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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 석촌동 고분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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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 석촌동 고분군

새샘 2021. 8. 31. 20:11

<198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발굴 전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석촌동 고분군 石村洞 古墳群(사적 제243호)은 이미 잠실지구개발사업 등에 따라 1970년대에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 들어서도 발굴조사는 계속된다.

 

<석촌동 3호분의 발굴 전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먼저 1974년에 부분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던 석촌동 제3호분에 대한 조사가 1983년에 이루어졌는데, 이 조사는 복원 및 정화를 위한 예비발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고분의 평면 규모는 동서 49.6미터, 남북 43.7미터로서 동서로 긴 네모형이며 높이는 4.0~4.5미터로 추정된다.

단의 폭은 5미터 내외이며 3단임을 확인하였다.

고분의 축조 과정에 대해서는 정지整地[땅을 일정하게 고름] 작업 때 흙다짐을 사용하였고, 외곽 기단에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을 놓았다.

또한 다듬은 면을 가진 깬돌(할석割石)로 단을 만들고, 강가 조약돌도 발견되었다.

 

석촌동 3호분에 대한 제3차 발굴은 서울시가 백제유적 정화·보존사업을 위한 최종 기초조사사업으로서 서울대박물관이 1984년 7월 5일부터 8월 21일까지 실시하였다.

 

<석촌동 3호분 서남쪽 민가 담 제거 작업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제3차 발굴 때 주변의 민가는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서쪽 면과 남쪽 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심하게 파괴되었고, 1974년 발굴 때까지 남아 있던 3단 축성 단면도 많이 파괴되었다.

민가가 밀집하고 있던 동쪽 면은 많이 훼손되었으며, 북쪽 면도 작은 길이 생기면서 돌을 옮겨 쌓아 원래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다.

신설 도로에 접한 남쪽 면도 상당량의 돌들이 잘려나간 상태로서, 주민들 말로는 도로공사 때 약 7~8미터 가량 고분 쪽을 깎고 들어왔다고 하는데, 다행히 기단의 일부는 아직 남아 있었다.

 

먼저 고분의 평면 규모는 남북 길이 43.7미터로 앞서 1983년 발굴조사 당시 길이와 똑 같았다.

그러나 동서 길이는 1983년 당시 길이 49.6미터보다 조금 긴 55.5미터로 추정하였다.

높이는 4.3미터로 추정하여 1983년 당시 추정 범위였다.

 

출토유물로는 주로 토기 파편과 기와 파편이 약간 나왔는데, 완전한 형태로 복원된 토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 외 일부 출토된 자기 파편은 중국 육조 초기의 모가지 부분 파편으로 생각되었고, 밑부분은 일부러 깬 듯이 보였다.

이 자기 파편 가까이에서 흑색도기 파편도 출토되었다.

 

보고서에서는 자기 파편과 흑색도기 파편 등의 출토유물이 육조六朝시대(229~589)[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동진東晉, 남조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이 존속했던 기간을 모두 합한 시대] 초기인 4세기로 보고, 고분의 축조 연대를 백제 초기의 왕릉으로 추정하였다.

 

백제 초기 왕릉으로 보는 이유는 대형의 돌무지무덤(적석총)으로서 돌덧널(석곽) 구조를 갖고 있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 많다는 점 등이다.

즉 중국 장군총이나 대왕릉 등은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고분 전체를 축조했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인데 반하여, 이 고분은 고구려 초기의 강돌(천석川石)이나 산돌(산석山石)로 만든 돌덧널돌무지무덤(석곽적석총)의 전통을 갖고 있다.

발굴단은 이런 형식 특징이 이 고분이 백제 초기의 왕릉임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굴단은 석촌동 3호분의 복원과 보존을 위한 몇 가지 안을 제시하였다.

제1안은 현재 파악된 고분 윤곽과 서쪽에 남아 있는 유구 상태에 근거하여 나머지 부분을 복원하여 3단을 쌓고, 그 윗 부분은 현재 파괴된 상태로 정화보존하는 방법이다.

 

제2안은 축조 당시 고분의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고, 인접한 제4호분이 전면 복원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여 후대에 쌓은 것이 확실한 돌과 토사를 제거하고 파괴된 상태로 정화하는 방법이다.

 

제3안은 현재 높이인 4.3미터를 고려하여 각단의 높이를 0.9미터로 균일하게 전면 복원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5단 축석이 되며, 다른 사항들은 제1안에 준한다.

3안은 고분 대부분을 신축하는 것이어서 고분으로서의 의의나 가치를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

 

이런 세 가지 안을 가지고 서울시는 어떻게 복원하였을까?

다음 사진에 나오는 석촌동 3호분의 현재 모습을 보면 제1안대로 복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안에 따라 복원된 석촌동 3호분의 현재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고분군은 1986년에 다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서울시는 석촌동 3·4·5호분 일대를 연결하여 백제고분공원으로 복원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3호분과 4호분 사이로 백제고분로가 지나고 있어 이 두 고분이 격리된다는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두 고분 사이의 도로를 지하차도로 변경하였다.

이 지하차도 건설공사로 3호분의 동남쪽 모서리 일부와 3호분 동쪽 일대의 유적 일부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긴급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 대상지역은 크게 3호분 동남 모서리 일대, 3호분에서 동쪽 고지대 중앙을 지나는 작은 길까지, 그리고 이 길에서 고지대 끝까지 등 3지역으로 나누었는데, 보고서에서는 이들 지역을 각각 3호분 지역, A 지역, B 지역이라고 표기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대형 움무덤(널무덤, 토광묘土壙墓: 땅을 파서 널(관)을 묻는 무덤) 1기, 파괴된 돌무지무덤(적석총)과 이음돌봉토분(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흙으로 분구를 쌓고 흙 위에 얇은 이음돌로 덮은 무덤) 각 1기, 독무덤(옹관묘甕棺墓) 6기, 움무덤 11기, 움돌무지무덤(토광적석묘) 1기, 돌덧널독무덤(석곽옹관묘) 1기와 수십 점의 토기를 발굴하였다.

 

<석촌동 3호분에서 금제귀고리가 출토되는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3호분 고분 안에서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동쪽 변 기선基線[줄기가 되는 주요한 선]을 확인한 결과, 동서 길이는 50.8미터로 확정되었다.

남북 길이는 43.7미터로 앞서 조사와 같았지만 여러 가지 사실들을 제시하면서 원래 남북 길이는 48.4미터가 더 타당하다고 보았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 옥연석玉硏石[물체 표면을 갈아서 부드럽게 만드는 돌], 돌송곳(석추石錐)[돌의 끝을 바늘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든 뗀석기] 등이 나왔다.

 

<석촌동 3호분 A 지역에서 출토된 독무덤(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3호분 A 지역에서 출토된 청자 네 귀 달린 항아리(청자사이호)는 (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3호분 B 지역에서 출토된 이음돌봉토분을 덮고 있는 이음돌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A 지역에서는 움무덤 6기, 움돌무지무덤 1기, 독무덤 5기, 돌덧널독무덤 1기가, 그리고  B 지역에서는이음돌봉토분 1기, 대형 움무덤 1기, 움무덤 5기, 독무덤 1기, 파괴된 돌무지무덤 1기, 돌덧널무덤 1기가 각각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A 지역 8호 움무덤 북동쪽에서는 동진東陳시대(317~419)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네 귀 달린 항아리(청자사이호靑磁四耳壺)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유구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음돌봉토분은 조사구역 중 동쪽 맨 끝에 있었으며, 동·남·북 3면이 잘려나가고 서쪽 일부만 남은 파괴 고분이다.

 

B 지역에서는 완전히 파괴된 돌무지무덤도 조사되었다.

이 파괴된 돌무지무덤의 아래쪽 지역에는 대형움무덤에서 시작하여 이음돌봉토분과 1~5호 움무덤들이 분포되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지대의 범위 안에서는 이 돌무지무덤의 기선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규모는 헤아리기 어렵다.

단지 사방 20~22미터 범위에 걸쳐 성토층에 박힌 돌무지무덤의 하부 기단석만이 남아 있어 적어도 한 변이 20미터 이상 되는 돌무지무덤이었다고 추정하였다.

 

<석촌동 3호분 근처 판축부 아래에서 발견된 사람뼈(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밖에 A 지역의 동쪽에서 사람뼈(인골人骨)가 나왔다.

정연하게 판축版築[건축물의 기단이나 토벽을 쌓은 방법으로서, 돌을 판판하게 깔고 그 위에 흙을 얇은 층 모양으로 쌓아 올리는 건축법]된 두께 90센티미터 가량의 판축토板築土[판축할 때 쌓아 올리는 흙] 아래에 완전히 부식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머리뼈(두개골)는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오른쪽으로 누워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아래에 몇 깨의 뼈 흔적만이 남아 있다.

현재 상태로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체로 시신을 옆으로 눕한 다음 반으로 접은 매장 형태인 측와반굴장側臥半屈葬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사람뼈의 머리맡에는 짧은목항아리(단경호短頸壺) 3점이 놓여 있었다.

 

<석촌동 1호분 발굴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그 다음 해인 1987년에도 이어졌다.

이 발굴조사는 석촌동 고분군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의 연장선이자 마지막 조사로 이미 복원된 4·5호분과 복원 중인 3호분 이외에 아직 확인이 안 된 두 고분인 1·2호분의 복원에 필요한 규모와 구조, 축조방식 등의 기초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아울러 공원구역 안에 5개 고분 외에 또다른 백제 고분이나 다른 유구들이 남아 있늦지 확인하는 것도 또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서울대 외에 경희대와 숭실대가 합류한 발굴단이 조직되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서울대 발굴단에서는 1·2호 돌무지무덤과 돌덧널무덤 3기, 움돌무지무덤 1기, 독무덤 1기를, 경희대 발굴단에서는 A호 돌무지무덤, 돌덧널무덤 3기, 움무덤 1기, 움돌무지무덤 2기를, 숭실대에서는 돌덧널무덤 2기, 움무덤 2기를 발굴하였고, 그 밖에도 전모를 확인하지 못한 파괴된 돌무지무덤과 움무덤 등 여러 개가 있었다.

 

1호분은 석촌동의 다른 고분과는 달리 2기의 고분이 합쳐서 이루어진 쌍분雙墳으로서, 동서 9.9미터, 남북 8.9미터 크기의 북쪽 무덤(북분)과 동서 9.6미터, 남북 9.8미터 크기의 남쪽 무덤(남분)이 결합된 것이다.

결합 과정에서 두 고분 사이의 거리 3.7미터는 점토粘土로  메워져있고, 두 고분의 서쪽 모서리에 이어 폭 3.2미터 너비의 단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1호분 전체 규모는 동서 12.8~13.1미터, 남북 22.3미터에다, 남쪽 높이는 1.0미터에 달하고 긴축 방향은 북에서 약 11도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석촌동 1호분 중 남쪽 무덤의 작은 돌덧널 안에서 은제품을 출토하는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1호분의 출토유물은 남쪽 무덤의 작은 돌덧널 바닥에서 나온 은제품과 두 고분 사이에 위치한 판축 부분의 동쪽 끝 외곽 바닥에서 확인된 토기 아랫부분 파편뿐이다. 

 

<석촌동 2호분 발굴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2호분은 4호분 동남쪽 모서리에서 남쪽으로 45미터 가량 떨어진 일대에 폭 약 20미터, 길이 약 25미터, 높이 약 3~4미터 규모의 봉우리를 이루고 남아 있었으며, 서쪽은 민가의 뒷마당이 되면서 일부가 잘려나갔고, 그 자리에는 조그만 담장이 서쪽으로 벌어진 ㄷ 자 형태로 축조되어 있었다.

 

A호 돌무지무덤은 경희대에서 발굴하였다.

발굴조사 중 나온 돌무지들은 독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의 네모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20~25센티미터 크기의 돌무지로 이루어진 네모반듯한 모양(방형方形)의 모서리 안쪽에 두 줄로 된 타원형 직선선이 돌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모 형태와 타원형 직선선 사이에는 잔자갈돌들을 깔아 놓은 후에 황갈색 진흙을 깔아놓고 판축했음을 확인하였다.

네모 형태의 남북 방향 길이는 16미터이고 동서 방향은 16미터보다 약간 더 길 것으로 추정하였다.

 

보고서에 더 이상의 내용은 없고, 유구의 성격에 대한 언급도 없기에 더 이상의 추측은 힘들지만 상당히 이질적인 형태의 돌무지무덤이라 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는 안은 타원형이고 밖은 네모 형태를 한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돌무지무덤라 했지만 과연 돌무지무덤의 구조를 가진 고분인가는 의문이다.

 

석촌동 지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고분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 중에서도 A호 돌무지무덤이라 이름 지은 이 유구는 더욱 이질적이어서, 앞으로의 조사를 기대해본다.

 

발굴단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왕릉으로 추정되는 돌무지무덤 계열의 대형 쌍분이 처음으로 확인되었고, 이런 쌍분 전통은 압록강 유역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환인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고력은 고(구)려와 통함]에 보이는 이음식 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세력의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으며, 같은 돌무지무덤이라 하더라도 시기를 달리하여 축조되고 있는 시간 격차를 보여주고 있어 장기간에 걸친 한강유역 백제 한성시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사실 석촌동 고분군은 다양한 묘제墓制[묘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많다.

최근 석촌동 지역의 돌무지무덤에 대해 다른 시각과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복잡한 양상과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구제발굴이라는 조사의 성격상 급하게 조사가 이루어지고 미흡한 부분도 많아 아쉬움이 많다.

2015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이 시작한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앞으로 좀더 확대되어 기존 발굴 고분에 대한 재조사로까지 이어지기를 희망해본다.

 

발굴단은 복원정화 방안과 이후 대책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런 발굴단의 제안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석촌동 고분군이 탄생한 것이다.

비록 주변지역이 점점 도시화되면서 거대 빌딩과 아파트에 둘러싸인, 마치 거대 도시 속의 외딴 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몇몇 고분들이 이렇게 금싸라기 땅에서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8.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