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본문
<노시인老詩人의 초상화肖像畵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우리 옛그림 가운데 가장 웅혼하고 장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들라면 거의 누구나 <인왕제색도>를 꼽을 것이다.
국보 216호로 지정된 이 산수화는 가장 남성적인 박력이 넘치는 화가이자 우리 산천을 우리 특유의 기법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한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일흔여섯살의 고령에 그려낸 대작이다.
화필을 잡은지 어언 육십년, 그야말로 써서 닳아버린 몽당붓이 쌓여서 무덤을 이루었다고 하는 노화가의 원숙기에 작가만의 내밀한 심의心意를 더하여 이루어낸 걸작이 바로 이 <인왕제색도>다.
공자의 표현을 빌면 '마음이 내키는대로 쫓아도 저절로 법도를 넘지않게 된(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경지라고나 할까!
압도하는 힘, 꿈틀대는 기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에 큰비가 온 끝에 그 비가 개어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화면 하반부로부터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면서 점차 위로 번져 나갔으니, 오른편 아래쪽에 기와집이 일부 드러났지만 다른 많은 집들은 모두 다 가려졌다.
반면에 화면 상반부는 아직 채 흘러내리지 못한 빗물이 평소에 없던 세 줄기 작은 폭포까지 형성하면서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정선은 비에 젖어 평상시보다 짙어보이는 화강암봉을 큰 붓을 뉘여 북북 그어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거듭 짙은 붓질을 더함으로써 거대하고 시커면 바위산의 압도적인 중량감을 표현하였다.
아마도 <인왕제색도>를 바라볼 때 매번 마음은 억눌러지고 약간은 비장한 느낌에 잠기게 하는 것은 이처럼 위를 무겁게, 아래를 가볍게 처리한 상중하경上重下輕의 과분수 구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넘쳐나는 가공할 표현력의 외피 안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그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무엇이란 자신의 평생 절친 벗이었던 진경시의 대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임종을 코앞에 두고서, 지루한 장마비가 그친 어느 날 오후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 올라 개어가는 인왕산처럼 이병연이 하루빨리 병석을 털고 일어날 것을 빌면서 정선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작품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깎아지른 바위산인 인왕산은 평상시에는 폭포가 있을 턱이 없는데, 그림에는 폭포가 세 줄기나 그려져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즉 며칠 동안이나 퍼부은 장마비가 갑자기 만들어낸 폭포라는 말이다.
그리고 기와집 주변의 소나무 숲은 뚝뚝 물기가 듣는 붓을 엄청나게 빠르게 휘둘러 삽시간에 그려냈다.
그것도 뒤쪽 소나무의 흐린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앞쪽 소나무를 짙은 먹으로 다시 그어댔기 때문에 부분부분 뭉개진 흔적까지 보인다.
궂은 날씨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벗을 생각하며 정선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재빨리 붓을 놀려 이 그림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안개속에서 우리는 희망처첨 보일 듯 말 듯한 푸른 먹빛이 배어있음을 본다.
그림에서 그려진 기와집 한채는 이병연의 집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정선은 인왕산의 우뚝한 기상과 이병연 집의 깨끗한 선묘線描로서 오랜 벗의 듬직하고도 고결한 인품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은 서로 글과 그림을 주고 받으면서 평생을 같이했던 벗이었다.
사천이 시를 지어 보내면 겸재는 시에 화답하는 그림을 그려 완성하곤 했다.
이들의 글과 그림의 합작품을 묶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란 시화첩을 만들어 후손에게 남겼다.
이 화첩에 실려있는 그림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를 통하여 이런 사실을 우리는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화면 중심에 아름드리 우람한 늙은 소나무가 둥치만 보이고 넓은 가지는 일산처럼 드리워져 아래만 약간 보이는데, 그 아래 풀밭에 겸재와 사천 두 늙은 선배가 마주보고 앉아 시와 그림을 바꿔보자고 약속을 한다.
등이 보이는 몸집이 자그마하고 단단해보이는 분이 겸재 정선이고, 정면을 향해 앉은, 큰 체구에 수염 좋은 분이 사천 이병연이다.
사천 이분은 앞서 보았듯이 과연 인왕산처럼 풍신이 훌륭한데, 두 분 모두 맨상투 차림으로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흉금을 터놓고 후일을 기약한다.
겸재 뒤쪽으로는 한 길쯤 되는 큰 바위가 박혀있고 오른편 아래쪽으로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휘돌아간다.
늙은 소나무, 굳센 바위, 그리고 맑은 물, 이 모두는 옛부터 좋은 벗의 상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물은 구름이나 바람과 달리 '맑고 그칠 때 없는' 벗이요, 돌은 꽃이나 풀과 달리 홀로 '변치 않는' 벗이다.
그리고 소나무는 '눈서리를 모르는' 기개가 있으니 '땅 속 깊이 뿌리가 곧은' 벗으로 노래하였다.
물, 돌, 소나무 이 셋은 조선을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와 빼어난 시인이 만고에 모범이 될 우정을 나누는 이 그림에 참으로 걸맞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붓 끝으로 담은 바람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예로부터 시인은 가날할지언정 책 욕심이 많은 법이요, 화가는 또한 고운 새가 제 깃털을 사랑하듯 자기 그림을 아끼는 법이다.
그런데도 정선은 유독 이병연 이 친구에게만은 많은 작품을 흔쾌히 그려주었고 더구나 그것을 중국시장에 내다팔아 서책으로 바꾸어도 개의치 않았으니 두 사람의 우정은 서로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는 참으로 격의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겸재가 곧 사천이고 사천이 곧 겸재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은 그림자가 사람을 따르는 것 같이 한 몸처럼 지냈다고 생각된다.
겸재 노인이 일흔여섯살의 나이로 육십년간 예술로 사귀었던 친구 이병연을 잃을지 모른다는 정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비통함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내 몸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으리라.
늙은 벗의 임종이 다가온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정선은 북받쳐 오르는 마음속 초조함과 실낱 같은 친구의 회생을 바라는 절절한 원망願望을 참지 못하고 그만 크게 소리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화가였으므로 붓을 들어 화폭 가득 <인왕제색도>를 떠오르게 함으로써 소리쳤다. 가장 겸재다운 방법이었다.
※이 글은 고 외우 오주석 선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1999, 솔출판사)'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10. 3. 1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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