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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나성동 백제 도시 유적

새샘 2020. 12. 26. 16:46

<2010년 발굴 당시 나성리 유전 전경(사진 출처-출처자료2)>

고대의 도심 호수공원

 

"1600년 전에 거대한 도심 호수공원이라니·····"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羅城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 현장에서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 교수(고고학)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 유적 한가운데에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遺構였다.

호우로 인해 갑자기 생긴 1.5미터 깊이의 호수는 너비 70미터, 길이 300미터에 달했다.

도시 가운데 자리 잡은 모습이 마치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출토 양상도 이 구덩이가 도심의 경관용 호수라는 판단을 굳히게 했다.

당초 이홍종은 이곳을 강물 근처 단구段丘[하안, 해안, 호안 등을 따라 형성된 계단 모양의 지형]에 있는 저습지로

보고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과 같은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발굴 조사원들에게 '유기물이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건만,

정작 구덩이 속에서는 토기 조각 몇 점만 나왔다.

이홍종은 "도시의 핵심 경관인 만큼 호수를 깨끗하게 관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세종시가 들어선 뒤 흔적 없이 사라진 나성리 유적 일대(사진 출처-출처자료2)>

그와 함께 답사한 나성리 발굴 현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대거 들어서 가운데 도시 유적 위로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현존하는 백제 유일의 지방 도시 유적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정부가 지었을까, 지방 세력이 지었을까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가 발굴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 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 도시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지방 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 구조를 이해하고

왕경이 아닌 지역에 살았던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고고학계가 오랜 세월에 걸쳐 심층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폼페이는 인구가 최대 3만 명을 넘지 않는 고대 로마의 소도시였다.

폼페이에 세운 각종 도심 건물이나 조각들은 로마를 본뜬 것이었다.

학계는 폼페이 같은 지방 소도시 발굴 조사 결과가 고대사 규명의 핵심 열쇠라고 본다.

로마시대 역사가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아 기록에 전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조명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성리 유적에서 발굴된 금동유물(사진 출처-출처자료2)>
<나성리 유적에서 발굴된 금동신발 한 쌍. 바로 위 사진의 오른쪽에서도 보인다(사진 출처-http://sbook.allabout.co.kr/magazine/museum/sm-22/pt-post/nd-272)>

나성리 유적이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깐 뒤에 건물을 올린 계획도시
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미터[측구側溝(도로 배수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 호수, 창고, 빙고氷庫,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이 밖에 대형 항아리를 굽는 가마터가 따로 있었으며, 가장 높은 지대에는 수장급 무덤을 두었다.

이 무덤 안에서는 백제 귀족들이 부장품으로 애용한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거대한 도시 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 정부인지 아니면 지방 지배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을 엇갈린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나성리 유적이 풍납토성 구조와 비슷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 정부가 도시 건설을 주도했을 거라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여들여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판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대 중국의 도성제를 배운 백제가 한성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도 이를 적용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힌근 송원리 고분군에 중국 남조풍의 양식이 가미된 사실도

백제 중앙과 중국의 교류가 이곳까지 영향을 끼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이홍종은 "출토 유물이나 묘제가 백제 중앙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은 지방 지배층이 도시 건설을 주도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백제 중앙으로부터 반半 자치를 인정받은 이 지역 토착 지배층이 왕실과 긴밀히 협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5세기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영산강 유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했다

임영진 전남대 교수의 주장과는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충청·호남 일대의 지방 지배층도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진 백제 중앙 정부에 점차 복속되어 갔다.

 

백제시대 당시 이 도시의 위상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도로부터 귀족 주거지까지 각종 도시 인프라[기반 시설, infrastructure]가 갖춰진 정황을 볼 때

왕성王城[왕이 살던 성으로서 일명 왕경王京]이었던 한성漢城에 버금가는 규모였다는 게 이홍종의 견해다.

백제가 웅진熊津[현 공주]으로 천도를 단행할 때 나성리 지배 세력의 일부가 핵심 집단으로 참여했다는 학설도

이 도시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홍종은 "백제시대 나성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광역시급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행정 거점으로서 고대 도시는 배후에 식량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농경 마을을 거느리기 마련이다.

현대의 메트로폴리탄이 베드타운 기능을 하는 여러 배후 도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

나성리 도시 유적의 경우 배후에 기능별로 5개 마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식량 생산기지 역할을 담당한 송담리·대평리 등 3개 마을, 물류 유통을 맡은 석삼리 마을,

식량 저장기지였던 월산리 황골마을 등이다.

이 중 석삼리 마을의 지배 집단이 백제 중앙과 연결고리를 기반으로 도시 건설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게

발굴단의 추정이다.

이들이 나성리에 도시를 세운 것은 강변에 인접해 수운水運을 통한 물류가 가능한 입지 조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

 

이와 관련해 2003~2005년 발굴 조사된 광주 동림동 조시 유적 구조가 나성리 유적과 닮은 점이 주목된다.

5~6세기에 조성된 동림동 도시 유적에서는

98개 주거지와 64개 창고 시설, 저장 구덩이, 도로, 우물, 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도시 중심부에 길이 50미터, 너비 12미터의 구역을 별도로 획정해 지배층의 주거공간을 마련했다.

이곳도 나성리 유적처럼 영산강 유역에 자리 잡아 물류 거점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학계 일각에서는 나성리와 동림동 유적 모두

백제 중앙 정부가 건설 과정에 개입한 지방 도시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신라에서도 왕경이 아닌 도시 유적의 존재가 2013년에 드러났다.

왕경 바깥인 경주 방내리와 모량리에서

도로와 우물, 담장, 건물터, 제방 등 통일신라시대 도시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도로에 의해 사각형으로 구획된 방제坊制[도시를 여러 개의 방으로 구획한 제도]

신라 왕경 이외의 도시에도 적용된 사실이 처음 확인되었다.

 

첨단 고지형 분석으로 도시 유적 찾기

<나성리 유적에 대한 고지형 분석도. 유적 내 토성을 둘러싼 옛 물길과 금강, 제천이 일종의 해자로 활용된 사실이 드러났다.(사진 출처-출처자료2)>

나성리 도시 유적의 존재는 발굴에 들어가기 5년 전인 2005년 9월 고古지형 분석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발굴 과정에서 도심 호수로 밝혀진 거대한 웅덩이도 이때 대략 파악되었다.

그러나 정작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앞서 3개 발굴 조사 기관이 나성리를 비롯한

금강 일대 충적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했지만 별다른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땅속 깊은 곳에 유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지형 분석 결과를 토대로 지표에서 8미터나 파내려가자 비로소 나성리 유적의 실체가 드러났다.

 

고지형 분석이란 항공사진과 고지도 등을 통해

유적 조성 당시의 옛 지형을 파악하고 지하에 묻힌 유적의 양상을 추정하는 기법이다.

연사蓮寫[연속촬영한 사진] 항공사진들의 낱장을 비교하면 겹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3차원[3D]으로 재연하면 세부 지형의 높낮이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랜 침식과 퇴적으로 사라진 옛 물길[구하도舊河道]이나 구릉의 위치를 알아내

옛 주거지의 존재 여부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서기전 5000년과 서기전 2세기, 서기 11세기 경에 발생한

기후변화로 인해 생성된 지형 변동과 단구들도 고지형 분석에 활용된다.

 

이홍종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나성리뿐만 아니라 공주, 논산, 청주에도 백제시대 도시 유적이 땅 아래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고지형 분석을 서울에 적용해보면

한성백제시대 수도 한성의 범위는 강남 수서와 석촌동 일대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한성 주민들을 먹여 살린 농경지대는

현재의 서울 강동구 고덕동과 경기 구리시 교문동, 하남시 미사리 일대에 걸쳐 있었을 것이다.

 

이홍종은 2010년 고지형 분석을 위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ATIS-3D 개발을

의료 장비 업체에 의뢰해 2013년 특허까지 받았다.

미군도 이와 비슷ㅎ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군사작전을 위한 지형 분석에 이용한다고 한다.

첨단 소프트웨어도 중요하지만 비교 자료로 쓰이는

1960~1970년대 항공 사진이나 조선시대 고지도 등 희귀 자료를 입수하는 것도 관건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작성한 지형도까지 구한다.

 

흥미로운 점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규명한

옛 물길을 따라 요즘 들어 지진이나 싱크홀이 빈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물길은 암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지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고베 지진 당시 사망자의 97퍼센트가 옛 물길과 습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나성리 유적에서 발굴된 고구려 토기(위)와 가야 토기(아래)(사진 출처-출처자료1)>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 유적이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의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의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시가 쇠퇴의 길로 접어든 뒤 나성리는 한동안 고구려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이곳 토성에서 고구려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5세기에 고구려가 남진을 본격화하면서 충청권까지 공격한 사실이 나성리 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구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장구(사진 출처-http://sbook.allabout.co.kr/magazine/museum/sm-22/pt-post/nd-272)>

나성리 유적에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장구[요고腰鼓]가 나왔다.

흙으로 구운 것인데 5세기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 불교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로 만들어진 요고는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열도에까지 전해졌다.

백제가 중국 남조를 통해 요고를 들여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나성리 출토 요고는 본래 길이가 45센티미터로 가운데가 잘록한 원통형이다.

5세기대 요고의 실물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확인된 적이 없다.

앞서 하남 이성산성 등 두 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요고가 발견된 바 있다.

고려시대 유적에서도 도자기로 만든 요고가 나왔다.

 

라면 박스 깔고 자며 첫 발굴을 하다

 

이홍종은 1958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규슈대에서 야요이시대 농경 유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많은 국내 고고학자가 김원룡 서울대 교수의 제자를 말하는 '삼불三佛 키즈'인 것처럼

이홍종도 김원룡 교수의 영향으로 고고학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삼불의 글 <한국의 미를 찾아서>를 읽고 고고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고고 발굴 현장에 발을 들인 것은 군 제대 직후 복학생 신분으로 참여한 '충주댐 수몰지구 발굴'이었다.

마을회관 바닥에 라면 박스를 깔고 자면서 온종일 발굴에 매달렸다.

이홍종은 "2주 정도 지나자 학부생 7명 중 나만 현장에 남았다.

발굴 작업은 고됐지만 적성에 맞았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고 회고했다.

학부를 마친 뒤 처음엔 일본 게이오대로 유학을 갔지만 한일 농경문화 비교 연구에 매력을 느끼고

이 분야 권위자인 오카자키 게이 교수를 찾아 1985년 규슈대로 옮겼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논농사 유적인

이타즈케[판부板付]를 직접 발굴하면서 한일 농경유적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나성리 유적에서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발굴 현장에서 50미터만 더 나가면 백제시대 선착장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당시 발굴 중인 유적이 강가로 연장되는 양상이었는데 발굴 허가 범위를 넘어섰기에 추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행정도시가 된 세종시에

1600년 전 백제 목선들이 금강을 통해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활발히 실어나른 셈이다.

 

※출처

1.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 brunch.co.kr/@castlife/23

 

2020. 12. 2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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