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17. 9/30 공주 공산성 본문

여행기-국내

2017. 9/30 공주 공산성

새샘 2017. 12. 11. 21:06

 

 

 공산성은 고구려의 침입을 당한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사비(부여)로 천도하기까지인 웅진백제시대(475-538)의 왕궁이 있었던 산성으로서, 금강이라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졌다. 즉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인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데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의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으로 불렀다가 고려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이후에는 쌍수雙산성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이 사비 궁궐을 수리할 때(630년) 5개월 동안 이 공산성에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 멸망기에 의자왕도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충청감염이 설치되었고, 이괄의 난(1624년) 때에는 인조가 이 공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왕궁 관련 유적과 4곳의 문터(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연문로타리는 남북으로 뻗은 웅진로와 동서로 뻗은 왕궁로가 합쳐지는 로터리이다.

로터리 서쪽 왕릉로 입구에는 '백제무령왕릉으로 통하는 길의 문'이란 뜻의 '백제무령왕릉연문百濟武寧王陵門'이라고 새겨진 고풍스런 아치가 서 있다.

 

 

연문로터리

 

 

연문로터리에 서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 공주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산성' 화강암 표지석

 

 

 

연문로터리에서 본 공산성

 

 

공산성 입구 

 

 

입구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산성' 화강암 표지석 앞과 뒤

 

 

산타의 인증샷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입구 비석군-유네스코 표지석에서부터 갈지之 자 모양의 길 오른편에 비석 47개가 줄지어 서 있다. 이 비석군은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송덕비로서 대부분이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다.

이런 송덕비나 공적비를 볼 때마다 관리들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빼앗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 그런 걸까??? 

 

 

금서루 오름길에서 바라본 성벽 안 안무정 터

 

오름길을 따라 올라가면 공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금서루 문을 만난다. 금서루 문은 누각 왼쪽에 하나, 누각 바로 아래 문이 또 하나 있다. 보통은 누각 왼쪽문을 통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며, 누각 아래 문은 계단을 통해 올라간다.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문에 해당한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 편찬된 공산지 등의 문헌과 동문조사자료 및 지형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지금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지어졌다. 금서루는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산성의 역사 가운데 하나는 고려시대 민중봉기로 일컬어지는 공주 명학소鳴鶴所('소'란 금은세공품, 도자기, 종이 들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작은 고을)에 살던 형제가 명종6년 1176년 귀족들의 횡포와 차별에 맞서 일으킨 반란인 망이·망소이의 난 때 공산성을 점령하고 반란의 본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고려조정은 이들을 달래려고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지만 불만에 찬 이들의 난은 다시 세차게 일어나 충청도 일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얼마 후 관군의 반격으로 평정되었다.

 

공산성 성벽 위에 나부끼는 깃발(노란깃발)은 송산리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산리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라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금서루 왼쪽 주 출입문-문 천장에는 인동초(?) 문양이 새겨져 있다.

 

 

금서루 누각 바로 아래 공산성 출입문 

 

 

금서루 문을 지나면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은 공산성 안내소

 

 

성 안에서 바라 본 금서루

 

 

성 안 백제의복 대여졈 

 

 

성 안 문화해설사의 집 

 

 

성 안으로 들어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금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조망점인 공산정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길 양쪽에는 장승이 우뚝 서서 찾는 이들을 반긴다. 

 

 

왼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직진하여 아래쪽의 왕궁터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왼쪽에 활터가 있다.

 

 

백제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공산성의 추정왕궁지와 백제건물지 주변 넓은 뜰

 

 

발길을 돌려 금서루 쪽으로 되돌아와서 장승 사이를 지나 성 위쪽의 공산정으로 올라간다.

 

 

공산정으로 올라가면서 뒤돌아본 금서루와 공산성 성벽-성벽 위에는 서쪽임을 알려주는 백호(백색 가장자리)기가 날리고 있다.

 

 

오름길 끝자락에 보이는 전망대는 안무정按舞亭이 있던 안무정터.

안무정이란 고려시대 지방관직인 어떤 안렴사使가 금강가의 정자에 들러 물줄기와 산세에 감탄하여 자신도 모르게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는 정자라는 의미.

 

 

안무정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금서루와 성벽 

 

 

안무정터에서 내려다본 금강철교와 왼쪽의 백제큰다리. 두 다리 사이로 보이는 평지가 미르섬이다. 강 위에서 백제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기마병을 태운 대형 뗏목이 하류를 향해 내려오고 있으며, 뗏목 주위로 수십 척의 돛단배가 호위하고 있다. 진행 방향 앞쪽에 금강을 가로지르는 인공부교가 설치되어 있다.

 

 

 

안무정터에서 조금만 더 가면 공산정이 나온다.

 

 

공산정에서 내려다본 금강

 

 

 

공산정에서 내려다 본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拱北樓. 공북루 주변 성벽 위에는 북쪽을 상징하는 깃발인 흑색 가장자리를 가진 현무가 휘날리고 있다.

 

 

공산정에서 성벽을 따라 금서루로 내려오는 도중 백제병사복으로 갈아입은 문화제 행사원들이 성벽과 금서루에서 보초를 서면서 훈련하고 있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2017. 12. 1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