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단원 김홍도 "마상청앵도" 본문

글과 그림

단원 김홍도 "마상청앵도"

새샘 2009. 3. 31. 16:10

"꾀꼬리에 앗긴 선비 마음, 봄이, 영원한 봄이 그 안에 있다"

마상청앵도, 종이에 수묵, 117×52.2㎝, 간송미술관

 

따사로운 봄날 점잖은 선비가 말구종 아이를 앞세우고 길을 나섰다.

오른손은 고삐 쥐고 왼손엔 쥘부채를 반쯤 펴 가볍게 들었으며, 종아리엔 가뿐하게 행전을 쳤고 두 발은 발막신을 신어 슬쩍 등자에 걸쳤다.

알맞게 마른 먹선으로 가늘게 그은 옷의 윤곽선 이 양반의 옷매무새를 더없이 깔끔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말 꾸밈은 수수해서 번거로운 방울 하나 달지 않고, 등자 뒤 다래조차 그저 민패일 뿐이지만, 다래 오른편에 드림 한 줄이 길게 늘어져 풍류가 넘친다.

 

사위는 고즈넉해서 보이는 것은 오직 한 줄기 좁은 길과 길가에 선 버드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잡풀 무더기뿐이다.

왠지 날이 따뜻하게 느껴진는 건 아마도 버드나무 잔가지가 굽이쳐 능청스런 곡선을 그었기 때문이리라.

늦봄이면 버드나무의 잔가지는 축축 늘어지기 마련이어서 이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은 느긋하고도 여유로워진다

봄빛을 담은 버들가지에는 연둣빛 새 이파리가 움돋는다.

한 당나라 시인은 일찍이 봄의 버들가지를 일러 "천 줄기 금실이요 만 줄기 명주실이라" 읊은 바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실 가닥 같아 셀 수 없는 길고 부드러운 버들가지을 일컬음이다.

 

이렇게 화폭 전체에 가득 번진 봄빛으로 미루어 화가는 봄기운에 푹 젖었다

눈에 띄는 것은 붓 닿는 대로 툭툭 친 버들 이파리다.

그럼에도 영락없는 버들 이파리다.

버들 이파리에 떠도는 이런 봄빛은 말에서도 느껴진다.

머리 굴레며 가슴걸이, 뒷다리 위로 맨 끈이며, 길게 드린 드림 모두 톡톡 찍은 점으로 그려진 까닭이다.

버들잎과 어울리는 이 작은 점들은 말다래 오른편 아래와 말의 앞발 가에도 보여, 선비의 마음과 버들잎의 마음이 한 가지 봄빛에 물들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건 잔가지를 그린 수법이다.

선비의 코앞까지 드리워진 실가지 이파리들을 보라.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오고 있는 양, 가지도 없이 나부끼는 이파리로만 열을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옛그림에서 이르는 바, 필단의연筆斷意連의 경계이니, 붓 선은 끊겼으되 속뜻이 절로 이어진다.

그린 이의 가슴속에 봄볕이 이미 가득한데 구태여 가지까지 일일이 그려 넣을 필요가 있으랴!

없는 저 잔가지를 챙겨 보는 것이야 감상자의 몫이리라.

 

이번에는 말을 한번 보자.

앞다리는 주춤하고 나란히 섰고 뒷다리는 아직 어정쩡하니, 아마도 그 주인이 막 고삐를 당긴 모양이다.

무엇인가?

선비는 순간 고개를 들어 오른쪽 나무 위를 치켜 보고, 구종 아이도 주인을 따라 나란히 시선을 옮겼다.

고요한 봄날의 정적 속에 '삣! 삐요꼬 삐요!' 환하게 퍼지는 소리가 지척간 버드나무 위에서 들려온다.

온몸에 선명한 황금빛을 두른 노란 꾀꼬리 한 쌍이다.

선비는 말 위에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어여쁜 꾀꼬리가 노래하는 갖은 소리 굴림을 듣는다.

참 맑고 반가운 음성이요 생각 밖의 곱고 앙증맞은 자태가 아닌가.

선비의 입에서 절로 제시題詩 한 수가 터져 나온다.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가인화저황천설 佳人花底簧千舌)

 운치 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다가 밀감 한 쌍을 올려놓았나  (운사준전감이쌍 韻士樽前柑一雙)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여, 수양버들 물가를 오고가더니 (역란금사양류애 歷亂金梭楊柳崖)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강에 고운 깁을 짜고있구나  (야연화우직춘강 惹烟和雨織春江)"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는 건' 울음 재주 좋은 새 꾀꼬리의 고운 음성이다.

'운치 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 올려놓은 밀감 한 쌍'은 눈부시게 샛노란 꾀꼬리의 씻은 듯 깨끗한 모습이다.

어여쁘다 꾀꼬리야, 수양버들 실가지 위아래로 무엇이 바빠 그리 오르내리느냐?

마치 명주 짜는 베틀 속의 황금빛 북 모양으로 오락가락 눈길이 어지럽구나.

오호라!

그러고 보니 이 봄날의 아슴푸레한 안개와 보일 듯 말 듯한 실비가 모두 네가 짜서 드리운 고운 깁이었단 말이냐!

 

선비의 뒤쪽 배경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뿌옇고 막막한 그림 바탕이 있을 뿐이다. 텅 빈 여백!

이 여백 속에는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

강이 있고 그 강 건너 맞은편 기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화면에는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다.

꾀꼬리가 안개와 봄비를 이끌어 봄 강에 고운 깁을 짜서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비는 지금 실비를 맞고 있다.

다만 꾀꼬리 노랫가락에 마냥 도취된 탓에 사랑스런 아내가 갈무리해준 도포는커녕 속옷까지 젖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마치 위대한 음악의 중간에 침묵의 몇 초를 기다리는 순간과 같은 마음 졸임이 있는 까닭이다.

침묵의 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들어낸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위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좁은 길에 오른편 위에서 왼편 아래로 흐르는, 삼중으로 겹쳐진 사선,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비스듬한 버드나무 가지와 그것을 치켜보는 선비와 동자의 시선, 끝으로 왼편 위에 있는 제시가 멀리서 아래 빗금들이 조성한 공간감을 되받아 아련하게 메아리친다.

제시를 보면 이따금씩 크고 짙게 쓴 글씨가 일정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행을 건너뛰며 사선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제시 자체가 강약의 운율을 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아래쪽 비스듬한 구도 선과 절묘한 조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버드나무에 앉아 있는 한 쌍의 뻐꾸기 부문을 확대해 보았다.

꾀꼬리 부부는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그려져 있어 꾀꼬리인지 병아리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사람이 늙으면 동심이 된다더니, 이것은 단원이 환갑 전후에 그린 그림이 분명하다.

맨 앞에 올린 전체 그림 속의 뻐꾸기는 형체만 짐작할 정도로 작은 크기다.

그런데 뻐꾸기 부분만을 확대한 그림에서 뻐꾸기의 형태가 더욱 뚜렷해진다. 
적은 크기의 사진을 확대하면 형태가 점차 흐릿해지는게 일반적인데 이 그림의 뻐꾸기는 확대 했을 때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 옛그림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는 크기가 아무리 작더라도 그 묘사는 아주 세밀하기 때문에 확대하면 더욱 뚜렷해 진다는 이다.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의  가장 큰 특징은 선비 뒷 배경이 통째로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인물 뒤로 텅 비워둔 아득하고 망망한 여백, 그것은 정녕 놀랍고 충격적이다.

이 큰 여백이 자칫 그림을 너무 횅댕그렁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지워낸 부정의 여백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긍정의 여백이기 때문이다.

단원은 이 여백을 통하여 선비가 꾀꼬리에게 온 정신을 빼앗겨서 전혀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그 일순간의 아득한 심사를 말하려 한 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애초 작품을 보았을 때 '왜 선비 뒤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조차 갖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만큼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선비와 말구종 아이의 시선이 못 박힌 듯 꾀꼬리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보는 우리까지 덩달아 다른 곳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술은 궁극의 경지에서 단순해진다.

그리고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다.

화가는 그리는 게 본연의 임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더 그리고 싶은 욕구를 어느 순간 차갑게 끊을 수 있다는 것, 아니 무엇을 그리지 않아도 좋은 그림이 되는지를 절로 안다는 이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보인다 함은 아마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 있으므로 가능하리라.

그럼 <마상청앵도>에서 큰 것을 머금은 작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시선視線'이다.

저 선비의 기품 있게 들린 고개에서 매혹된 영혼이 보인다.

그런데 그 매혹의 대상은 대단한 그 무엇도 아닌 일상에서 마주친 꾀꼬리 한 쌍일 뿐이다.

선비는 참 풍류를 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이 그림의 주제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감상자의 시선이다.

선비는 그림의 아래편에 있다. 꾀꼬리를 바라보느라 고개를 치켜든 그는 새소리에 몰입된 까닭에 그림 보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꾀꼬리에 넋을 앗겨 멍하니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러나 감상자는 화폭 중간에 눈높이를 두고 주인공을 살피느라 절로 시선을 내리깔게 된다.

바로 이때 선비의 올려다본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이 마주친다.

감정이입이 이 순간적으로 똑 떨어지게 이루어지며, 보는 이도 자연스레 선비의 시정에 젖어드는 것이다.

 

<마상청앵도>의 작품의 초점은 품위 있는 가는 선으로 그려진 선비에게만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을 흩뜨릴 수 있는 다른 요소는 모두 한 단계 눅여져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체가 하나로 자연스럽게 묶여지는 감각은 약간의 도취상태, 바로 술기운을 알맞게 빌었을 때 무리없이 흘러나온다.

이 모두는 아마도 인위, 즉 표면 의식보다는 자연, 곧 진정한 내면의 감각을 더 높이 샀던 옛 분들 마음자리의 반이리라.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문득 떠오른다.

'한잔의 술, 봄비, 강물, 새소리, 봄꽃나무, 그리고 여행'

 

※이 글은 고 오주석 선생의 유작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솔, 2006)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09. 3.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