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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새샘 2020. 11. 3. 18:15

<피고석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1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사진 출처-https://newooos.tistory.com/entry/%EC%98%88%EB%A3%A8%EC%82%B4%EB%A0%98%EC%9D%98-%EC%95%84%EC%9D%B4%ED%9E%88%EB%A7%8C-%ED%95%9C%EB%82%98-%EC%95%84%EB%A0%8C%ED%8A%B8)>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1906~1962)은 늘 하던 대로 버스틀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지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1월, 베를린 근처 반제에서 나치 고위 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았다.

사실상 아이히만은 대략학살을 뜻하는 '최종 해결책'의 집행자가 된 것이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용케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 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꼬리를 잡혔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976명의 외국 특파원과 166명의 이스라엘 특파원에 의해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홀로코스트 Holocaust(대학살)[그리스어로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재물로 바치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서,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데 쓰이다가 1960년대부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의 세부사항들이 치밀하게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아이히만 체포를 전 세계가 한마음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나치즘에 공감했던 아랍 민족주의 진영은 안타까움을 표명했다.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 카이로와 요르단의 신문들은 아이히만에 대한 연민과 그가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재판이 열리던 날 카이로의 한 방송"지난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단 한 대의 독일 비행기도 유대인 거주지에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고 독일에 대한 불평을 내비쳤다.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던 아랍 민족주의 진영의 이와 같은 반응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독일의 과거사 청산을 높이 평가하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독일은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패전 직후인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퍼센트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 동안이나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라 관성이 작용해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독일 국민 중 37퍼센트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힌 것이다.

나치의 죄악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독일 국민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당시 바이에른 주 판·검사의 94퍼센트, 재무부 직원의 77퍼센트가 나치 전력자였다.

 

1960년의 전범 아이히만 제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됨으로써 학살의 참상이 수백만 명에게 속속들이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퍼센트에서 1967년 32퍼센트로 하락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에릭 바나 주연 영화 '뮌헨'(2005).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1972년 뮌헨올림픽. 모두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가운데 끔찍한 인질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 되고,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검은 9월단'은 인질로 잡은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살해한다. 전 세계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고, 팔레스타인은 이제 세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고 자축한다. 하지만 보복을 결심한 이스라엘은 비밀공작을 준비한다.(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Munich_(film))>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1913~1992)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된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서독인들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립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1995년 SBS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모래시계>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살아남은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우리의 경제 발전이 일정 부분 친일 세력에 힘입었다는 사실과 어딘가 닮아 있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흑백논리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 때문이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11. 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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