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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학포 이상좌 "불화묵초"

새샘 2020. 12. 23. 20:09

<이상좌, 불화묵초, 종이에 수묵, 40.9×23.5㎝,호암미술관(사진 출처-http://gosiga.cafe24.com/bbs/zboard.php?id=56&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PHPSESSID=8bbb69f5749057bce3d369e08b50b49f)>

이상좌李上佐라는 사람도 수수께끼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상좌는 사사私私집[일반 백성의 살림집]의 종복從僕[종살이 하는 남자]이었다고 하며,

선화善畵[조선 도화서 벼슬아치]라고 해서 당시 이미 왕가에서 널리 이름을 날리던 이암李巖과 함께

그림을 잘 그렸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화사畵師[조선시대 화가] 이상좌라고 해서 화원畵員[조선 도화서 잡직]이었다는 사실도 적혀 있다.

 

그런데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17년 오세창吳世昌이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書畵家의 사적事績(실적과 공적)과 평전傳(일생에 대해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을 수록한 사전]에 보면 자字는 공우公祐요, 호는 학포學圃라고 되어 있어서,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사사집의 종복으로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따른다.

 

이에 대한 설명이 ≪패관잡기稗官雜記≫[어숙권魚叔權이 조선 전기의 사실史實과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수필집]에 나오는데,

사사집의 종복인 그는 그림을 매우 잘 그려서 이름이 왕가에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중종이 애호하여 종복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 후 중종 사망 때 용안을 그리게 되어서 어용御容화가[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는 글도 나온다.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했었다는 이야기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적혀 있으며,

이름이 그렇게 높았던 것에 비해서 지금 전하는 작품 가운데 확실한 이상좌의 그림은 거의 없다.

 

전칭傳稱[전하여 일컬음]하는 것 중에 비교적 확실하다고 하는 것이 허미수許眉叟의 ≪기언記言≫에 나와 았는

바로 이 <불화묵초佛畵墨草>라고 하는 간단한 데생이다.

 

이 그림은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허미수가 그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기언記言≫에 적혀 있어,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비교적 유래가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불화묵초佛畵墨草>를 보면 아주 능하게는 되어 있지만 보통의 여느 불화 묵초와는 다르다.

보통의 불화 묵초는 쉼 없이 한선으로만 탁 그리는데 비해

이 불화 묵초는 그렇지 않고 여러 필선으로 더해가며 그렸기 때문이다.

 

과연 이 그림이 이상좌의 진작眞作이라면 그 솜씨가 능하기도 능하지만,

동시에 그가 불화를 그렸다고 하는 한 좋은 예가 된다.

 

2020년 12월 14일에 올린 글 "조선 불화 이자실 '관음삼십이응신도'"에서 이자실의 집안을 언급하면서

이상좌-이자실-이숭효/이흥효-이정의 가계에서 이숭효/이흥효를 제외한 나머지 3대는 모두 불화를 그렸었고,

특히 이정의 불화는 유명하다.

 

그러면 과연 이상좌란 화가가 과연 불화를 많이 그렸었던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현재 전칭하는 이상좌의 그림은 모두 산수화나 인물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화묵초>의 스케치를 보면 많이 그려보려고 애썼던 흔적은 여실하다.

 

※출처: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020. 12. 2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