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5-임나일본부는 왜열도 오카야마 현 지역에 있었다! 본문
1. 들어가며
일본인들은 일본 역사서『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때문에 가야와 왜열도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임나任那란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 한국 남부에 있었던 일본 식민지를 말하며 이곳 통치를 위해 일본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이었던 김해나 고령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인들은『일본서기日本書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료인『삼국사기』,「진경대사탑비문眞境大師塔碑文」,「광개토왕릉비문」등에서도 임나 위치가 한반도 남부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고대에서 한국과 일본의 사회 발전 수준의 차이로 볼 때 일본이 한국 남부를 지배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는데, 이는 한반도에서는 서기전 24세기에 고조선이란 청동기 국가가 출현한 반면 왜열도에는 서기전 3세기 무렵부터 서기 3세기 무렵까지의 야요이(미생彌生)문화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에서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전달되었고, 6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기나이(기내畿內)의 야마토大和 세력이 주변 세력들을 겨우 통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인들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임나일본부가 정치적 지배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 외교관계나 상업교류를 위한 기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위치는 한반도였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일본인들의 견해에 대하여 우리나라 남북한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왜열도나 대마도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는 왜열도와 대마도에 임나(가야)라는 지명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서도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문화 전파가 매우 강하게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이주한 주민도 상당히 많았다.
한반도와 왜열도의 문화 격차로 볼 이들 한반도의 이주민들은 왜열도를 문명사회로 진입시키고 일본이라는 국가를 출현시키는 데 이바지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임나일본부에 대한 지금까지의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 지금까지의 임나 연구 개관
1) 일본의 임나 연구
임나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려 있는『일본서기』연구가 바로 임나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일본서기』에는 임나 기록이 많다.
일본에서 임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국학國學 운동이 일어나『고사기古事記』와『일본서기』등 고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에도(강호江戶)시대 말기부터였다.
임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서는 1720년 완성된『대일본사大日本史』<임나전任那傳>이었지만, 학술적인 임나 연구는 대외관계에 관심을 갖게 시작한 메이지(명치明治)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어 마사모토(관정우管政友)의 1893년『임나고任那考』3권, 나카 미치요(나가통세那珂通世)의 1894~1896년『사학잡지史學雜誌』에 연재된 외교역사 제2권인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 제8장 기록을 쓴 <가라고加羅考>와『외교역사外交繹史』제3권인 <태고외교고太古外交考>, 쓰다 소키치(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의 1913년『조선역사지리』제7편 <임나강역고任那疆域考>, 이마니시 류(금서룡今西龍)의 1920년 <가라강역고加羅疆域高>와 1922년 <기문반파고己汶伴跛考>, 1930~1932년 <백제사강화百濟史講話>, 1934년 <백제사연구>, 1936년 이홍직의「임나문제를 중심으로 한 <긴메이기(흠명기欽明紀)>의 정리-주요 관계인물의 정리」, 1937년 아유카이 후사노신(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의『일본서기 조선지명고』, 1947년 이케우치 히로시(지내굉池內宏)의『일본상대사日本上代史의 일연구一硏究-일선日鮮의 교섭과 일본서기』(1918년부터 시작한 강의 내용을 후에 간행했기 때문에 쓰다 소키치와 같은 시기 논문), 스에마쓰 야스카즈(말송보화末松保和)의 1933년『일한관계』와 1949년『임나흥망사』, 1978년 이노우에 히데오(정상수웅井上秀雄)의『임나일본부와 왜』등이 있다.
고고학적 연구에는 1902~1910년에 수행된 한국의 고건축 조사 결과를 정리한 1910년 세키노 다다시(관야정關野貞)의『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제3권, 그리고 1916~1945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주관으로 시행된 삼한·가야·백제(경기·충청·경상·전라)의 고분과 기타 유적 조사에 일본 학자들의 대거 참여했다.
가야 지역에 대한 일본인들의 한국 고분과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삼국사기』,『삼국유사』에 가야 지역으로 기록된 한반도 남부가 바로『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문헌 사학자들의 그동안의 연구 결과가 그러한 생각을 하도록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사와 발굴은 매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지만, 가야의 묘제 등이 신라·왜열도의 것과 공통성이 있음이 확인되어 한반도와 왜열도 사이에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해 주었는데, 일본인들은 그런 현상을 일본 문화의 한반도 진출로 해석하여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근거라고 주장했다.
2) 한국의 임나 연구
이렇게 일본인들이 임나 연구를 거의 독점하고 있던 시기에 한국 학자(이홍직)의 임나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본인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일본인들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제기된 반론은 북한학자였다.
① 1963년 북한 김석형의 ‘삼한ㆍ삼국의 왜열도 안의 분국설分國說’
백제‧신라‧가야‧고구려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왜열도에 그들의 분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견해로서, 이것은 1994년 조희승이 체계화하여 가야사 전체를 복원하였다.
② 1970년 문정창의 ‘대마도 위치설’
임나는 대마도‧일기壹岐‧오도열도五島列島에 있었던 나라의 연방체였으며,『일본서기』에 임나와 관계를 가지고 등장하는 백제‧신라‧고(구)려도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신라‧고(구)려가 아닌 대마도에 있었던 백제‧신라‧고(구)려다는 견해다.
이 견해를 1987년 이병선이 한층 발전시켰는데, 그는 여러 차례 대마도를 방문하여 가야‧백제‧신라‧고구려 계통의 지명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는 대마도 지역에 있었던 임나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③ 1977년 천관우와 1985년 김현구의 ‘한반도 남부설’
일본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임나가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위치한 것을 인정하면서 그 성격만 달리 규정하였다.
천관우는『일본서기』의 임나 관계 기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고 주격으로 되어 있는 왜를 백제로 고쳐 읽으면 당시 역사 상황과 많이 일치되므로, ‘왜의 임나 지배’가 아닌 ‘백제의 가야 지배’로 보고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군사령부였다는 견해다
김현구도 천관우와 비슷한 견해로서, 임나는 백제의 직할령 또는 그곳을 통할하는 기관이 있었던 지역 이름이고, 임나일본부는 그곳을 통할하고 있었던 백제의 기관 이름이었다는 견해다. 백제는 직할령인 임나에 군사를 파견하여 주둔시키고 군령郡令‧성주城主 등의 군사지휘자로 하여금 그 지역을 통괄하게 하면서 본국 백성들도 그곳에 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와의 국제관계상 그곳에 부분적으로 왜인 용병을 배치하고 왜계倭系 백제 관료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④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동의하지만 그 성격은 일본의 가야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와 왜 사이의 교역이나 외교기관
이병도(1976년)는 임나일본부가 원래 왜국이 가야 여러 나라와 무역관계를 위해 설치했던 공적 상관商官이었는데, 나중에 신라 압력에 못 이긴 가야 여러 나라가 왜인의 원조를 구하면서 이곳이 그 역할의 중심이 되었다는 견해다.
이근우(1985년)는 임나일본부가 5세기 이전의 규슈 왜 왕조와 관련된 문물의 수용 통로였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김태식(1993년)은 임나일본부가 기본적으로 백제‧가야와 왜 사이의 교역기관 성격으로서 설치 주체는 왜가 아닌 백제와 가야였다고 주장했다.
이정희(1985년)와 이영식(1990년)은 우케다 마사유키(청전정행請田正幸)의 견해를 받아들여 임나일본부는 왜가 가야 여러 나라와 외교 교섭을 위해 임시 파견한 사신단인 것으로 보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임나일본부의 위치를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 왜열도 지역, 대마도 지역의 3가지 견해 가운데 아직까지는 첫 번째 견해인 한반도 가야 지역에 위치했다는 견해가 우세하며, 임나일본부의 성격은 왜의 가야 지역 지배기구, 백제의 가야 지배기구, 왜와 가야의 교역기관, 왜와 가야의 외교 통로라는 4가지 견해 가운데 아직은 첫 번째 견해인 왜의 가야 지역 지배기구라는 성격으로 통념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임나일본부의 위치
임나의 위치가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있었다면 임나가 한국사의 주된 범위 안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한국 영토 밖에 있었다면 한국사의 주된 범위라기보다는 외연적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에만 215회,『신찬성씨록』에 7회 나타나는 임나 위치에 대한 3가지 견해에 대해 고찰해보기로 하자.
1)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에 있었다는 견해
이 견해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광개토왕릉비문」,「진경대사탑비문眞境大師塔碑文」,『삼국사기』<강수전强首傳> 등 3가지 기록이다.
①「광개토왕릉비문」
400년(광개토왕 영락 10년) 당시 고구려의 보호 아래 있던 신라를 침략한 왜적을 치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에서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러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으로서 신라 영토에서 일어난 전쟁이므로 임나가라는 한반도 지명이라는 것이다.
가야伽倻는 가라伽羅라고도 불렀는데, 종발성은 다음에 나오는「진경대사탑비문」에는 금관가야가 임나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종발성은 금관가야에 있었던 성이다.
②「진경대사탑비문」
이 비문은 924년 신라 경명왕의 명에 따라 만들어져서 창원 봉림사지에 있었는데, 그 내용은 진경대사의 선조는 임나 왕족이며, 그의 먼 조상은 흥무대왕興武大王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무대왕은 김유신의 추존호인데, 김유신은 금관가야 수로왕의 후손으로 마지막 왕이었던 구해의 증손자였으므로 임나는 한반도에 있었던 금관가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③『삼국사기』<강수전>
강수强首는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는 내용으로서, 오늘날 충북 충주인 신라 중원경 출신의 강수가 임나가량 사람이라면 임나가량은 한반도에 있던 지명이라는 것이다.
2) 임나일본부가 왜열도에 있었다는 견해
근거는 왜열도에 가야·백제·신라·고구려 계통의 지명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①『삼국지』「동이전」<왜전>
“왜인은 대방의 동남 큰바다 가운데 있는데 …… 군郡에서 왜에 도달하려면 해안을 돌아 바닷길로 한국韓國을 거쳐 약간 남쪽으로, 약간 동쪽으로 가면 그 북부 연안의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7,000여리가 되며, 하나의 바다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은 한반도 삼한에서 약간 동쪽, 약간 남쪽으로 가면 왜의 북부 연안에 있는 구야한국에 도달하게 되고, 다시 바다를 건너면 대마도에 이른다는 것으로, 왜는 오늘날 규슈에 있었고 규슈의 북부 연안에 구야국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②『삼국지』「동이전」<한전> ‘변진’조
한의 변진 지역에 변진구야국이란 나라가 있다는 기록에서 가야는 구야狗邪라고도 불렀으므로 한에 있었던 변진구야국은 가야의 전신이며 따라서 왜열도의 규슈 북부에 있었던 구야한국도 가야한국 즉 가야가 되는 것이다.
③『일본국군연혁고日本國郡沿革考』
비중備中의 하양賀陽에 대해 하양은 78촌인데 옛날 가야국이며 시대에 따라 이름이 향옥香屋·문옥蚊屋·하야賀夜·하양 등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시대에 따라 한자가 다르게 표기되었지만 그 일본음은 모두 가야이므로 비중의 하양이 고대에 가야 즉 임나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비중은 오늘날 오카야마(강산岡山) 현 지역이므로 가야는 규슈 북부에도 있었고 오카야마 현 지역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밖에도 가라계 지명이 왜열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④『속일본기』<덴포(천평天平) 15년>조
“비전備前국 (사람이) 말하기를 읍구군邑久郡 신라읍新羅邑 구포久浦에 매우 큰 물고기 52마리가 떠내려왔는데……”라는 기록에서 왜열도 안에 신라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전국은 현 오카야마 현 지역에 있었으며,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지명도 오늘날 오카야마 현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나 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왜열도에 있었다면 당시 일본 상황으로 보아 이들은 마을연맹체(고을나라) 정도의 규모였을 것이다.
3) 임나일본부가 대마도에 있었다는 견해
①『환단고기桓檀古記』「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있었는데 ……”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면 임나가 대마도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②『일본서기』<오진 천황기(숭신천황기崇神天皇紀)>
“임나국이 소나가시치(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보내 조공했다. 임나는 쓰쿠시국(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북쪽은 바다로 멀리 떨어져 있어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은 임나가 왜에 조공했다는 기사로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임나(가야)를 지배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이 기록의 임나는 한반도 가야일 수가 없다. 그것은 한반도 가야는 경상남도로서 그 북쪽은 바다가 아니었으며, 계림 즉 오늘날 경주 남쪽에 위치했으므로 서남쪽에 있었다는 표현도 옳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쓰쿠시국은 오늘날 왜열도 규슈의 후쿠오카(복강福岡)로 추정되는데, 그곳에서 2,000여 리 떨어져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곳은 대마도밖에 없다.
③ '대마도對馬島'라는 지명 자체가 '가야'를 의미
대마도는 kara-sima의 차훈借訓 표기로서 대마對馬 그 자체가 가라加羅를 의미한다. 대對의 옛 어형은 'ᄀᆞᆲ'
으로서 그 어근은 ‘ᄀᆞᆯ' 또는 '갈’이며, 마馬의 훈은 ‘걸’이므로 대마는 kara를 같은 음을 가진 두 자로 표기한 이중표기한 것이다. kara를 표기하면서 대마라는 한자를 채택한 것은 마한馬韓을 對하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대마도=가라국=가야국인 것이다.
④ 대마도에는 가라계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대마도 이나향伊奈鄕의 중심 마을인 이나촌伊奈村의 한량韓良은 kara라고 읽히며『진도기사津島紀事』에는 이곳이 가라加邏로 표기되어 있다.
대마 상도上島의 좌호佐護에 カラスの原(karasu no hara)라는 지명과 나전懶田의 율서栗栖(karasu)라는 지명이 있고, 당주唐州(kara-su)라는 지명은『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가라수加羅愁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대마 하도下島에는 흑나黑懶(kuro-se)라는 지명도 있다. 대마도에 있는 지명인 고리古里(huru-sata), 후목朽木(huru-ki), 하곡賀谷(gaja) 등도 모두 가라계 지명으로서 대마도에 임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4. 마치는 글
지금까지 한반도와 왜열도 및 대마도에 모두 임나, 가야, 가라로 불린 지명이나 나라 이름이 있었음을 확인했으므로 이런 지명이나 나라 이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곳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임나는 한반도와 왜열도 및 대마도에 모두 있었던 지명이므로『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임나는 어느 곳에 있었던 임나였는지를 규명해야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반도의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에도『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계속 임나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575년 왜가 임나와 신라 및 백제에 사신 보냄; 600년 왜가 임나와 신라가 전쟁할 때 임나를 도움; 600년 왜가 임나와 신라에 사신 보내고, 임나와 신라도 왜에 사신 보내 조공; 623년 임나와 산라 사신이 함께 왜에 왔음; 638년 임나‧백제‧신라 사신이 함께 왜에 조공; 645년 고구려‧백제‧신라가 왜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백제 사신은 임나 사신을 겸함; 646년 임나‧고구려‧백제‧신라가 함께 왜에 사신 보내 조공).
이러한『일본서기』기록은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으므로,『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임나는 왜열도나 대마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모든 나라의 역사서들은 그 나라에 있었던 사실을 위주로 기록했다는 것으로서,
일본서기 역시 왜열도 안에서의 사실을 위주로 기술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임나·백제·신라·고구려 관계 기사 가운데 한반도나 대마도에 관계된 것도 섞여 있겠지만 그 주류는 왜열도 안에 있었던 임나‧백제‧신라‧고구려에 관한 기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난 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본 견해의 근본적인 잘못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가야)를 모두 한반도의 가야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일본인은『일본서기』<유라쿠(웅략雄略) 천황 7년>조에 기록되어 있는 중국은 대륙의 중국이 아닌 왜열도 안의 중국으로 해석한 반면 같은 기록에 등장하는 임나‧신라·한국·백제는 모두 한반도 안으로 해석한다는 점이 극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일본서기』<유라쿠 천황 23년>조의 신라 침공 기록에 등장하는 왜의 장군은 기비국(길비국吉備國) 출신이고, 이 기록에 등장하는 신라는 기비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와 가까이 있었던 임나와 백제 또한 이 지역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가야(하양賀陽)와 신라읍이 모두 오늘날 오카야마 현 지역에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기비국도 오늘날 오카야마 현 지역에 있었으므로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임나는 왜열도의 오카야마 현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와 임나(가야)·고구려·백제·신라의 관계 기사는 대부분 왜열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왜열도 안에 있었던 소국들이 항쟁하면서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0.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