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중섭 '신문을 보는 사람들' 본문

글과 그림

이중섭 '신문을 보는 사람들'

새샘 2026. 6. 1. 14:42

신문은 '힐링 캠프'

 

이중섭, 신문을 보는 사람들, 1950년대, 은지에 채색, 8.3x15.4cm, 뉴욕 현대미술관(출처-출처자료1)

 

날마다 새벽, 현관문을 툭 치는 소리에 잠을 깬다.

신문이 배달되었다는 신호다.

둔탁한 소리는 하루 일과를 여는 알림이다.

새벽 공기를 품은 신문의 인쇄향이 코끝을 건드린다.

필자는 이중섭의 은지화銀紙畵(양담배값 속의 은박지 종이를 반듯하게 펴서 예리한 철촉필鐵鏃筆(쇠로 만든 화살촉처럼 생긴 붓으로 종이가 뚫어지지 않을 만큼 눌러 윤관선을 그린 뒤, 검정이나 흑갈색의 물감, 또는 먹물을 솜, 헝겊으로 문질러 선묘를 도드라지게 하여 제작된 그림)로 <신문을 보는 사람들>처럼 신문을 펼친다.

지면 넘어가는 소리가 싱그럽다.

 

먼저 신문을 펼쳐서 주요 내용을 훑는다.

기사 제목에서 오늘의 기류를 감지한다.

그리고 눈에 띄는 기사를 읽는다.

무거운 사건 사고는 확인만 하고, 뒷면으로 갈수록 꼼꼼히 확인(체크 check)한다.

 

필자는 기사를 골라보는 편식주의자다.

특정 기자의 기사를 찾아서 읽고, 좋아하는 특별 기고(칼럼 column)를 챙긴다.

뜻하지 않게 귀한 회견(인터뷰 interview)을 만나면 횡재한 기분이 든다.

직접 접할 수 없는 인물을 회견이나 기사로 만나서 귀한 속내까지 듣게 되니 얼마나 유익한가.

때로는 신간서적 구역(코너 corner)에서 영감(아이디어 idea)을 낚기도 한다.

문화면은 문화예술계의 최신 소식을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정보 기반(플랫폼 platform)이다.

때로는 TV 뉴스에서 놓쳤거나 자세히 알고 싶은 사건도 신문에서 확인한다.

 

몇몇 기사를 정독하면서 색다른 정보와 번뜩이는 생각에 자극을 받는다.

아예 빨간 펜을 들고 집중 탐색한다.

신문은 필자에게 영감의 충전소이자 '치유 근거지(힐링캠프 healing camp)'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어느 정도 지루할 즈음에는 지역 신문이 오후를 부축한다.

석간은 주로 문화면에 초점을 두고 보는 편이다.

다양한 정보를 한 공간에서 확인하며, 그때그때 문화예술계의 지형을 파악한다.

어쩌다가 지인의 기사라도 실렸으면, 반갑게 눈빛을 주고받는다.

 

신문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그 속에는 신선하고 맑은 세계가 있는가 하면 끔찍한 사건이 있다.

소외당한 이들의 억울한 사연도 있지만 가슴 따뜻한 사연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누군가에는 한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는 창작의 영감을 뒤띔해주는 지도자(멘토 mentor)가 되고,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누리망(인터넷 internet)이 최첨단의 정보를 공급하고 있지만 종이신문의 매력을 누를 수는 없다.

전자(디지털 digital)매체가 기사를 훑어보게 한다면, 종이신문은 지면을 넘기면서 천천히 생각하게 만든다.

꽉 짜인 편집 설계(디자인 design)는 기사들의 중요도와 지면의 조형미를 음미하게 한다.

화가들이 경영하는 화폭의 구도와 신문이 구사하는 지면의 편집 설계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화가인 필자는 기사만 읽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편집 설계된 기사를 읽는다.

그림을 감상하듯이 이뤄지는 지면 감상은 기사 읽기와 동시에 이뤄진다.

여기에 추임새를 더해주는 사진과 종이의 미묘한 질감은 전자매체의 매끈함에 양보할 수 없는 종이매체만의 미덕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아날로그(연속형) analogue 인간임이 분명하다.

 

오늘도 종이신문을 펼치며 바깥세상과 마주한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6. 6.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