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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표암 강세황 "자화상"

새샘 2009. 9. 5. 20:58

<익살로 피어난 삼절의 내면>  

강세황, 자화상, 조선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기탁), 보물 제590-1호(사진 출처-출처자료)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자화상自畵像>을 보고 있노라면 시나브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근엄한 표정의 선비를 보고 왜 웃는지 궁금하면, 또다른 그의 초상과 한번 비교해보자.

작가 미상인 아래의 <강세황상>은 머리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상반신에 흉배 붙인 단령團領을 입고 각대角帶를 둘렀으니, 이게 바로 예를 갖춘 조선의 관이다.

그런데 위의 <자화상>에서는 평복 두루마기에 오사모만 덜렁 썼으니, 이건 신사복에 운동모자를 쓴 것과 정반대지만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작가 미상, 강세황상 , 조선 18세기말, 종이에 채색, 50.9 ×3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출처-출처자료)

 

정조(재위 1776~1800) 때 예술계를 주름잡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강세황,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분이 왜 이런 장난을 치셨을까?

<자화상> 머리의 좌우 여백에 빼곡히 쓴 찬문贊文은 강세황 자신의 글인데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햐얀데

 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

 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

 가슴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

 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

 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

 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알고 보니 글에도 장난꽃이 가득 피었다.

강세황, 이분은 3남6녀 남매 중에서도 부친이 64세에 얻은 막내로서 갖은 사람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였다.

그래서 유달리 밝고 해학적인 성품을 지녔으니 그 제자인 김홍도 역시 농담에 능했고 시서화악詩書畵樂에 이르는 여려 교양을 섭렵한 것이 모두 스승으로부터 온 내력이었다.

강세황은 다른 글에서 자신을 이렇게 평했다.

 

"체격이 단소하고 인물도 없어서 잠깐 만나 본 이들은 그 속에 탁월한 학식과 기특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자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싱긋이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이 글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강세황이 우스꽝스런 복장에 걸맞지 않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그저 우스개만은 아닌 성싶다.

특히 옷주름 선이 다른 초상에 비해 좀 더 굵어 굳센 느낌이 있고, 어깨 윤곽선 아래며 옷주름 근처에 진한 바림 즉 그러데이션(gradation)을 더해서 견실한 양감을 강조한 점이 그러하다.

얼굴 묘사는 섬세 정교하며 음영을 나타낸 입체감에 서양화법이 내비친다.

주인공은 고운 옥색 두루마기에 진홍색 세조대細條帶를 느슨하게 묶어 낙낙하게 드리웠다.

오사모의 검정색과 더불어 품위 있는 색감 연출이다.

뛰어난 자화상 솜씨에 유려한 글씨며 문장력까지 발휘한 이 작품, 가히 삼절의 저력이 드러난 걸이라 하겠다.

 

이 자화상은 "익살로 피어난 삼절의 내면"이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옛그림 가운데 초상화로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뿐이고, 이 강세황의 <자화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강세황(1713~17910)의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다. 강세을 두고 흔히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부른다. 이 말에 어울리게 그는 문인이자 화가, 평론가로 두루 활동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시서화에 재능을 보였던 강세황은 노년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원에 머물며 오직 학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강세황은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동시에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인물화를 발전시켰다. 그는 시종 문인 선비로서 탈속의 경지를 드러내는 삶과 작품을 보여 주었다. 강세황5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조선시대 화가로는 매우 보기드물게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이다. 이는 화가 또는 예인으로서의 내면 탐구 욕구, 자의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여행하고 난 후 그곳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송도기행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기여해 18세기 조선미술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단윈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출처: 이 글은 故 외우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09. 9. 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