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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주상관매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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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주상관매도"

새샘 2009. 2. 19. 23:20

조선화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음악가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였다.

이것은 다른 화가에 비하여 음악을 소재로 한 단원의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만아니라, 단원의 퉁소, 생황, 거문고 등 악기연주 솜씨가 탁월하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 오주석 선생은 단원을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로는 부족하여 시서화악詩書畵樂 4절四絶이라고 부른다.

음악을 소재로 한 단원 그림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삼현육각三絃六角[북, 장구, 향피리(목피리), 세피리(곁피리), 대금(젓대), 해금]과 춤추는 소년을 그린 <무동>을 비롯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졌던 조촐한 모임에서 거문고 타는 단원 자신의 모습을 그린 <단원도檀園圖>, 당비파를 뜯는 모습이 그려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생황부는 모습이 그려진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 퉁소부는 소년을 그린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 등이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는 악기를 소재로 한 그림이 아니면서도 음악과 문학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지는 명작이라고 고 오주석 선생은 평가하였다.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김홍도, 종이에 수묵담채, 164×76㎝, 개인 소장)

 

이 그림을 처음 보면 사람이면 누구나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을 느낄 것이다. 마치 여유롭고 유장한 시조가락이 허공 중에 여운을 날리며 떠도는 듯하다. 그것은 넓디넓은 여백 때문이리라. 화폭은 어른의 키만큼이나 커다란데 거기에 그려진 경물景物은 화면의 1/5도 채 되지 않는다. 뿌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속에 얼비치고 있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꼬리를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느긋이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여백이 하도 넓다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이 그림의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단원 자신이 지은 평시조 한 수를 들어보자. 평시조는 직접 소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잎새같은 조각배는 둥실둥실 흔들리며 기운없는 노인에게 가벼운 어지럼증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늙은 눈에 보이는 저 꽃나무는 어슬프레하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둣하다." 그림은 바로 위 시조 그대로이고, 시조는 그림을 꼭 빼닮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읊조리는 듯 단원은 화폭 중간 오른쪽에 화제畵題를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늙은 나이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을 보는 듯하네"라고 썼다.

이렇게 <주상관매도>에서는 위 시조가 절묘하게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주상관매도>에서는 그려진 경물보다 에워싼 여백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 보일 듯 말 듯한 느낌은 마치 지금은 들리지 않는 노년의 단원 김홍도, 그분이 소리하는 가녀린 시조창인 듯 느껴진다.

 

허공 중에 아스라히 떠오른 언덕, 그것은 신기루와도 같다. 그림 한복판의 언덕은 짙은 먹선으로 초점이 잡혀 있지만 오른쪽과 왼쪽으로 뻗어나가는 필선은 점점 붓질이 약해지고 말라가면서 뿌연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꽃나무도 마찬가지다. 가운데 가지 하나가 쨍하고 짙게 보이지만 그 좌우로 가면서 점점 흐릿해져 마침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나무 아래 언덕의 주름도 꽃나무와 같은 붓질이다.

 

경물과 여백이 서로에게 안기고 스며드는 이 작품의 시적인 공간감각은 김홍도 노년기 산수화에 엿보이는 특징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저 언덕의 모습은 실제 풍경일까? 아니다. 언덕과 꽃나무는 우리가 바라본 것도, 맞은편에 앉은 뱃사공이 바라본 것도 아니다. 바로 그림 속의 주인공인 주황빛 도포를 걸친 노인의 늙은 눈에 얼비친 풍경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림 속의 노인이 바라보는 풍경이 그대로 화폭 위로 떠오른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우리 옛그림의 맛이 아닐 수 없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저 언덕 위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 아래쪽은 저절로 뿌예질 수밖에 없다. 작가 김홍도는 완전히 저 노인과 한마음이다. 그러므로 화가의 시선 또한 작품의 하변 바닥까지 내려와서 노인이 타고 있는 배를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것처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고 오주석 선생은 단원의 이 <주상관매도>를 위대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위대한 작품은 훌륭한 박물관에서 감상하기에 적합한 것이라면, 사랑스러운 작품은 나만의 서재에 걸어두고 늘 가까이하며 바라보고 싶은 그림이라는 것이다. 만약 하늘이 꿈속에서나마 소원하는 옛그림 한 점을 가질 수 있는 복을 준다고 하면 그는 주저없이 <주상관매도>를 고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이 그림에서 단원 김홍도의 시, 그림, 글씨, 그리고 음악가락까지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고 오주석 선생이 지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1999, 솔)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09. 2. 1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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