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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6-고구려의 중국 요서 지역 진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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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6-고구려의 중국 요서 지역 진출

새샘 2019. 10. 29. 14:49

<고구려의 중국 요서 지역 진출>


1. 들어가며


고구려高句麗(서기전 37~서기 668년)는 한반도와 만주를 통합한 통일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는 건국한 뒤부터 멸망할 때까지 주변 국가들과 계속 전쟁을 했다.

그런데 그러한 전쟁은 단순히 영토 확장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초기 주변 소국들을 병합할 때만 하더라도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영토가 확보되고 국력이 충실해 진 뒤부터는 오늘날 요서 지역으로 진출을 꾀해

중국의 통일 제국으로서 강대국인 서한西漢(서기전 206~서기 8년) 및

그 뒤를 이은 동한東漢(25~220년)과 계속 충돌했다.

이는 고구려가 오늘날 요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분열되고 중국 북부에 이민족들이 침입하여 단명의 황조皇朝(황제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 동진東晉시대(317~420)와 남북조南北朝시대(386~2589)의 혼란기에

고구려는 오히려 중국 지역 진출을 중단하고 남쪽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로 진출 방향을 바꾸었다.


고구려의 전쟁이 단순히 영토 확장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중국의 혼란 시기에 침공하는 것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전쟁의 방향을 중국이 아닌 남쪽의 한반도로 돌린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대외전쟁은 고구려의 건국이념이나 기본정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고구려의 전쟁 기록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기본정책의 일면을 고찰하는 것이며,

고조선의 뒤를 이은 열국시대에 한민족이 지니고 있었던 의식의 일부를 확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고구려의 지반 구축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나라를 세운 고구려 추모鄒牟왕(주몽朱蒙왕)(재위 서기전 37~서기전 19년)은

나라 기틀을 튼튼히 하기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맨 먼저 통합한 열국은 건국 1년 후인 서기전 36년 비류沸流국이었다.


그런데 비류국은 원래 고구려 땅이 아닌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 거수국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는 위 기록과 함께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알게 하는

다음 2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로 추모왕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고,

 둘째로 고구려는 비류국 지역을 고토故土(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기 나라 땅) 회복回復의 뜻을 지닌 

'다물도多勿都'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토인 적이 없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국을 다물도라 명명한 것은

바로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이념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랬기 때문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병합한 뒤 그곳에 고토 회복의 의미를 지닌 다물도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한 고구려의 뜻은 추모왕이 자신을 천제天帝의 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고조선 통치자는 단군檀君이라 했는데, 단군은 하느님이 아들이라는 뜻이다.

추모왕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다는 것은 자신을 고조선의 단군과 동격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이를 『삼국유사』 「기이」 <고구려>조의 저자 주석에 추모왕은 단군의 아들이었다는 기록으로 추론해 보면,

고대의 전설에서는 후손을 아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추모왕은 고조선의 단군 후손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추모왕 자신은 하느님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고조선이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재건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뒤 고조선의 영토 회복만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통치질서와 천하질서까지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비류국이 고구려 건국 2년 만에 첫 번째로 병합된 나라였다는 점은,

이것이 고구려의 국시國是였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고구려의 영토 확장 전쟁을 보면

추모왕 때인 서기전 32년 태백산(오늘날 백두산) 동남쪽에 있었던 행인荇人국,

서기전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하여 모두 성읍城邑(고을)을 만들었고,

2대 유리瑠璃왕 재위(서기전 19년~서기 18년) 때인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속국屬國을 만들었다.


이후 유리왕 때인 서기 14년 중국 왕망王莽이 건국한 신新나라(8~23년)로 가는 길목의 양맥梁貊을 쳐서 병합하고,

오늘날 요서 지역인 신나라의 현도군 고려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이는 1세기 초에 고구려는 이미 요서 지역에 진출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대 대무신大武神왕(재위 18~44) 때의 영토 확장은 26년 압록강 상류 유역의 개마蓋馬국과 구다句茶국 병합,

28년 동한(25~220년) 요동태수의 침공 격퇴, 37년 대동강 유역의 최씨낙랑국의 병합 등이다.


44년(대무신왕 27년) 동한은 최씨낙랑국을 정벌하여 낙랑樂浪이라 부르면 군사와 교역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는 동한이 고구려의 배후에 있는 최씨낙랑국을 부활시켜 고구려의 성장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낙랑은 300년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약 350년 동안 동한이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3. 고구려의 요서 수복


1세기 초까지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제국인 서한이나 동한과는 가능한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한은 고구려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배후인 오늘날 대동강 유역을 침공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또한 이런 동한의 전략을 좌시할 수 없어 1세기 중엽부터 오늘날 요서 지역 진출을 시작하게 된다.

5대 모본慕本왕(재위 48~53) 때인 49년 동한의 

우북평군右北平郡·어양군漁陽郡·상곡군上谷郡·태원군太原郡에 쳐들어갔고,

동한이 화친을 원하여 다시 국경을 정상화시켰다.


앞의 세 군은 오늘날 난하 서쪽 북경 주변 지역이었고

태원군은 오늘날 산서성 태원시로서 북경 서남쪽 멀리 황하 가까운 곳이었다.

따라서 1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오늘날 북경을 넘어 동한 영토 깊숙히 진출했던 것이다.


이후 6대 태조太祖왕(재위 53~146년) 때부터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지반 확장에 나서 오늘날 요하 동쪽은 물론

요서 지역도 적극적으로 확보하였다.


55년(태조왕 3년)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동한의 침략에 대비했으며,

56년 함경도의 동옥저를 멸하여 병합함으로써

고구려 영토가 동쪽은 동해까지 그리고 남쪽은 살수(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 갈사曷思국, 72년 조나藻那국, 74년 주나朱那국을 병합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에 있었던 나라들이었다.


고구려는 이런 나라들을 모두 병합함으로써 1세기 말에

서쪽은 오늘날 요서 일부를 포함하고 남쪽은 청천강을 경계로 남만주 일대에 걸친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력의 기초를 튼튼히 한 고구려는 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서방에 진출했다.

105년(태조왕 53년) 동한의 요동군(오늘날 난하 하류 유역)에 쳐들어갔고,

118년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성에 쳐들어가 낙랑군을 공격했다.

특히 121년에는 고구려는 동한과 격전을 치렀으며 전쟁 규모도 확대되었다.

146년(태조왕 94년) 동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에 쳐들어가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붙잡았다.


그러나 7대 차대次大왕 시대(재위 146~165년)에는 고구려 국내 정치가 문란하여 서방으로 진출하지 못했으며,

이 상황은 다음의 신대新大왕 시대(165~178년) 중반까지 이어져 동한과의 관계에서 고구려는 낮은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172년(신대왕 8년)부터 고구려에 유리하도록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172년 고구려에 침입한 동한군을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대파했고,

184년(고국천왕 6년)에는 고구려에 침입한 동한 요동태수군을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동한군을 격파했다.


동한 말기인 197년(고국천故國川왕 19년) 중국에서 황건黃巾농민군 봉기와 군웅할거가 계속되어 사회가 혼란하자

고구려로 망명오는 동한인들이 매우 많았으며,

217년(산상山上왕 21년)에는 동한인 1천여 호가 투항해 와서 받아들였다.


220년에 동한이 멸망하고 위魏·촉한蜀漢·오吳 세 나라가 분립한 삼국시대(220~266년)가 시작되었는데,

고구려는 중국 북방을 차지한 위나라와 가까이 있어 화친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234년(동천東川왕 8년) 위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고,

237년 고구려는 위나라에 연호 개칭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낸데 이어,

238년에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연을 치는데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어 도와주었다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시 요동은 오늘날 난하 유역으로서 원래 고조선 영토였다.

건국 이후 고조선 영토 수복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던 고구려는

당시 요동 지역에 공손씨와 같은 독자세력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나라를 도우긴 했지만,

이 지역을 위나라가 차지하도록 내 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242년 고구려는 요동군 서안평현을 쳐들어가 위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이렇게 고구려가 위나라 영토로 진출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위나라도

246년(동천왕 20년)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 환도丸都성를 치게 하여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고구려는 결국 승리했다.

259년(중천中川왕 12년)에도 고구려를 침공한 위나라를 격파했고,

280년(서천西川왕 11년)에는 침략한 숙신을 몰아내고 6, 7개의 숙신 부락한테 항복을 받아냈다.


3세기 말 중국 서진西晉(265~316년)은 외척이 정권을 장악하여 정권 내부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를 틈타 중국 북부의 5개의 이민족들이 성장하여 16개나 되는 단명의 정권들을 세워 교체가 거듭되는

혼란기의 五胡十六國시대(304~439년)가 되었다.


고조선의 옛 땅인 오늘날 요서 지역 탈환을 위해 노심초사해온

고구려 15대 미천美川왕(재위 300~331년)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302년 현도성 공격, 311년 요동군 서안평현 차지,

313년 낙랑군 침공, 314년 대방군 침공, 315년(미천왕 16년) 현도성을 격파함으로써

4세기 초 고구려 미천왕은 오늘날 난하 유역까지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지난 날 일부 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이때 고구려가 오늘날 요서 지역인 서쪽 변경과 한반도의 남쪽 변경의 양쪽에서 전쟁을 했던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전혀 방향이 다른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한다는 것은 전략상 매우 무모한 것인데,

당시 고구려가 이런 무모한 전쟁을 했을 리가 없다.

고구려는 같은 지역인 당시 요서 지역에서 계속 전쟁을 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은 계속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오늘날 난하 유역에서 인접해 있던

현도군·낙랑군·대방군·요동군 등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들 지역 중 현도군·낙랑군·대방군은 원래 고조선 영토였고, 요동군은 진제국 이래 중국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현도군·낙랑군·대방군을 차지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던 것이다.


4. 고구려의 천하질서


고구려는 315년(미천왕 16년) 서쪽으로 오늘날 난하 유역까지를 영토에 포함시켜

서쪽의 고조선 영토를 수복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이 시기까지 고구려는 주로 서쪽으로 진출을 꾀해 중국 지역에 있었던 나라들과 무력 충돌을 했으며

반면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서기전 18~660년)나 신라(서기전 57~935)와는 거의 충돌이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 왕실은 모두 자신들이 부여에서 왔다는 친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는 245년에 고구려에 제압당한 뒤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서 현실 상황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요서 지역을 완전히 수복한 뒤

16대 고국원故國原왕(재위 331~371년) 때부터는 고구려의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중국 지역의 나라들과는 되도록 충돌을 피하고 화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고조선의 영토였던 오늘날 요서 지역을 수복하여

일단 고구려가 그 지역에서 추구했던 목표는 달성되었으므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대신 고구려는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여 백제 및 신라와 잦은 충돌을 보였다.

고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고조선 영토였던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통치영역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천왕의 뒤를 이은 고국원왕 시대는 이런 정책 변화의 과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천왕의 낙랑군·현도군·대방군·요동군 침공을 받은

선비 모용황이 세운 전연前燕(337~370년)의 보복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백제 정벌은 369년(고국원왕 39년)에 시작되었으며,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다가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바로 전해인 370년 전연은 전진前秦(351~394년)에게 멸망했는데,

전연 모용황의 동생이 고구려로 도망오자 고구려는 이를 붙잡아 전진에에 보냈다.

고구려가 이렇게 전진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전진과의 마찰이 없었고,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에서도 고구려에게 불교 승려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전하는 등 평화가 계속되었다.

이런 평화적 상황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17대 소수림小獸林왕 시대(재위 371~384년)에도 백제 공격을 계속했고, 백제 또한 고구려를 침공했다.

다음 왕인 18대 고국양故國壤왕 시대(384~392년)에는 전연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가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세운 후연後燕(384~407)과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중단하지 않아 백제와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와 수호관계를 맺었는데,

신라의 내물 마립간 奈勿麻立干(재위 356~402년)은 조카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신라는 완전히 고구려의 통제 아래 있게 되었다.


392년 19대 광개토廣開土왕(재위 392~412년)이 즉위하여 394년까지 남쪽으로 백제 영토를 많이 잠식하였고, 

북쪽의 거란도 쳐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 


광개토왕 시대에는 북부여 지역이었던 오늘날 난하 상류 유역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395년 고구려 서쪽의 비려碑麗를 정벌했고, 396년 백제를 침공하여 58개 성과 700개 마을을 빼앗았다.

이때 백제 아신왕은 앞으로 영구히 고구려의 노객奴客(신하)이 될 것을 맹세했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했고,

400년에는 고구려의 신하 나라가 되어 있는 신라로 쳐들어온 왜구와 왜구를 조종한 임나가라를 정벌했다.

400~402년에는 고구려는 후연과의 전쟁을 벌였고,

404년 대방帶方국(오늘날 황해도)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궤멸했으며,

405~406년 후연이 쳐들어왔으나 고구려가 격퇴시켰다.


408년(광개토왕 17년)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후연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었다.

이는 당시 후연 왕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고씨였기 때문이었다.

410년 고구려는 동부여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동부여의 64개 성과 1,400여 개 마을을 함락시켰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광개토왕시대에 동서남북의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질서를 확립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추구해온 다물이념多勿理念,

즉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회복한다는 국가시책이 명분상으로는 일단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 뒤를 이어 413년 즉위한 20대 장수長壽왕(재위 413~491년)은 

즉위 원년에 중국 남부의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424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니 이를 후하게 대접했으며,

425, 435, 437년에는 중국 북부를 통합해가고 있던 북위北魏(386~534년)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이후 장수왕은 중국에 있던 나라들과는 화친을 유지하면서 백제와 더불어 신라까지도 침공하는 남진정책을 폈다.

이 시기에 이미 백제와 신라는 강대한 고구려에 위압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날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추구하는 천하질서를 실질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백제와 신라를 독립국으로 두기보다는 병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시대인 439, 462~490년 사이에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위에는 거의 매년 어떤 해에는 두세 번 사신을 보내 화친을 유지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 남조의 송宋(420~479년)과 송을 찬탈하여 건국한 남제南齊(479~502)에도 사신을 보냈다.


반면 장수왕시대에도 신라나 백제와는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454년 신라 북부 변경을 침공했고,

468년 말갈병을 이끌고 신라 실직주悉直州성(강원도 삼척)을 쳐서 빼앗았으며,

489년 신라 고산孤山성을 함락했다.


고구려의 대규모 백제 공격은 475년(장수왕 63년)에 있었다.

469년 백제의 고구려 남부 변경 공격에 대한 복수로서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 도읍인 한성을 함락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왔다.


이후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충돌하기까지

중국에 있는 나라들―동위東魏·북제北齊·북주北周·남제南齊·양梁·진陳―과 화친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의 침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598년 이후 고구려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581~619년)·당唐(618~907년)과 충돌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끝내는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5. 마치며


지금까지 고구려의 오늘날 요서 지역 진출을 비롯한 고구려 대외전쟁의 기본 목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구려 대외전쟁의 성격은 다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추모왕(서기전 37~서기 20년) 때부터 민중閔中왕(44~47년) 때까지

 주변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반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두 번째 단계는 모본왕(48~52년) 때부터 미천왕(300~330년) 때까지 오늘날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신라와는 거의 마찰이 없었다.

백제와는 동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화평을 유지했고,

신라와는 신하 나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갈등의 요인을 없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고국원왕(331~370) 때부터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침공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의 대외정책에 보이는 이러한 분명한 변화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고구려가 오늘날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대는

중국에 서한과 동한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있던 시기였으며,

고구려의 대외전쟁이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향하던 시대는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흥망과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일반 상식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하던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중단하고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를 통해 고구려가 오늘날 요서 지역으로 진출했던 것은

맹목적인 영토 확장이 아니라 다른 목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 방향에서 추구했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으므로

그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방향 전환이 있기 직전 미천왕 때인 315년에 고구려는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중국 군현을 모두 축출하여

오늘날 난하 유역까지를 그 판도에 넣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고조선 영토였으나 고조선 말기에 위만조선이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서한이 차지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 목표는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남쪽으로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것도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조선 영토는 한반도 남부 해안까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392~412년)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오늘날 요서 밖의 비려,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왜구 등을 침공하여

신하 나라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는 이미 전부터 신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광개토왕 때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은 물론 그 밖까지 호령함으로써

형식적이지만 고조선의 천하질서는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를 완전히 병합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을 신하 나라로 삼아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니

고조선시대의 거수국과 비슷한 천하질서가 일단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수왕 때(413~491년)부터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천하질서를 이루기 위해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직접지배 영역으로 만들 필요를 느끼고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는 배후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중국에 있는 나라들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에 수·당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출현하여 이들과도 마찰을 빚음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구려의 대외전쟁은 한반도와 만주를 재통합하여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것으로,

바로 '다물이념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념은 광개토왕 때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수왕 때부터 추구했던 실질적인 통합에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이 고조선의 계승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졌음은 「광개토왕릉비문」으로도 뒷받침된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속민屬民이었다."했고,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역사 사실과는 다르다.


광개토왕 이전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동부여도 추모왕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구려시대가 아닌 그 이전 고조선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시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거주민이 고조선의 속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단군의 후손이라고 믿었으므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를 포함한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들은

당연히 고구려왕의 속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은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다물이념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토만의 병합이 아닌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0. 2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