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표암 강세황 "벽오청서도" "피금정도" "영통동구도" "사군자" 본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자가 광지光之이고 초호初號가 첨재忝齋다.
강세황에 대해서는 ≪표암유고豹菴遺稿≫ 6책이 있고, 변영섭이 쓴 ≪표암 강세황 회화 연구≫라는 책도 있다.
강세황은 당시 시서화詩書畵를 모두 잘하는 삼절三絶로 평가받았다.
더불어 나무나 돌 등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인각印刻도 능했다.
하지만 표암은 작품보다는 자신에 관한 일화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그중 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하면, 누군가 '표암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얘기를 하자 이를 들은 영조가 '그런 얘기 하지 말라, 그런 천한 기술[천기賤技]를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표암에게 오히려 누가 된다'고 했다 한다.
그런데 이 얘기를 표암이 듣고 감격해서 그 후 한 십 년 동안 그림을 안 그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말년에 다시 그림을 그렸다.
이 일화를 통해서도 그 당시 강세황은 이미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첨재란 강세황의 호는 위에 있는 그림인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의 낙관에 씌어 있다.
변영섭은 첨재란 강세황의 30~40대 즉 젊었을 때의 아호였다고 확인함으로써 이 그림은 강세황이 젊었을 때 그려진 것이다.
강세황은 명나라의 오파吳派[당시 강남의 오현吳縣(현 소주蘇州)에서 활동하던 문인화가들]라는 중국 화풍을 숭상하였고, 아마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영향도 있어서 그런지 오파풍을 조선 화단에 유포시키는 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현재 심사정이 오파풍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강세황의 영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강세황의 그림은 대체로 3가지 종류의 그림이 있다.
그중 첫 번째 종류가 화보를 보고 모방하여 그린(방倣) 그림이다.
그의 모방 그림 대표작은 위에 있는 <벽오청서도>를 꼽는다.
그림은 매우 단순하여 선비가 벽오동나무 아래 들어선 초옥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선비는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비질하는 동자를 무심하게 쳐다본다.
그늘을 드리운 벽오동과 뒤란[집 뒤 울타리 안]의 파초 그리고 먼 산에 가해진 푸르스름한 담청에서 한여름의 싱그러움이 뚝뚝 떨어진다.
생명의 계절이 맹렬한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만상이 내적인 충만에 젖어 고요 속에 잠겼다.
지나가던 바람조차 숨을 죽인다.
한낮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은 오직 비질로 마당 쓰는 소리뿐이다.
강세황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남종문인화가답게 여름날에 만날 수 있는 선비의 일상을 담백하게 우려내었다.
그림 위에 '심석전의 벽오청서를 보고 그렸다(벽오청서 방심석전 碧梧淸暑 倣沈石田)'고 적었다.
석전은 명나라 오파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심주沈周(1427~1509)의 호다.
강세황은 이 그림을 심주의 진품이 아닌 ≪개자원화전≫에 실린 흑백 그림을 보고 그렸다.
그런데 강세황이 그림을 보고 모방해 그렸는데도 심주의 아류로 취급받지 않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비결을 이 그림에 자신의 해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강세황은 심주의 원판에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을 넣어 '강세화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표암 그림의 두 번째 종류는 사경풍寫景風 그림이다.
사경풍이란 실제 경치 즉 실경實景을 그대로 그림을 말하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표암은 사경풍만이 아니라 지도도 그렸다는 말도 있다.
이런 사경 그림의 대표작은 표암이 중년에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다.
그리고 말년에 그린 위 그림 <피금정도披襟亭圖> 역시 사경 그림이다.
1788년 금강산을 유람한 강세황은 붓을 멋대로 휘두르는 정선 금강산도는 진경眞景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이전 시대의 그림을 넘어서는 금강산도를 그리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쳤다.
강세황은 금강산행 후에 기념비적인 규모와 표현을 선보이는 1789년의 <피금정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정선의 전통을 벗어난 동시에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추구해 온 사실적인 실경산수화에서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금정도>는 1757년 작품 ≪송도기행첩≫ 이후 20여 년 동안의 절필 속에서도 실경에 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강세황의 마지막 실경산수화다.
강원도 북부의 금화와 회양 사이에 자리한 금성현의 남대천 계곡에 있는 피금정에 대한 위성사진, 과거 지도, 피금정 기록, 피금정을 그렸던 다른 화가들의 그림 등과 비교한 결과 <피금정도>는 실제 경관과 깊은 연관성 없이 상상에 가까울 정도로 산수를 재구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피금정도>에 표현된 경치는 넓은 공간 속에서 상하로 펼쳐지고 사리지다 다시 나타나며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산맥이다.
일정한 표현 단위를 반복적으로 구사하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이런 표현은 용맥龍脈이라 불리며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 표현이었다.
황공망, 동기창, 왕원기에 이르는 중국 문인화가들이 자신들의 산수화에 용맥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문인화의 전형적인 구도로 성립되었다.
이들에게 용맥은 자연에 내재한 기세를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방식이었다.
금강산 경험 이후 강세황은 산수에 내재한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옛 대가들이 구사하던 회화 방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1789년의 <피금정도>는 강세황이 일생에 걸쳐 지속한 사실적 회화의 모색과 필묵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포착하고자 시도해왔던 조선화된 문인화의 추구가 만나는 자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위 그림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는 강세황이 1757년 송도松都(지금의 북한 개성開城)를 여행하며 그린 ≪송도기행첩≫에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은 "서양화법으로 옛 그림에 빛을 주는 그림"이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보다시피 과장되게 표현한 아주 큰 바위가 화면을 압도한다.
큰 바위들 사이로 나귀를 탄 선비가 길을 가고, 그 뒤를 시종이 따르고 있다.
바위에 비해서 사람을 작게 묘사하여 대자연의 경이를 부각한다.
분위기가 5월의 날씨만큼이나 싱그럽다.
산은 붓을 옆으로 뉘어서 찍는 미점米點으로 음영을 만들어 표현하고, 바위는 먹의 번짐 효과로 괴량감塊量感[표현하려는 물체를 덩어리지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을 강조했다.
엷은 채색이 그림을 시원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당시 유행한 남종화에 새로 유입된 서양화법을 구사한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실경도 실경이지만 묘하게 인상주의적으로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이전까지의 산수화와는 확연히 다르며, 사실적인 음영법이 실감을 더한다.
마치 서양화를 보고 그리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주는 아주 독특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왼쪽 위에 쓴 기행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통동 입구에 난립한 바위들은 어찌나 큰지 집채만 하고 그 바위에는 푸른 이끼들이 끼어있는데 눈을 깜짝 놀라게 한다.
전해오기로는 못의 밑바닥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이 넓은 장관은 정말 보기 드문 풍경이다.
영통동구靈通洞口 난석장위亂石壯偉 대여옥자大如屋子 창소복지蒼蘇覆之 사견해면乍見駭眠
속전용기어추저俗傳龍起於湫底 미필신연未必信然 연환위지관然環偉之觀 역소희유亦所稀有"
이 그림은 우리나라 회화사의 하나의 연구 거리가 되고 있다.
표암 그림의 세 번째 종류는 사군자四君子다.
강세황은 사군자를 그릴 때 화보와 옛 그림을 많이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말년에 북경에 사신을 갔다온 후부터 그린 사군자 특히 대나무 그림은 중국 맛이 많이 가미된 후하고 두툼한 대나무 양식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표암 특유의 회화미가 표출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대각선을 중심축으로 사선과 여백을 밀도 있게 운용하는 감각이 뛰어나며, 특히 사군자를 그릴 때 그 저력이 더욱 잘 나타난다는 평을 받는다.
이런 그의 화풍은 남다른 구도 감각을 보여준 제자 김홍도에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매난국죽 한 벌로 사군자를 그려낸 것은 강세황이 처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강세황 당시엔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순서가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였으며,
위 그림 <사군자> 8곡병[곡병曲屛이란 머리맡에 치는 병풍을 말하며, 우리말로는 머릿병풍]은 매죽국난의 순서로 그렸고, 맨 마지막인 난 그림에 강세황의 관지가 있다.
강세황은 그림 뿐 아니라 감상가로서도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그 당시 중인들이나 화원들과 접촉이 많고 또 사인士人[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출신으로 그림 그리던 현재 심사정과도 왕래가 있어 서로 어울려 다니면서 그림도 같이 그리고 또 그린 그림에 평을 써놓은 것이 많다.
겸재 정선의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를 '중년최득의필中年最得意筆'[중년에 그린 그림 중 화가 자신이 가장 만족해하면서 뽐내는 작품]이라 화제를 붙인 것이 그의 감상평으로서 가장 유명하며, 그 당시 조금 이름있다는 화가 중에 강세황의 평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많다.
말하자면 그 당시 감상가로서 화단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우리 화단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강세황은 회화작품의 품평과 감식에도 큰 역할을 했디고 할 수 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법보신문 인터넷판 2015. 02. 10. "7. 강세황, 벽오청서도"(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5653).
3. 한국학술지인용색인 KCI 통합검색, 1789년의 <피금정도>: 강세황의 실경산수화에 대한 모색과 귀결(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97084).
4. 영남일보 인터넷판 2017-05-19.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강세황 작 '영통동구도'(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70519.010390804480001).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영통동구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793#self)
6. https://m.blog.daum.net/gofor99/372[사군자].
6. 구글 관련 자료
2021. 9. 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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