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양송당 김시 "동자견려도" 본문

글과 그림

양송당 김시 "동자견려도"

새샘 2010. 6. 21. 18:58

- 누가 누가 이기나 : 어린 소년과 고집 센 나귀의 힘 겨루기

<김시,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보물 783호, 비단에 채색, 111×46㎝, 호암미술관>

 

단풍 든 나뭇잎이 화사하고, 먼산 윤곽이 미인의 눈썹처럼 곱게 떠오른 어느 가을날 초저녁, 호젓한 산기슭을 따라 졸졸 흐르는 개울 위 통나무다리에서 일이 벌어졌다. 어린 동자가 나귀를 이끌어 시내를 건너려고 하는데 헛 약고 겁 많은 나귀가 한사코 못 건너겠노라고 버티는 것이다. 동자의 손에 회초리는 보이지 않고 앙클어지게 틀어쥔 고삐끈만 두 손에 가득한 것을 보면, 나귀와 옥신각신 승강이를 벌인 지도 벌써 한참인 듯하다. 나귀는 네 다리를 뻗대고 서서 꼼짝도 않는다. 그러나 키가 겨우 나귀만큼밖에 안 되는 소년의 힘으로는 도저히 시내를 건널 수 있을 성싶지 않다. 끙끙거리는 동자의 모양새가 애처롭기만 하고, 저를 해치려는 것도 아닌데 꼬리를 드리우고 뒤로 움츠려들기만 하는 나귀가 딱하기도 하다. 저러다 동자가 그만 개울에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고, 한편으로는 좋은 꾀를 못 내고 억지 힘만 쓰는 꼴이 우습기도 한데, 이들을 둘러싼 경치는 아랑곳없이 그저 조는 듯 무심하고 곱기만 하다.

 

저 나귀의 주인은 어쩌면 좋은 계절이 아까워서 단풍 구경을 나가 있는지 모른다. 처음 갈 때야 주변 경개도 살펴가면서 느긋이 걸어다니는 것이 좋았겠지만, 이제 시도 짓고 또 흥건하게 술도 걸친 다음이라 손쉽게 나귀 등에 의지해 돌아올 요량으로 동자를 심부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더욱 큰일인 것이 기다릴 주인을 생각해서도 이처럼 마냥 지체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러다가 그냥 하루를 보내고 말 것같다. 그림을 잘 보면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동자와 나귀의 실랑이하는 모습을 연극무대 장치인 양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늙은 소나무가 왼쪽 나귀편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묵직한 바윗덩어리도 마치 나귀의 옹고집을 상징하듯이 힘을 보태고 있으며, 위쪽으로 불쑥 솟구친 부벽준의 절벽까지도 모두 나귀편에 서 있는 까닭이. 한편 동자편에 있는 것이라고는 옅은 바림으로 음영만 표시된 먼산, 맑은 시냇가의 고운 모래톱과 졸졸 흐르는 여린 물, 그리고 그 위로 위태롭게 놓인 통나무다리가 전부다. 더욱이 그림 전체로 보아도 나귀는 한복판에 서 있고 동자는 오른편 가로 밀려 있으니, 힘의 강약이 완연한데 무슨 수로 저 완고한 나귀를 당겨올 수 있겠는가? 동자가 나귀를 당기는 그림, <동자견려도>에서 화가는 이처럼 교묘하게 구도를 활용하여 작품 속에 벌어진 상황을 요령있게 설명하고 해답까지 내리고 있다.

 

고요한 산기슭 길에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조그만 소년과 어리석은 나귀가 낑낑대며 줄다리기를 한다. 누가 이길까? 아무렴 네 다리 가진 나귀가 두 다리뿐인 동자를 이기지 않겠는가. 이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화가의 은근한 해학은 그들의 자세에도 깃들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나귀와 동자가 드러낸 본새가 너무나도 서로 쏙 닮았기 때문이다. 아이, 나귀 할 것 없이 다리를 땅바닥에 굳게 디디고 발을 훨씬 앞쪽으로 쭉 뻗어 내밀고 거꾸로 엉덩이만을 뒤로 쑤욱 잡아 뺐다. 특히 나귀의 길다란 귀가 뒤쪽으로 뻗대는 제 힘의 방향을 가리키려는 듯이 쫑긋 서 있는 것이나 수북한 갈귀의 터럭 한 올 한 올이 긴장된 순간의 초조함을 보여주는 듯 곤두선 것이 흥미롭다. 반면에 당나귀의 겁먹은 눈은 붓끝으로 단번에 툭 찍어 그려낸 듯하면서도 눈매가 선한 어리석은 동물의 느낌이 잘 살아 있다. 아이가 안간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 옷주름이 직선에 가까운 것이면서 짧고 활달하게 꺾여 나간 점에 잘 드러나 있다. 헌데 이상하게도 얼굴 표정만은 의외로 침착해서 전혀 힘들어 보이거나 낭패한 기색이 아니다. 이것은 두 손이 모두 왼편 소매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어색함과 함께 아마도 나중에 누군가가 작품 위에 덧칠을 했던 까닭일 것이다.

 

- 편안함 속에 녹아든 산뜻한 대비

 

뫼는 화장을 한 듯 곱고 하늘은 드넓고 해맑다. 화면 오른편 위쪽의 넉넉한 여백이 바로 그 가을 하늘이다. 계절이 가을임은 길가 잡목의 붉게 물든 낙엽으로 알 수 있고 때가 저녁 나절임은 원산이 윤곽선만 살짝 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화면 상반부의 절벽은 멀지 않은데도 아래쪽이 뿌옇게 흐려져 있지 않은가. 절벽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으나 전혀 위태롭다거나 웅장한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기우뚱히 솟아나서 화폭에 멋을 더한다고나 할까. 그 아래 같은 방향으로 화폭 밖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늙은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의 가느다란 가지들은 화폭 중앙으로부터 좌우로 이리 삐죽 저리 삐죽 맵시 있는 각을 이루며 뻗었다. 운치 있는 분위기가 그 형태의 리듬감에서 살아나고 특히 짙은 먹색은 화면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소나무는 참으로 멋들어지다. 그 잔가지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가지 끝에 아득한 원산이 걸려들기 때문이다. 먼산의 묵법은 그 농담도 절묘하지만 윤곽선에 직선의 맛이 더해진 산뜻함이 일품이다.

 

작품을 위아래로 삼등분하면 중요한 장면이며 묵직한 경물들은 모두 다 맨 아래쪽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귀와 동자는 물론이고 큼직한 바위며 소나무 둥치 등이 활달하게 필선 위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전경前景의 분명함과 묵직함은 작품 전체에 편안한 안정감을 확보하는 동시에 원경遠景의 묵법을 중심으로 한 가볍고 미묘한 처리와 상세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대조라고 말하면 멋드러지게 가지를 펼친 늙은 낙락장송과 그 아래서 쩔쩔매는 동자의 귀여운 맛 사이에도 볼 만한 점이 있다. 그리고 잔잔한 냇물이 바위 사이로 흘러 소리를 낸다. 이끼 낀 바위에는 먹점 위에 푸른 색을 덧칠한 태점이 가득 깔려 있다. 그러나 태점은 소나무 윤곽선에도, 절벽 위쪽에도 고르게 찍혀 있어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성과 조화감을 확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면 좌측은 무겁고 복잡하며 화면 우측은 산뜻하고 시원하다. 그래서 화가는 오른편 위쪽 맑은 하늘이 다치지 않도록 절벽 안쪽 좌측변에 기대어 '양송養松'이란 자신의 호를 관지로 썼다.

 

김시<동자견려도>오늘날 극히 드문 임진왜란 이전 작품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소중한 예술품인 까닭에 현재 보물 7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송당養松堂 김시禔(1524~1593)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로서, 당시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 간이 최립(1539~1612)의 문장과 함께 그림으로 삼절三絶을 이루어 한 시대를 대표했던 거장이었다. 김시는 이름 '禔'는 '제, 지, 시' 세 가지 음이 있어서 혼란이 있어 왔다. 이 가운데 '시'가 옳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네 형제 중 막내인데 형제의 이름이 모두 외자로 기祺, 희禧, 휘, 시다. 즉 '보일 시示' 변을 돌림으로 써서 한결같이 '복 있으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여기서 세 형들 이름이 모두 'ㅣ'로 끝나며 그 발음은 변을 떼어낸 한자의 독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1928년 출판된 위창 오세창(1864~1953)선생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다. 이 책의 씨명자음검색을 보면 가나다 순으로 서화가를 배열했는데 김시는 김순金恂과 김시습金時習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위창선생은 구한말을 사셨던 옛 분이자 서화계의 원로였으므로 이분의 판단은 재론의 여지없이 옳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 글은 고 외우 오주석 선생'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1999, 솔출판사)'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10. 6. 2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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