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조선 국왕의 상징 "일월오봉병" 본문

글과 그림

조선 국왕의 상징 "일월오봉병"

새샘 2009. 1. 13. 22:20

"우주의 이치를 내 한 몸에 갖추기 위해"

<작가 미상,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162.6×337.4㎝, 삼성미술관 리움>

 

 

경복궁 근정전에는 조선 국왕의 자리인 용상龍床이 있다.  이 용상은 아래로 단을 돋우고 위로 닫집이 내려져 있고, 뒤에 병풍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병풍이름이 바로 아래 그림에서 보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다.

 

조선의 국왕은 반드시 이 일월오봉병 앞에 앉는다. 다시 말해 이 병풍이 뒤에 없는 사람은 조선왕이 아닌 것이다. 대궐 안에서는 물론 멀리 능행차를 할 때도 따로 조그만 일월오봉병을 휴대했다가 멈추면 곧 이 병풍을 친다. 심지어는 왕이 돌아가셔도 관 뒤에다 이걸 친다. 그리고 어진御眞 즉 임금의 초상화를 건 뒤에도 반드시 이 병풍을 친다. 한마디로 일월오봉병은 조선국왕의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궁중의 행사내용을 그린 의궤 그림들에서 국왕이 위치한 자리에는 국왕을 직접 그리는 대신 이 병풍만 그려 넣는다.

 

그런데 이 일월오봉병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이 병풍에 주역에서 말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첫째, 푸른 하늘에는 붉은 해와 하얀 보름달이 동시에 떠 있다. 해와 달은 음양이다.

 둘째,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오행이다. 도덕을 말하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되는 것이다.

 셋째, 비가 내려 산봉우리 사이로 흘러 못물이 폭포수처럼 출렁거리며 흘러내린다.

 넷째, 물은 뭍으로 흐르고 뭍에서 나무 즉 만물이 자란다.

 이 것을 연결하면 하늘에서 햇빛과 달빛이  내리고 또 자애로운 비가 내려서 못물이 출렁거리는데, 하늘天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반면 땅地은 뭍과 물의 둘로 끊어져 있다. 비가 내려 만물이 자라나는데 그 숱한 만물 가운데 대표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람人이다.

 

사람은 음양오행의 가장 순수한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가장 슬기로울뿐더러 동물에게 없는 도덕심까지 가지고 있다. 그렇게해서 천지인天地人 우주를 이루는 세 가지 재질인 삼재三才가 모두 갖추어지게 된다. 여기서 삼재란 세 가지 재주가 아니다. 동양철학에서는 글자를 쓸 적에 추상적으로 쓰기 위해 한자의 변을 떼는 관행이 있어 원래 천지인의 세 가지 재질을 의미하는 삼재三材에서 나무 木변을 뗀 것이다. 이 삼재가 참 중요하다.

 

아침 일찍 임금이 일어나 깨끗이 씻고 옷차림을 갖추고 조정 일을 살피러 나와 가지고 공손하니 빈 마음으로 용상에 정좌를 할 때의 형상을 한번 생각해보자. 즉 천지인의 석 삼三 자를 그은 정중앙에 이렇게 올곧은 마음을 똑바로 섰을 때나 백성들을 위해 바른 마음 하나로 반드시 앉았을 때 바로 임금 왕王 자가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주 한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큰 뜻을 세우는 순간 천지인의 우주질서가 바로잡힌다는 의미가 일월오봉병에 담겨 있는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한자 해설서를 보면 석 삼三 자는 우주의 삼재를 뜻한다는 설명이 있고, 임금 왕王 자는 그 삼재를 하늘로부터 인간을 거쳐 땅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관철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일월오봉병의 그림은 그 자체로서는 미완성이다. 우주의 하늘, 자연과 땅이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아직 미완성인 것이다. 오직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 덕을 받들어 성실하게 행하는 착한 임금이 한가운데 앉아 있을 때에만 이 그림의 뜻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임금은 어떤 뜻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가? "주역"에 설명된 하늘 괘인 건健에 대해서는 '천행天行이 건健하니, 군자君子 이以하야 자강불식自疆不息하나니라'라는 글귀가 있다. 이 뜻은 '천체의 운행은 굳건하니, 군자는 하늘 위 천체의 질서있는 움직임을 본받아 스스로 쉬지 않고 굳세게, 굳세게 행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하늘의 해와 달이 지각하는 일이 없듯이 이를 본받아 군자는 늘 옳은 일에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 괘 곤坤에 대해서는 '지세地勢 곤坤이니 군자君子 이以하야 후덕재물厚德載物하나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군자는 그 넓은 땅에 저렇게 두텁게 흙이 쌓여 있듯이 자신의 덕을 깊고 넓게 쌓아서, 온 세상 모든 생명체를 하나같이 자애롭게 이끌어 나간다'는 뜻이다.

 

이렇게 일월오봉병의 천지인 三才앞에 서는 임금은 항상 스스로를 쉬지 않고 굳세게 옳은 일을 끊임없이 행하며, 자신의 덕을 깊고 넓게 쌓아서 온 세상 모든 생명체를 하나같이 자애롭게 이끌어 나간다는 큰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위 글은 고 오주석 선생의 명저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솔, 2003)에 수록된 글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임을 알린다.

 

2009. 1.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