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 "해탐노화도" "게그림" 해설 본문
위 그림은 손바닥만한 그림으로 김홍도가 그린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로서, 게 두 마리가 갈대를 꼭 붙들고 있다.
왜 그럴까? '갈대 로蘆' 자는 과거에 붙은 선비한테 임금이 주는 '고기 려臚' 자와 발음이 같다.
따라서 갈대를 꼭 붙든다는 것은 과거에 합격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게하고 갈대를 그릴 때는 반드시 부둥켜안은 모습을 그린다.
그림을 보면 뒤로 발랑 나자빠지면서도 결사적으로 잡고 놓지를 않는다.
그런데 한 마리, 두 마리니까 소과小科, 대과大科를 다 붙으라는 거다.
그리고 게딱지는 딱딱하니 한자로 쓰면 갑甲이고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첫 번째 글자이니까 소과와 대과 둘 다 장원급제하라는게 된다.
참 꿈도 야무지다!
그래서 숨은 뜻이 워낙 원대하고 씩씩하기 때문에 그림도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갈대 잎 필선을 쓱 끌어오다가 꾹 눌러서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며 출렁그리게 그리고, 노랑색을 좀 더 섞어 다시 아래로 한 번 더 긋고,
마지막 이파리를 교차해서 긋다가 힐끗 보니까, 처음에 그려 넣은 획이 좀 짧아보인다.
에이, 더 그어야겠다 해서 덧그렸다!
그러니까 아래에 있는 그림 구조에서 보듯이 여백이 아주 보기 좋게 떨어졌다.
화제畵題는 이렇게 썼다.
참 속 시원한 명필이다.
단원이 글씨도 이렇게 잘 썼기 때문에 단원, 단원 하는 거지, 그림만 잘 그렸던 게 아니다.
"해룡왕처야횡행 海龍王處也橫行 바닷속 용왕님 계신 곳에서도 나는야 옆으로 걷는다"
이거 참 멋들어지지 않는가?
익살도 익살이지만 그 안에 또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게 있다.
네가 나중에 고관이 되었어도 하늘이 준 네 타고난 천성대로 옆으로 삐딱하게 걸으면서 할 말 다 해야지, 임금님 앞이라고 쭈뼛쭈뼛 엉거주춤 앞뒤로 기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거다!
장난스러우면서도 뜻을 깊고, 참 옛 분들은 이런 식으로 놀았던 것이다.
작은 그림이지만 그 뜻이 얼마나 장한가?
위 그림에서도 게가 갈대꽃을 물었지만 하나, 둘, 세 마리인 것을 보니까 아마 초시初試도 합격 못 한 분에게 준 그림 같다.
여기 화제를 보면
"위류로신행찬수 사증 爲柳老贐行饌需 寫贈"이라 썼다.
즉 "류씨 노인께 과거 길 떠나는데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이 놈을 가지고 가시다가 게장을 끓여 드십시오! 찬수(반찬거리)로 쓰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이것도 익살을 떤 것이지만, 왜 이런 장난을 쳤나 하고 생각해 보니, 좀 서글픈 내력이 엿보인다.
그림 주인은 유씨 노인이다.
요새는 사법고시 공부하다가 나이가 40만 넘어도 너무 고생만 한다고 안쓰러워하곤 하지만, 예전엔 그놈의 진사나 생원 소리 한 번 들어 보려고 죽는 날까지 과거시험만 보다가 돌아가신 분이 많았다.
그러니 늙은 몸으로 시험 치러 가는 노인 심사가 얼마나 처량 맞았을까?
그래 노인네가 과거시험 보러 가는 씁쓸한 길이니까, 그 울울한 마음을 풀어 드리려고 '가다가 게장 끓여 드세요'하고 짐짓 장난을 친 것이다.
앞 그림이나 이 그림, 모두 게를 그렸지만 참 재빠르게도 그렸다.
중간치 붓으로 그저 몇 번 쓱쓱 긋고 나니까, 어기적어기적 게가 옆으로 기어 가지 않는가?
몇 분 안에 끝내는 이런 속필速筆 그림, 옛 그림의 별난 멋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게 그림>은 앞에 본 <해탐노화도>에 비해 그림이 많이 어둡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회화 작품 가운데 이렇듯 그림 색이 바랜 것들이 꽤 있는데, 일부는 원래부터 그랬겠지만 또 다른 것들은 박물관에서 너무 오래 전시하면 상하게 된다.
우리가 보통 박물관에 가 보면 서화 전시실이 다른 전시실보다는 더 컴컴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작품 보호를 위해 조명을 좀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가정에서 쓰는 조명은 300럭스 lux이지만, 건축설계사무소 같이 밝은 조명이 필요한 곳에서는 600럭스로 조명을 올린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서화를 전시할 때에는 100럭스를 기준으로 한다.
좀 어두운 듯하지만, 눈이 적응하면 그림 감상에 지장은 없다.
그러나 100럭스로 보여 주더라도 1년에 2개월 이상 전시되면 그림을 교체해야 한다.
작품에게 쉴 틈을 주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계속 전시하면 그림이 빛의 에너지에 두드려 맞아 이렇듯 어두워지게 된다.
어두워질 뿐만 아니라 작품이 딱딱하게 경화된다.
쉽게 말하자면 부스러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아예 안전하게끔 6주 간격으로 그림을 교체한다.
여러분, 박물관에 갔는데 같은 그림이 1년 내내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구요?
큰일 난다!
당장 신문에라도 써서 교체 전시하라고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것은 문화재 보호가 아니라 파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오주석 지음,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2017,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김홍도金弘道(1745~1806): 자는 사능士能, 호는 여러 개 있지만 단원檀園이 대표적인 호이다. 조선 영조와 정조 때의 도화서 화원 화가. 현동자 안견, 겸재 정선,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의 4대 화가로 불린다. 스승 강세황의 추천으로 어려서부터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시, 글씨, 그림에다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 시서화악詩書畵樂 사절四絶로 불린다. 자신이 남긴 단원풍속화첩(보물 제527호) 때문에 우리들에겐 풍속화가 잘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도석인물화(신선도), 영모화(화조화, 동물화) 등 거의 모든 회화 영역에서 작품을 남겼다.
2019. 10. 2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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