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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비밀을 풀 실마리 연해주 콕샤로프카 발해 유적

새샘 2020. 11. 14. 18:06

연해주, 한민족의 오랜 터전

 

한러 공동 발굴단의 콕샤로프카 유적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콕샤로프카 유적 전경(사진 출처-출처자료2)

 

콕샤로프카 유적 전경(사진 출처-출처자료2)

 

"프리모르스크(연해주)에 들어선 최초의 고대 국가는 발해다."

2012년 10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에서 열린 산운汕耘 장도빈(1888~1963) 기념비 제작식.

당시 블라디미르 쿠릴로프 러시아 극동연방대 부총장은 제막식 기념사에서 발해를 입에 올렸다.

산운은 연해주에 발해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제기한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그는 단재 신채호와 함께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발해가 연해주에 고대 한민족의 영광을 남겼다면 산운은 근·현대 한민족의 고통과 항전의 역사를 이 땅에 새겼다.

지금은 이국의 영토가 되어버렸지만 연해주는 선사시대부터 고조선, 옥저, 발해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오랜 역사 강역이었다.

실제로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토기와 흡사한 유물이 연해주 리소보예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이뤄진 선사시대 문화 교류의 흔적이다.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선사고고실장은 "선사시대에 연해주는 한반도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여 있었다"고 말했다.

 

 

황무지에 남겨진 발해 온돌

 

콕샤로프카 유적의 대형 건물터에는 온돌의 초기 형태인 '쪽구들'의 흔적이 선명하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콕샤로프카 대형 건뭁터 쪽구들에 남아 있는 구들장(사진 출처-출처자료1)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400킬로미터를 달리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평원이 나타난다.

궁벽한 시골 마을 '콕샤로프카 Кокшаровка'다.

가슴 높이까지 자란 풀밭을 무작정 헤치고 들어가자, 어른 손가락 크기만한 등에 떼가 쉴 새 없이 달려든다.

등에는 흡혈곤충 가운데 가장 몸집이 큰데, 사람은 물론 말의 피까지 빨아먹는다.

주변은 농작물은커녕 꽃 한 송이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

과연 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잡초를 걷어내자 그곳에서 문명의 흔적이 하나씩 드러났다.

 

 

콕샤로프카 유적의 성터에서 성벽 유구를 살펴보고 있는 러시아과학원 선사고고실장(왼쪽)과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사진 출처-출처자료1)

 

김동훈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선사고고실장이 'ㄴ' 자로 꺾인 석렬石列[돌 배열]을 가리켰다.

발해시대 '쪽구들'의 일부인 부뚜막 유구遺構(옛 토목건축물의 자취)다.

한민족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온돌의 초기 형태다.

부뚜막과 연결되어 불길이 지나는 고래는 약 1.8미터 폭으로 건물 벽을 따라 죽 이어졌다.

15미터 길이의 고래를 따라가니 건물 밖으로 연기를 빼내는 연도와 3.5미터 너비의 굴뚝 기둥이 보였다.

평지에서는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2006~2013년의 8년에 걸쳐 콕샤로프카 성城 유적을 조사한 한러 공동 발굴단은 이곳에서 한 변의 길이가 10~13미터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 7개를 발견했다.

돌담장 안에 건물들이 1~1.8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배치된 구조다.

여러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보니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채를 연상시킨다.

함께 현장 답사에 나선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고고학)는 "북방 오지를 개척하며 대제국을 일군 발해의 정체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말했다.

 

 

말갈이 아닌 발해가 세운 유적

 

애초에 러시아 학계는 콕샤로프카 유적을 말갈이 처음 세운 것으로 봤다.

유적에서 발해 유물뿐만 아니라 나중에 콕샤로프카 성을 차지한 말갈계 유적도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이블리예프 등 발해사 연구자들이 발해의 영역을 한카 호수 남쪽으로 좁게 해석한 것도 말갈설에 영햐을 끼쳤다.

콕샤로프카 유적은 이블리예프 등 일부 학자들이 설정한 발해의 북쪽 경계보다 더 위쪽에 있다.

콕샤로프카 발해 유적으로 보면 발해 영토는 아무르강 유역까지 확장해 볼 여지가 생긴다.

 

사실 발해와 말갈의 관계를 둘러싼 한국, 러시아, 중국 학계의 시각은 제각각이다.

한국 학계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발해 유적을 자국 영토 안에 둔 러시아나 중국 학계는 고구려보다 말갈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이는 한민족과 달리 연해주 토착세력인 말갈은 독자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고 오래전 러시아나 중국에 흡수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은 지 100여 년밖에 안 되는 러시아로서는 한국의 발해 고토古土 주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이와 관련해 구소련은 1970년대 중소 분쟁 이후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던 수천 개의 중국식 지명을 모두 러시아식으로 바꿨다.

심지어 우수리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우수리스키섬에서 여진족 무덤이 발굴되자, KGB가 고련 고고학자들을 심문하는 일까지 벌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 영역을 축소 해석하는 러시아 학계의 시각은 콕샤로프카 발굴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공동 발굴단이 2008년 9월 이곳에서 쪽구들의 전모를 밝혀낸 게 결정적이었다.

쪽구들은 발해가 고구려로부터 이어받은 주거문화로, 말갈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여진은 쪽구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돌로 측벽을 쌓는 발해와 달리 측벽을 세우지 않는다.

김동훈 학예연구사는 "고래가 꺾이는 형태난 집 밖으로 굴뚝을 내는 구조가 중국에 있는 발해의 상경성上京城 유적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개별 건물만 놓고 보면 콕샤로프카 유적 규모는 상경성보다 크다.

 

러시아 학계도 초기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발해가 콕샤로프카 성을 처음 세웠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초기에 말갈설을 주장했던 알렉산드르 이블리예프조차 콕샤로프카 유적을 처음 세운 것은 발해라고 정정한 논문을 2016년에 발표했다.

강인욱 교수는 "대부분의 발해성은 토착의 말갈인들 비율이 높으며 발해 멸망 이후에는 여진이 계속 사용했다.

이 때문에 유적에서 발해와 말갈, 여진 유물이 층을 이뤄 함께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2014년 콕샤로프카 성벽의 단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부뚜막에 솥을 걸 때 사용하는 '주사위형 토제품'이 출토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유물은 지금껏 서고성西古城과 연해주 크라스키노, 아브리코스 등 발해 유적에서만 확인되었다.

콕샤로프카 북문과 서문 쪽에서 발견된 'ㄱ' 자형 옹성은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요소다.

2012년까지 한국 발굴단을 이끈 홍형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현 강릉원주대 교수)은 "콕샤로프카 유적은 발행의 영역은 물론 말갈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핵심 열쇠"라며 "발해 멸망 이후 주민들이 어디로 유입되었는지 파악할 실마리도 이곳에 묻혀 있다"고 말했다.

 

 

발해, 거친 북방을 개척하다

 

쪽구들을 갖춘 대형 건물터는 콕샤로프카 발굴단에 하나의 미스터리를 남겼다.

'수도 상경성에 버금가는 건물둘을 먼 변방에 지은 이유는 무엇이며, 여느 고대의 대형 건물과는 달리 기와가 발견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유물 수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건물을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드문 것도 의문이었다.

 

 

콕샤로프카 유적에서 출토된 원통형 그릇받침(기대)(사진 출처-출처자료1)

 

대형 건물들 사이에서 장식용 통형기대筒形器臺(그릇받침) 4점이 출토된 것도 눈길을 끈다.

기대는 신라, 백제, 가야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발해 유적에서 기대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콕샤로프카 기대는 문양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워 건물 외관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궁금증을 풀 실마리는 인근의 제사 유적에서 나왔다.

돌로 쌓은 사각형 모양의 제단에서 흥미롭게도 '위구르계 토기'가 발견되었다.

독특한 기형器形으로 짐작하건대 위구르 제국이 존속했던 762년에서 820년 사이에 제작된 토기로 추정된다.

발해 유적에서 중앙아시아 유목민이라니 조금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다.

학계는 8~9세기 발해와 위구르 제국의 교역 과정에서 위구르인이 멀리 연해주까지 건너온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분석한다.

이 위구르인은 840년경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자 발해로 귀환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제단은 콕샤로프카 유적이 발해의 핵심 무역 거점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콕샤로프카 일대는 예로부터 주요 모피 산지였으며, 우수리강에서 2~3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배로 물자를 실어 나르기에 용이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연해주 아무르강 하류의 모피 거래처였던 콕샤로프카에 호화로운 대형 건물들이 들어선 사실에 주목한다.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주변 토착민들에게 위세를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화려한 건물을 지었다는 추론이다.

모피 교역은 주로 겨울에 이뤄지므로 사계절 내내 거주할 필요는 없으며, 쪽구들과 같은 난방 시설만 갖추면 충분했을 것이다.

 

발굴단은 콕샤로프칸 성벽의 규모(1,645미터)나 위치(우수리강 상류), 출토 유물 등의 정황을 미뤄볼 때 이곳이 발해 지방 행정 구역(5경 15부 62주) 중 안변부安邊府에 해당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발해의 지방 행정 치소 겸 무역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 유적은 발해시대 당시 염주鹽州로 추정된다.

 

콕샤로프카 유적에서는 양 뼈로 만든 주사위로 고대 흉노족의 놀이기구인 샤가이가 출토되었다.

이와 함께 2013년 연해주 니콜라예프카 발해 유적에서는 고대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들의 악기인 바르간(구금口琴)이 발견되었다.

발해가 북방 유목민들과 활발히 교류한 사실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발해인들이 먼 북방의 오지를 개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발해는 거대 제국 당이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밀려 고구려보다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도 영토를 비약적으로 늘려 해동성국으로 발전한 것은 불리한 자연환경을 개척해 다양한 자원을 획득한 발해의 성장 모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인욱 교수는 "콕샤로프카 유적은 자원을 얻기 위해 척박한 북방을 개척한 발해인들의 진취성을 보여준다"며 "이후 거란과 여진이 각각 요와 금을 건국할 때 발해를 벤치마킹했다"고 말했다.

 

 

콕샤로프카 유적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공예품들(사진 출처-출처 자료2)

 

 

○한러 공동 발굴 20년

 

러시아의 연해주 내 발해 유적 연구는 196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당시 크라스키노 성터와 발해 사찰 유적들이 잇달아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1968년 샤프쿠노프가 발해 고고학 연구서를 처음 발간했다.

현재도 조사가 진행 중인 크라스키노 유적에서는 2015년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고, 2016년에는 발해 청동거울이 출토되었다.

러시아 학계는 발해 유적에 대한 고고학 조사와 더불어 고대 중국의 문헌 기록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 발굴에 나선 것은 2000년 아무르강 수추 유적 발굴이 최초다.

수추 유적은 서기전 4000년 무렵의 신석기시대로 분류된다.

2006년 콕샤로프카 유적에서는 한국과 러시아 고고학자 7명이 발굴에 참여했는데, 한국 측 발굴단장은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었다.

이외에 윤근일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책임조사원으로, 홍형우 현 강릉원주대 교수와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조사원으로 참여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선사고고실장(신석기 전공)이 발굴단장이었고, 이고르 유리비치 슬렙초프(선사고고학)와 옐레나 알베르토브나 세르구셰바(식물고고학)가 조사원으로 힘을 보탰다.

 

연해주 발해 유적 발굴 조사는 한국 학자들에게 출토 유물을 현장에서 만져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국과 북한에도 발해 유적이 있지만 동북공정 후폭풍과 분단 상황으로 인해 한국 고고학자들이 발굴 조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 못지않게 러시아 고고학자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출토 시료분석에서 한국의 첨단 기기와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학계는 한국 특유의 업무 추진 속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선사고고실장은 "콕샤로프카 발굴 조사 보고서가 빠른 시일 안에 높은 수준으로 발간되어 놀랐다"고 말했다.

 

학계는 지난 70년 동안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에서 제각각 진행된 발해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국가별로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발해에 접근하는 측면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4개국 학계가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합의 가능한 학설을 체계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출처

1.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 대한민국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러시아연방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족지연구소,

'연해주 콕샤로프카 유적'(2015)(https://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565&info_idx=2020&bunya_cd=419&report_cd=387#link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565&info_idx=2020&bunya_cd=419&report_cd=387#link)

 

2020. 11.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