 식물 흔적을 어떻게 찾아낼까?

사실 현장 고고학자가 오래된 과거의 식물 흔적을 찾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거시적인 식물 유체油體(식물 세포 속에 널리 분포하는 색소체의 일종으로, 지방 입자를 형성하여 축적됨)를 찾는 것과 보이지 않는 미시 유체를 찾는 것이다.

물론 현장에서 그것을 평가하기보다는 토양에서 체질을 하거나 시료를 채취해서 전문적으로 식물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에게 의뢰한다.

 

 

○쌀알 한 톨, 역사를 뒤바꾸다

 

2,000년 전 낙랑고분에서 발견된 탄화된 쌀알(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먼저 거시적인 식물 유체는 현장에서 탄화가 된 옛날의 식물 유체를 찾아내는 경우이다.

화재를 입은 집자리를 발굴하면 흔히 부뚜막이나 솥에서 과거에 먹던 탄화된 곡물을 발하기도 한다.

쌀이나 곡물의 낱알이 그냥 땅에 묻힌다면 싹을 틔우거나 아니면 곧 썩어서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곡물이 탄화되어 숯이 된다면 안정화되어서 세월의 압박을 견디고 고고학자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이런 고대 식물의 흔적으로서 최초로 알려진 것은 아마 충남 부여의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군창지軍倉地(군량을 찾아둔 군대의 창고)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1915년에 일본인이 부소산성을 발굴하면서 이 창고 터를 발굴하여 불탄 곡식을 발견한 바 있다.

 

이런 우연한 발견만이 전부는 아니다.

식물고고학이 과거 인간의 흔적을 파악하는 주요한 도구로 도입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단지 눈에 보이는 식물의 흔적을 찾는 것을 넘어서서 더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그중 현장에서 쉽게 쓰이는 방법은 플로테이션 floatation 기법(부유법浮遊法)이다.

집자리에서 파낸 흙을 그냥 버리지 않고 일일이 물에서 체질을 하는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다.

또한 플로테이션 기법은 한국에 도입된 최초의 식물고고학 기법이기도 한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갓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서울대의 임효재 교수는 당시 발굴하던 3,000년 전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인 여주 흔암리에서 이 기법을 사용했다.

모든 것이 열악하던 당시에 그냥 땅을 파기도 힘들었던 발굴단원은 일일이 주거지 바닥에서 퍼낸 흙을 근처의 강가로 가지고 가서 체질을 하는 노동을 했다.

하지만 집자리 안에서 탄화된 쌀알을 찾아내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흔암리의 성과는 한국인의 생계를 책임지는 벼농사의 기원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당시까지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쌀알은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김해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약 2,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리고 김해는 일본과 인접해 있으니 한국의 벼농사는 일본에서 기원한 것이라 일본학자들은 주장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곡물의 유입 경로에 대한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독자적인 문명이 없었고 고대 남한은 임나일본부와 같은 일본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던 기억이 생생하던 때였다.

그러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쌀농사 문화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은 그전에 한국 사람은 벼농사도 제대로 못 짓던 '미개'한 사람이라는 방증으로 이용될 법했다.

1970년대 당시의 농학자인 서울대 이춘녕 교수는 여러 정황 증거를 볼 때 한국의 벼농사는 만주에서 내려온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증거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흔암리에서 물체질에서 건져낸 쌀알이 벼농사의 기원이 어디인지 밝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후 50년 동안 다양한 고고학 자료가 축적되면서 한국의 벼농사는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시작되어서 만주의 랴오둥 반도를 거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는 증거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처럼 벼농사로 대표되는 한국 고대문화의 형성 과정을 파악하는 주요한 근거가 여름날 물체질로 찾아낸 쌀알 한 톨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꽃가루를 찾아서

 

과거의 식물 흔적이 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미세한 흔적을 찾아서 조사를 한다.

식물 연구에서 가장 일반적인 분석 방법은 토양 속의 꽃가루(화분花粉)를 분석하는 것이다.

봄에 알레르기를 유발할 정도로 많은 양의 꽃가루가 분출되는데, 이들은 세포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떤 종류였는지 분석이 가능하다.

꽃가루 분석으로 당시 유적에서 주로 살았던 식물, 나아가 그 식물이 살았던 환경을 분석할 수 있다.

최근에는 기술이 좀 더 발전하여 식물 세포벽에 포함된 '규조체硅藻體 diatomaceous body(규소의 껍질 화석으로 이루어진 물체)'의 분석으로 더욱 정교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꽃가루처럼 식물세포 사이에 퇴적된 규소의 흔적을 분석하는 것이다.

꽃가루처럼 몇백 년이 지나도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좀 더 세세하게 과거 사람이 먹었던 것을 밝혀낸다.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흙에서 찾아낸 증거로 재미있는 결과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예컨대 비단길(실크로드)을 따라서 5,000년 전에 동아시아로 유입된 밀과 보리를 통해서 맥주나 국수처럼 우리 삶과 밀접한 여러 요리의 기원을 찾아내고 있다.

 

식물고고학에서 곡물이 발견되면 이것이 야생종野生種(산이나 들에서 자연적으로 교배되어 생육되는 생물종)인지 또는 순화종馴化種(기후가 다른 지역에 옮겨진 생물이 점차로 그 환경에 적응하는 체질로 변화된 생물종)인지도 밝혀낸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시작을 밝혀내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은 무엇일까.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등장? 청동기의 발명? 석기의 사용? 직립보행?

모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를 탄생시키는 단초가 된 농경의 도입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도시, 국가, 상수도, 그리고 전염병에 이르는 현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쇄적인 발달의 처음에는 농사農事 farming라는 인간의 선택이 있었다.

 

 

○농사라는 위험한 도박

 

농사는 대체로 1만 2,000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세계 곳곳에서 그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예전에는 근동近東(중동) 지역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처음 발생해서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설이 우세했고, 지금 고고학계는 근동 기원보다는 다 지역 기원설을 더 지지한다.

아시아의 경우 중국에서 약 1만 년 전에 농사가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나왔다.

신대륙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어서 남아메리카에서 약 1만 2,000년 전부터 호박, 박, 구근류 같은 것이 재배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신대륙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만 6,000년 전에 매머드 mammoth 사냥꾼이 베링해 Bering Sea를 건넌 이후이다.

그로부터 고작 몇천 년 뒤에 구대륙과 다른 지형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농사를 지은 증거가 나왔다.

이때에 근동이나 아시아에서 새롭게 배웠을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독자적으로 발달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농사는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경제활동이 되었다.

특히 농경사회인 한반도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을 '오랑캐' 또는 '미개인'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농사는 인류의 진화와 역사에서 돌연변이처럼 등장한 혁명적 사건이다.

인류의 역사를 400만 년이라고 할 때 거의 99.8퍼센트만큼의 시간은 사냥과 채집을 하며 자연에서 탄력적으로 음식을 얻었다.

즉, '미개인'의 삶은 인간의 진화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전통적인 '현생인류(사피엔스)'적인 방법이라는 뜻이다.

처음 농사는 지금과 같은 대대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사냥과 채집의 보조수단으로 마치 텃밭을 키우는 것처럼 약간의 농산물을 생산해서 마치 보험처럼 삶의 위기에 대처했다.

따지고 보면 씨앗에서 똑같은 곡물이 자란다는 것은 약간의 지능과 관찰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농사 자체를 도입한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단순한 보조 수단을 넘어서 전적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농사에 맡기는 '농부'가 되어가는 과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미스테리 mystery)가 아닐 수 없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과정에 대한 많은 이론은 그것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책이 연작聯作(시리즈 series)으로 나올 수 있을 정도이다.

어쩌면 농사는 인간의 '두발걷기(직립보행直立步行)'과 함께 영원한 화두일 것이다.

 

분명한 점은 농사는 위험한 도박이라는 것이다.

농업의 도입은 두발걷기와도 비교된다.

두발걷기는 동물적인 능력을 희생해서 죽을 가능성이 높아진 대신 두뇌의 발전을 가져온 도박이었다.

농업의 경우도 비슷해서 삶의 유연성과 풍부한 영양 공급을 포기하고 대신에 사람들의 집단 지혜와 협력에 의지한 것이다.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하다면 자연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에 대한 적응성이 강하다.

삶의 위기가 오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다.

반면에 농사를 짓는 순간 사람은 좋든 싫든 한 지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농사에 걸어야 한다.

게다가 영양상태마저 좋지 못했다.

자연에서 나는 다양한 음식 자원을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곡물을 키우고 그것을 1년 내내 먹어야 했다.

한마디로 비자발적 '원 푸드 다이어트 One food diet'인 셈이다.

농사를 하면서 인간의 키는 더 작아졌고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장점도 많았는데, 무엇보다 인간 삶에서 예상할 수 없는 요인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속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늘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은 빠르게 발전해갔다.

 

고고학계에서는 빙하기가 끝난 직후 세계 곳곳에서 농사가 도입되면서 인간 역사는 크게 바뀐다고 하여 이것을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이란 무언가 이념을 둘러싼 투쟁을 뜻하는 듯하기 때문에 좀 과격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 용어를 처음 제안했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 Vere Gordon Childe가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등장했다는 말도 일부는 맞다.

하지만 농사가 지닌 잠재력을 생각하면 혁명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농경은 인간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고 심지어 계급과 집단 간 투쟁을 격화시키기도 했으니 역사상에 수많은 혁명과 갈등의 시작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셈이다.

 

 

○쌀농사가 바꾼 한반도의 풍경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쌀농사의 기원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여주 흔암리에서 물체질로 밝혀졌다.

하지만 3,000년 전에 도입된 것은 쌀농사이며 그 이전에도 농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농사가 대략 6,000년 전쯤에 시작되었다.

물론 대대적인 농업이 아니라 소규모였고, 화전농법도 도입된 흔적이 있다.

남한에서는 약 5,000년 전에 금강 유역 일대의 중부 지역 내륙에서 곡물을 보관한 대형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원래 신석기시대 사람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안가에서 살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륙의 산악 지역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한다.

화전 농사로 생계를 보조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이며, 농사의 도입은 한반도도 '균형 발전'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규모는 작아서 마을이 기껏해야 집이 30~40개밖에 안 되는 소형이었고, 약 4,000년 전부터 다시 기후가 추워지면서 그나마 있었던 원시적인 농업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농촌의 모습으로 바뀌는 시점은 대체로 3,000년 전 우리나라에 쌀농사가 도입되면서였다.

벼는 원래 아열대식물이기 때문에 동남아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는 게 맞다.

한국 같은 지역에서 벼는 자칫 가뭄이나 냉해 같은 피해를 입기 십상이다.

그러니 자칫 벼농사에 실패한다면 공동체는 전멸할 수도 있다.

농사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청동기시대에는 쌀보다는 오히려 구황작물로 더 잘 알려진 메밀, 수수, 기장 같은 잡곡이 더 안정적일 것이다.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쌀농사가 널리 퍼진 이유는 바로 도입 경로와 관련이 있다.

한국의 쌀농사는 동남아나 중국 남쪽에서 직접 전달된 것이 아니다.

쌀농사가 중국 대륙에서 점차 북상하고 나중에 만주 지역의 랴오둥반도를 거쳐서 한반도 남쪽으로 멀리 돌아서 퍼진 것이다.

한국보다 더 추운 랴오둥반도를 거쳐서 들어온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과정에서 쌀은 냉해를 견딜 수 있도록 개량되었고, 논에 모내기를 하고 추운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다양한 농사 기법의 비결(노하우 knowhow)도 함께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쌀농사를 짓는 대표적인 지역이 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쌀농사가 확인된 송국리문화의 집자리(출처-출처자료1)

 

고고학자들은 3,000년 전 호남 지역 평야를 중심으로 널리 유행한 최초의 쌀농사를 송국리문화松菊里文化라고 부른다.

이때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몇백 개의집으로 구성된 마을이 생겼다.

마치 규격화된 뉴타운 newtown의 아파트처럼 획일화된 소규모 집이 지어졌다.

충남 부여군 조촌면 송국리 일대의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인 송국리문화에서 가장 흔한 집자리는 지름이 5미터 전후인 원형으로, 그 가운데에 마치 돼지코처럼 생긴 기둥구멍이 특징이다.

가끔 큰 집도 있지만 그렇게 뚜렷하게 계급이 보이진 않는다.

사람들의 삶은 비슷한 양상(패턴 pattern)으로 바뀌었다.

벼농사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수산업은 사라져 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탓에 신석기시대에 다양한 해산물을 잡아먹고 조개무지가 발달했던 한반도였다.

하지만 3,000년 전 쌀농사가 도입되면서 청동기시대에는 깜쪽같이 조개무지가 사라졌다.

심지어 다도해나 신안 같은 섬에서도 농사를 짓고 고인돌을 만들 정도였다.

나중에 송국리문화의 쌀농사를 짓는 사람은 경상남도 지역까지 진출했다.

송국리문화의 사람이 살던 동네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하는, 뒤에 산이 있고 앞쪽에 너른 평야와 강이 흐르는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이들의 마을이 들어섰다.

 

 

2,400년 전 밭을 가는 사람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 보물로 지정된 농경문 청동기(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1년 내내 같은 사람과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단조로운 과정이다.

심지어 가뭄이나 기근이라도 든다면 1년의 노동은 한번에 무위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제사와 공동체 생활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

농한기를 이용해서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고 여러 의례를 벌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농경문農耕文 청동기靑銅器'는 농사가 불러온 제사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농경문 청동기 뒤쪽에는 나무 위에 새가 앉아 있는 솟대가 있고, 앞쪽에는 벌거벗은 채로 밭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옆에는 술을 담은 단지가 놓여 있다.

실제로 고인돌을 발굴하면 그 주변에 깨진 토기가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음복을 하고 그 단지를 깬 흔적이다.

농경문 청동기의 그림은 단순히 농사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샤먼이 알몸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장면이다.

실제로 이렇게 벌거벗고 봄에 밭을 가는 의식은 조선시대 경기도 일대에도 있었던 풍습이다.

당시 한국에 철기도 막 도입되었는데, 족장이나 샤먼의 무덤에는 화려한 청동기와 함께 나무를 베고 밭을 갈 수 있는 새 철제 농기구가 함께 껴묻혔다.

마치 조선시대 선농단에서 왕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2,400년 전 호남 지역의 족장은 농기구를 손에 쥐고 제사를 지냈으니, 강력하고 든든한 철제 농기구는 풍요와 단합의 상징이었다.

 

이런 제의는 단순한 오락거리 이상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다.

농사가 도입되면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바로 기후의 변화이다.

강우량과 날씨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집단의 생존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점을 치고 천문학적인 정보를 동원하는 따위의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장악했고, 지역 간의 비결은 교환되었다.

또한 관개시설 같은 집단의 힘이 필요한 사업은 물론, 농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분쟁을 조정하는 행정력도 필요했다.

 

한편 전쟁이나 갈등의 빈도도 더욱 심해졌다.

농사를 짓는다면 쌀의 생산량이 적은 해에는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기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사냥과 채집을 포기한 탓에 대체 식량 획득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약탈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고 울짱(목책木柵, 나무울타리)을 쌓는 것이 당연해졌고 곡식을 약탈하는 야생동물이나 적의 침략을 막았다.

화재 같은 사고 또한 빈번해졌다.

농사는 요리에 불의 사용이 일상화된다.

약간의 부주의도 큰 화재, 나아가 부족의 멸망과도 이어진다.

그러니 마을 공동체에서 감시와 통제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사회조직도 빠르게 갖추어져 갔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다.

농경의 도입은 인간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농경이 인간 사회에 도입된 이후에는 그로 야기된 사회의 변화가 인간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을 급격히 바꾸었다.

 

 

○농사가 가져온 양면성

 

고고학자는 지금도 현장에서 보물 대신에 열심히 흙을 파고 체질을 한다.

그 과정은 일반인의 시선에는 굳이 먼지 구덩이에서 고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밝히고자 하는 농경, 그리고 식물의 흔적은 바로 인간 역사의 주요한 상황을 보여준다.

인간 역사에서 농경의 도입은 마치 관현악단(오케스트라 orchestra)의 작은 지휘봉 같다.

관현악단 지휘자의 손끝에서 움직이는 지휘봉에 몇십 개의 악기들이 일제히 움직이듯이 농사가 사방에 확산되자 사회 전체 체계(시스템 system), 경제 그리고 종교까지 큰 영향을 받았다.

농사를 도입하던 당시 세계의 인구는 100만 명 남짓했다.

현대 인구는 지금 80억 명에 육박한다.

100억 명도 머지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지구는 코로나19처럼 급격한 인간 문명의 폐해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사의 도입이 인간에게 과연 필요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학자도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인류세라는 명칭과 함께 수많은 갈등과 환경 파괴처럼 인류와 지구라는 환경에 심각한 폐해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농사라는 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글자도, 도시도, 어떠한 기술도 가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인간의 위기를 대처하는 지혜를 모으고 서로 논의하는 것도 결국 농사라는 시스템에서 더욱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1만 2,000년 전의 위대한 도박처럼 다시 한번 인간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지 모른다.

고고학이 찾아내고 있는 농사의 비밀은 이렇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4.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