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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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국내

2021. 6. 6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새샘 2021. 6. 10. 21:26

<정약용 유적지 안내 지도>

두물머리(양수리兩水里)를 마주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경기도 남양주楊州市 조안면鳥安面 다산로茶山路(능내리陵內里)의 마재(마현馬峴: 말재갈)마을정약용 유적지遺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은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15살때까지 살았으며, 1818년 귀양에서 풀리자 고향 마재마을로 돌아와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 유적지에는 500여 권에 이르는 선생의 저작물 소개가 되어 있는 다산문화관, 선생의 업적과 발걸음을 정리해 놓은 다산기념관,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 선생의 , 사당인 문도사 등이 조성되어 있다.

 

큰길 다산로에서 바라본 정약용 유적지 진입로.

바로 앞 정자가 천일각, 왼쪽 뒤가 기념탑 구실을 하는 조각작품 '꺼지지 않는 불', 그 왼쪽 큰 기와집이 다산문화관, 기념탑 오른쪽 뒤 작은 기와 건물이 유적지 정문이다.

 

천일각天一閣은 다산 선생이 18년 동안 전남 강진 유배 생활때 다산초당 부근에 있던 정자를 이곳에 재현한 것.

이 정자 앞이 마을버스 정류장이다.

 

천일각을 지나서 바라본 정약용 유적지의 기념탑과 다산기념관.

왼쪽 다산로 길 양쪽에 '정약용 유적지' '문화의 거리' 표지판이 거로 마주 보고 있다.

 

정약용 유적지의 기념탑 구실을 하는 조각 '꺼지지 않는 불'.

이 작품은 다산 선생이 저술한 약 500여 권의 서책을 화강암에 조각한 것인데, 서책을 통해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 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설판이 붙어 있다.

서책 가운데 대표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 조각.

 

기념탑을 지나 유적지 정문으로 가는 다산로747번길 입구에 왼쪽의 다산문화관茶山文化館.

이곳에는 저술한 책을 통해 선생의 인간적 고뇌와 삶의 철학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정약용 선생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5가지 주제를 가지고 만든 그래픽 패널이 전시되어 있고, '다산의 삶'이란 애니메이션 영상물이 상영된다고 한다.

 

다산문화관을 지나 유적지 정문으로 가는 도중 길 오른쪽에 서 있는 선생의 발명품인 거중기擧重機 모형.

정조대왕 때인 1792년 서양 기계 지식을 소개한 중국어 백과사전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보고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크레인으로서, 수원성을 쌓을 때 사용하여 경비 절감과 함께 공기까지 단축하였다.

위 아래에 각각 도르래 4개씩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에 물건을 달아맨 다음, 위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돌림으로써 아래 도르래에 매달린 무거운 물건이 위로 들여 옮겨지도록 되어 있다.

 

거중기를 지나면 바로 맞은 편에 정약용 유적지로 들어가는 정문이 있다.

정문에는 '실학연수實學淵藪' 현판이 걸려 있는데, 찾아보니 '실학사상이 담긴 의 못(못 연淵)과 늪(늪 수藪)'이란 뜻이다.

이곳에 있는 정약용 선생의 묘 안내도에는 이 문을 외삼문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외삼문外三門이란 종묘, 문묘, 향교, 서원, 관아 등의 정문으로서 문이 세 칸인데, 임금, 수령, 헌관만 가운데 문[신문神門]으로 출입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양쪽문[인문人門]을 통하도록[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오도록] 명시되어 있다.

이 문을 외삼문으로 지칭한 것을 보니 이곳 사당인 문도사로 들어가는 문이 내삼문으로 짐작된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찍은 정약용 유적지 경내 파노라마 사진.

가운데 길 끝 동산에 다산 선생의 묘와 묘비가 있고, 동산 오른쪽 앞 기와건물이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 동산 왼쪽 뒤에 보이는 기와건물은 사당인 문도사, 그리고 맨 왼쪽 소나무 뒤로 보이는 하얀 건물은 다산기념관이다.

 

먼저 다산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부터 들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세상을 떴고 이 집 뒷산에 묻혔기 때문에 뒷산에 묘와 묘비가 있다.

집 이름은 선생의 당호堂號[집의 이름 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호]를 그대로 붙인 것인다.

여유與猶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사리판단을 너그럽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선생이 이런 당호를 가졌다는 것은 그러한 도인道人의 풍모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여유당 왼쪽에 우뚝 서서 집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100살은 훨씬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

 

왼쪽 담장 앞에서 바라본 여유당과 선생의 묘가 있는 뒷산 모습

 

여유당 앞에서 몸을 왼쪽으로 돌려 바라본 유적지 모습.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정문(외삼문), 다산문화관 옆문, 다산기념관 정문이다.

 

여유당 뒷산 꼭대기에 있는 선생의 묘와 그 아래쪽에 서 있는 묘비

 

8월 10일에 들렀을 때 찍은 선생과 부인 합장묘

 

왼쪽으로 돌아서 바라본 묘와 묘비가 있는 뒷동산, 그리고 생가인 여유당.

 

인터넷에서 찾은 다산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 합장묘(사진 출처-https://blog.daum.net/bae5411/15800954)

 

뒷산 왼쪽(서쪽)에 위치한 선생 위패를 모신 사당 문도사文度祠.

문도사로 들어가는 문이 내삼문內三門이다.

 

문도사 서쪽 잔디밭에서 바라본 유적지 풍광.

왼쪽부터 차례로 문도사, 묘가 있는 뒷동산, 생가 여유당, 정문(외삼문).

 

다산기념관茶山記念館에는 선생의 생애, 저서·시·편지 등 사본,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벽에 붙어 있는 '기념관' 표지판.

오른쪽 위에는 선생이 지은 '송별送別' 시가 적혀 있다.

 

"가을비 내리는 역사에서 사람 보내기 쉽지 않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올 이 또 뉘 있을까

유사에서 시 짓던 날 잊을 수 없고

임금님 떠나신 경신년 슬픔 말로 못하겠네

대나무 몇 그루 서걱거릴 다음 날 밤엔

머리 돌려 고향 보며 눈물이아 흘리겠지"

 

다산기념관 내 전시물들은 모두 사본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30대와 60대에 쓴 글씨

 

강진 유배 당시 11년간 머물렀던 다산초당 사진

 

2021. 6.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