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허주 이징 "이금산수도"와 "노안도" 본문
이징李澄(1581~1653 이후)은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서자로 화원이며, 호는 허주虛舟다.
다음과 같은 이징의 일화가 전해온다.
병자호란丙丁虜亂(조청전쟁朝淸戰爭)을 치른 후 그 혼란이 아직 수습되지 않았을 때, 인조는 그림을 좋아해서 이징을 데리고 그림 장난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신하들이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때이므로 그림 장난을 못하도록 인조에게 여러 번 간을 하면서, 문제로 삼았던 화원이 바로 이징이었다.
이처럼 이징이 인조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궁 안에 있던 그림을 많이 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징은 각체各體에 능하다' 즉 '여러 분야의 그림에 능하다'는 평가가 있다.
이징의 그림으로는 작은 크기들이 많다.
그런데 이징의 것이라고 하는 작품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과연 진짜 이징의 것인지는 의문이다.
과연 이징의 대표작은 무엇이고 기준작은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징에 대해서 아주 날카롭게 비평한 사람이 있다.
남태응(1687~1740)의 평인데 "이 사람은 법도 안에 있어서 얌전하게는 그리고 규격대로는 잘 그리지만 그것을 뛰어넘지는 못 한다" 즉 독창성은 적다는 평을 했다.
지금 나와 있는 이징의 그림을 보면 이런 평가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이징의 그림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때 경매 나왔던 <산수도> 하나가 좋은 작품이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그림이 아마도 산수 중에서는 그의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재로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비단에 이금泥金[금가루를 아교 물에 갠 금물을 말하며, 금니金泥라고도 함]으로 그린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가 이징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은 흩어져 있는 산수山水 대관大觀[자연을 크고 넓게 전체를 내다봄 즉 대자연大自然]을 크게 집어 넣은 산수인데 그런 작품이 아마 당시에는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허주의 이금산수는 이 그림 외에도 지금 몇 개가 있다.
좋은 이징 화첩이 하나 있다.
작은 화첩으로 가운데 동그라미가 있고, 그 동그라미 안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서 미군정시대에 미국 여자가 사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화첩에는 솥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다음 이징의 대표작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노안도蘆雁圖>가 있다.
이징은 '갈대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그림'인 노안도를 많이 그렸던 것 같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열상화보洌上畵譜>라고 하여 중국에 가져갔던 그림을 보면 허주의 <노안도>가 있다.
아마 잘 그렸던 그림이었을 것이다.
위에 있는 <노안도蘆雁圖>는 중국 명나라 풍 그림이다.
갈대밭에 내려 앉은 기러기[노안蘆雁]을 십여 마리 정도 아주 무르게 그렸다.
허주 그림의 노안은 기러기의 배 근처에 선을 몇 개 그려놓는데 이것은 중국에는 별로 없는 그림 양식이다.
낙관도 재미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 영향을 많이 끼친 명나라 궁정의 대표적인 화조花鳥[꽃과 새] 화가인 임량林良(1426경~1480)이나 여기呂紀(1477경~?) 같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린 다음 옆에다 이름만 '임량', '여기'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징이 그 사람들의 그림을 많이 봐서 그랬는지 여기에 '이징'이라고 낙관하고 도장을 찍고 있다.
말하자면 명나라 풍의 낙관을 한 것이다.
명나라 풍의 이 <노안도>가 이징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새샘블로그에는 '허주 이징 금니산수도'(2018. 11. 23)란 제목으로 다른 미술평론가의 글이 올려져 있으니 비교해 보세요.
※출처: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021. 4.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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