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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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인재 강희안 "고사관수도"

새샘 2009. 10. 20. 15:43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강희안, 조선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23.4×1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길다란 덩굴 몇 가닥을 흔들흔들 그네 태운다. 그러자 잔잔하던 물 위에도 결이 고운 파문이 인다.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린 선비는 볼에 와 닿는 바람결이 흐뭇했는가, 아니면 마음을 스쳐가는 상념 속에서 혼자만의 뿌듯함을 느꼈는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머리가 벗겨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이제 세상살이를 꽤 이해할만한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다. 눈과 눈썹은 짙은 먹선으로 대충 쳐서 그렸으되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넉넉한 빛을 띠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작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 인간사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번져 있다.

 

선비를 둘러싼 주위 배경은 간촐하다. 뒤편으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뿌리박고 자라난 나무를 휘감아 내려온 덩굴 몇 가닥과 큰 이파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앞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물가에 자라난 갈대같은 거친 물풀, 그리고 물 위로 솟아난 작은 바윗돌 셋이 전부다.

 

선비 아래 듬직한 바위는 툭툭 끊어지는 호쾌하고 대범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둘렀으며, 아래쪽으로는 시커멓게 거친 바림을 베풀었다. 그 선의 성질은 선비 옷의 윤곽선과 아주 닮았다. 즉 굵었다 가늘었다 변화가 많고 꺾여 나가는가 싶다가는 곧 끊어진다. 특히 선비의 다리 오른편의 바위 형태가 다리 모양과 거의 같아 보여, 화가는 마치 선비가 바위이고, 바위가 곧 선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의자처럼 편편한 작은 바위가 하나 더 있다. 누구든지 와서 함께 해도 좋을 공간이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시선이 고요하고 그윽하므로 그림의 공간은 화면 바깥으로 안온하게 확장된다. 정작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 자체는 아주 작은데도 느껴지는 것은 제한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화면의 대부분이 돌이다. 세상에 돌만큼 천성적으로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 돌은 태초에 놓인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거센 비바람과 매서운 눈서리에도 꿈쩍이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즉 우리 인간은 이렇게 느낀다). 저 바위를 닮은 노인의 시선을 보면 그 역시 성품이 바위처럼 듬직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돌은 흙의 정기가 뭉친 것이다. 그러니 선비 또한 오랜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사람의 정기인 올바른 도道를 한 몸에 모두고 있음직하다.

 

선비는 오늘 한가로움을 얻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나 또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아니 그림 속의 인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난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1417~1465)은 조선 태종~세조 때 살았던 선비로서 집현전 직제학과 호조참의를 지냈다. 선비로는 드물게 시서화 등 다방면에 능한 문인으로서 격조 높은 산수화, 인물화, 문인화를 그렸다. 원예에 관한 책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었으며, 문장가인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형이다. 

 

이 글은 故 외우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하면서 그 소감도 함께 적은 것이다.

  

참고로 이 그림 왼쪽에 '仁齋'라는 낙관이 있어 강희안이 그린 그림이라고 대부분 믿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 미술사학자는 이 그림은 16세기 중국 절파화풍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어서 15세기 사람인 강희안의 그림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2009. 10.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